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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3화 (3/100)
  • 3화

    마카롱

    르나르가 저택에 다녀간 같은 날.

    붉은 노을빛이 선연히 서재를 물들이던 시각.

    “부탁이 있어.”

    셋째 오빠 미르엣이 날 찾아왔다.

    르나르가 입에 넣었던 손가락이 간지러워 손끝을 보던 내가 미르엣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재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고 문틈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말하는 모양새가 어쩐지 수상했다.

    “부탁? 무슨 부탁?”

    “내일 하루만 아픈 척해 줘. 아주 일찍부터, 온종일.”

    “이유는?”

    “이유는 묻지 말고.”

    의도를 알 수 없는 부탁이었다.

    “해줄 거야? 해줄 거지?”

    미르엣이 새벽빛 푸른 눈동자를 곱게 휘며 웃었다.

    하지만 친오빠들의 미모에 이미 면역될 만큼 면역된 내 대답은….

    “아니.”

    단호하고 간결한 내 답에 미르엣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르엣의 부탁은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거절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를 제대로 말해. 그럼 한 번 생각해 볼게.”

    심드렁하게 말한 내가 읽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미르엣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눈앞엔, 빨간 비단 리본으로 묶인 연한 하늘색 선물 상자가 나타났다.

    “…이게 뭐야?”

    “황실 파티셰가 만든 마카롱. 보던트 상점 거리에 빵집을 열었다가 단번에 유명해져 황실에서 스카우트해 간 파티셰, 너도 알지? 네가 먹어보기도 전에 황실에 빼앗겼다고 엄청 억울해했었잖아.”

    르나르가 미르엣에게 부탁받은 물건이 있다더니 그게 바로 저 마카롱이었나 보다.

    르나르라면 황실 파티셰와 아는 사이일 것이었다.

    그는 에반에게 자신이 황실 기사라고 말했고, 원작에서도 그는, 황제의 핏줄이란 진실을 숨긴 채 황궁에서 올렌도 황자의 호위기사로 지냈으니.

    르나르 생각에 내가 대답이 없자 미르엣이 마카롱 상자를 바로 내 코밑까지 들이밀었다.

    때마침 불어온 봄바람의 꽃향기가 마카롱의 달짝지근한 냄새와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그런데 우리 오빠는….’

    다 큰 내가 정말 이런 마카롱 따위에 넘어갈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

    “엘로즈, 몸이 안 좋을 땐 이렇게 따뜻한 걸 먹어줘야 해. 게다가 요즘은 환절기라 감기에 걸리기 더 쉽다고!”

    에반이 잔소리와 함께 내게 생강차를 먹이려고 했다.

    ‘하지만 생강차는… 맛없는데.’

    “생강차 대신 꿀차 먹으면 안 돼?”

    “안 돼. 이게 몸에 더 좋아.”

    “생강차 쓴데.”

    “몸에 좋은 게 원래 입에는 쓴 거야. 착하지, 내 동생?”

    에반이 내게 생강차를 먹이기 위해 가까이 다가와 앉자 그의 곱슬곱슬한 금발이 흘러내려 그의 눈을 가렸다.

    그러자 귀찮은 듯 후하고 불어버리는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보기만 해도 뿌듯했다.

    ‘내 오빠들이지만 하나같이 참 잘생겼단 말이지?’

    “뭘 그렇게 흐뭇하게 봐?”

    “그냥. 오빠 얼굴이 재밌어서.”

    “내 얼굴이 재미있어? 재미? 내가 아는 그 재미?”

    내 말을 이해 못 한 에반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내가 살던 세계에선 얼굴이 잘생기면 얼굴이 재밌다고 표현한답니다.’

    라는 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내가 에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머엉…? 멍멍!!”

    방문이 열려 있던 건지 강아지 러블린이 좁은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러블린?! 이리 와!”

    “러블린! 로즈의 침대 위로 올라가면 안 돼!”

    러블린은 간곡한 에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점프해 내 침대 위로 올라왔다.

    품에 안긴 러블린이 재롱을 피우며 얼굴을 핥았다.

    평화로웠다.

    나는 이런 평화가 좋았다.

    사랑스러운 반려견과 내가 아프면 신경 쓰는 가족, 이 모든 것이 좋았다.

    오늘 아침, 코웰 대공작 저택은 에드워드 코웰 대공을 포함한 오빠들의 입궁 준비로 분주했다.

    황제가 그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초대 목록에 나 또한 포함되어 있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아버지! 로즈가 아프다고 하네요!”

    미르엣이 코웰 대공을 불렀다.

    겨우 그런 마카롱 따위에 넘어간 거냐고?

    그럴 리가!

    그 마카롱은 겨우 그런 마카롱이 아니었다.

    보던트 상점 거리에 신의 손으로 만든 마카롱이 있단 소문을 접하고 빛만큼 빠르게 찾아간 내가, 빛보다 빨랐던 황실에 패해 아쉽게 맛보지 못한 바로 그 마카롱이었단 말이다.

    현실 세계에서 아끼며 살았던 내게 마카롱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살 수 없을 만큼 비싸진 않지만 차마 내 돈 주고 먹기엔 아까운 사치품.

    그 때문인지 이쪽 세계에 넘어온 뒤로도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마카롱에 유난히 집착이 심했다.

    그래서 나는 결국 하고 있었다.

    미르엣이 부탁한 그 아픈 척을.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아프다는데, 오빠들이 무척 기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로즈가 아프다고?!”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 에반이 소리쳤다.

    “로즈가 아프다니… 내 마음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꾸며낸 둘째 오빠 겔리온의 입꼬리가 금방이라도 올라갈 듯 실룩댔다.

    겔리온, 미르엣, 에반을 보며 내가 고개를 갸웃대는데, 첫째 오빠 레오와 아버지 코웰 대공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날 사랑하는 다섯 남자가 모두 모인 것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에 연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나와 달리 순금 같은 금발에 새파란 벽안을 가진 다섯 남자.

    “로즈가 아프다고?”

    “아버지, 그럼 로즈는 오늘 궁에 가면 안 되는 거죠? 아프니까?”

    미르엣이 대공에게 물었다.

    나는 그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미르엣이 나에게 아픈 척을 종용한 이유.

    ‘오늘 궁에 가는 거, 원래는 나도 가야 하는 거였구나….’

    “폐하께서 로즈를 꼭 데려오라 말씀하긴 하셨지만.”

    “…….”

    “아픈 로즈를 데려갈 수는 없지.”

    “아…빠…?”

    대공.

    입은 일자로 꾹 다물었는데 눈이 웃고 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내가 아픈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다섯 남자였다.

    열한 살 가출에서 돌아온 내가 크게 아팠던 뒤로는 더더욱.

    하지만 내가 아파 같이 입궁할 수 없는 것을, 이들은 지금 티 나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픈 척을 계속해 주기로 했다.

    이들이 모두 반기는 일이라면, 그것이 내게도 좋은 일일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나는 어느새 그만큼 이들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믿는 건 믿는 거였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에반, 그래서. 아빠랑 오빠들은 황궁에 왜 간 건데?”

    나는 내 병간호를 위해 집에 남은 에반을 옆에 꼭 붙들어 놓고 물었다.

    에반은 기 센 나의 네 오빠 중 그나마 다정한 성격.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라면 대부분은 숨기지 않고 말해줬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에반은 연이은 내 재촉을 계속 못 들은 척하며 말을 돌렸다.

    “로즈, 너 머리카락에 뭐 묻었다.”

    “로즈, 이 사과잼 파이도 먹어볼래?”

    “로즈, 러블린 털이….”

    “에반!”

    “…….”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아예 예상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치른 성인식. 엘로즈와 올렌도가 약혼하게 되는 건 엘로즈의 성인식 직후.’

    “에반, 아빠와 오빠들은 모두 날 사랑하지?”

    “당연하지. 근데 그렇게 당연한 건 갑자기 왜 물어?”

    “내가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아빠나 오빠들은, 원래 딸이나 동생을 무척 아끼면 약혼이나 결혼시키는 걸 싫어하고 그래?”

    내 낚시성 질문에 놀란 에반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즈, 너 전부 알고 있던 거야?”

    순진한 에반 토끼는 허술한 덫에도 쉽게 걸려들었다.

    “황제가 나를 황자와 약혼시키겠다고 했어?”

    단도직입적인 내 질문에 에반의 짙은 바다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한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던 에반은 결국 고개를 수그렸다.

    있지도 않은 축 처진 토끼 귀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직은 몰라. 근데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아버지나 다른 형들은 추측하고 있어.”

    “그래서 오늘 나까지 궁으로 부른 거고?”

    “아마도…?”

    ‘올 것이 왔구나.’

    그것이 에반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가장 먼저 하게 된 생각이었다.

    “미안해, 로즈. 넌 이 결혼이 하고 싶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에반이 나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말했다.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에반. 이 사람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대공도 다른 오빠들도 내게 당당하게 궁에 가지 말라고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고?’

    “에반은 내가 그 결혼을 하고 싶을 거로 생각해?”

    “잘은 모르겠지만 황자와의 결혼이고 황후가 되는 일이니까. 누가 봐도… 나쁜 혼처는 아니잖아…?”

    에반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늘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모른다면 말이다.

    그때, 대공과 오빠들이 돌아온 건지 밖이 시끌시끌해졌다.

    “아버지, 전 반대예요.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흥분한 레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흥분한 레오를 진정시키는 겔리온의 목소리가 뒤이어 어렴풋이 들렸다.

    “쉬, 형! 로즈가 듣겠어!”

    하지만 이미 감정이 격해진 레오의 귀엔 잘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겨우 성인식을 치른 아기한테 약혼이라… 으읍…!”

    겔리온이 레오의 입을 막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약혼.

    ‘역시 약혼.’

    “말도 안 돼….”

    나와 같은 단어를 들은 에반이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나라 잃은 얼굴을 했다.

    약혼이라고 한다.

    훗날 나를 죽이고 코웰 가문을 몰살시키는 것으로 원작에 적혀 있는, 바로 그 황자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요양 가는 것으로 하자. 요양 기간은 얼마로 잡을까? 일단 가볍게 6개월?”

    적극적인 나의 태도에, 다섯 쌍의 벽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꺼풀을 깜빡이며 나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황자와의 약혼을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여자는 흔치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를 믿어 대공과 오빠들.

    그 황자, 몹시 나쁜 사람이라니까?!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해? 내가 이대로 황자랑 약혼했으면 좋겠어?”

    도끼눈을 뜨며 묻자 대공과 오빠들이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요양은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우리 영지로 가는 건 너무 뻔해. 다른 추천할 지역들 없어? 수도랑 가능한 먼 곳으로.”

    어느새 지도를 찾아온 레오가 침대 위에 지도를 펼쳤다.

    “드리엔 지방의 호수 근처 별장을 매입하는 건 어때? 로즈가 예전에 그 호수를 보고 싶다고 했었어!”

    내가 하는 말이라면 전부 기억하는 에반이 제안했다.

    “아버지, 저희는 아무래도 로즈를 따라가는 게 좋겠죠? 번잡한 수도 생활이 영 안 맞기도 했고….”

    시골에선 절대 못 살, 타고난 도시 체질 미르엣의 말이었다.

    “별장 매입은 우리 명의로 하면 안 돼. 황제가 쉽게 찾아낼 테니까. 로즈가 지난겨울부터 종종 쓰러졌다고 길에 소문도 미리 뿌리고….”

    아카데미 시절부터 제국의 두뇌라 불린 수석 졸업생 겔리온이 말을 더했다.

    그렇게 내 별장 요양은 대공과 오빠들이 황궁에서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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