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미르엣의 안색이 그의 벽안만큼이나 파르스름해졌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이 허리춤 호신용 검의 손잡이를 찾았다.
미르엣은, 남자가 내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는 게 문제인 것이 분명했다.
“미르엣, 잠시만. 저분께서 날 도와주셨는데, 내가 다쳐서….”
흥분한 짐승을 달래는 몸짓을 하며 내가 미르엣에게 다가섰다.
그런데 그때, 돌아선 내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미르엣 대공자님?”
남자가 미르엣을 알고 있었다.
“대공자님, 보세요. 접니다. 르나르.”
“…….”
“대공자님?”
“르나르… 경…?”
잔뜩 흐렸던 미르엣 눈동자가 조금 선명해졌다.
그런데 나는 더 놀라게 됐다.
‘르나르라고? 저 사람 이름이?’
르나르, 그것은 내가 빙의된 소설 <너와 달만 아는 비밀>의 서브남주 이름이었다.
원작 표지엔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 얼굴밖에 없었기에 나는 르나르 얼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흑발에 적갈색 눈동자….’
그것은 원작이 르나르를 묘사한 특징이 맞았다.
여주인공조차 한땐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수려한 외모까지도.
난 조심스럽게 미르엣 뒤로 몸을 숨겼다.
원작의 중요 인물과 이렇게 엮이는 게 호재일지 악재일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그런 내 움직임을 기민하게 좇았다.
마치 점찍은 먹이를 예의주시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때, 다소 날이 선 미르엣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경이 왜 내 동생과 같이 있는 거지?”
순간 르나르 표정이 변했다. 맑은 적갈색 눈동자에 담긴 건 순수한 당혹스러움이었다.
그의 표정이 변한 때를 생각해 보면 미르엣이 ‘동생’이란 단어를 뱉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깜빡인 르나르는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았다.
가면을 쓰는 게 무척 익숙한 모양새였다.
“레이디께서 대공자님의 동생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레이디를 돕고 있었습니다. 레이디가 억지로 끌려가던 중이어서요.”
미르엣이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짓자 르나르가 바닥 쪽을 눈짓했다.
미르엣의 시선이 소란을 틈타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던 영식의 쳐진 엉덩이에 꽂혔다.
“…스웬 백작가 둘째?”
미르엣이 영식을 알고 있었다.
“네 얘길 들은 적이 있어. 예쁜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고.”
말하는 미르엣의 시선이 내 얼굴을 향했다가 내 손목으로 내려갔다.
슬쩍 뒤로 감췄지만, 미르엣은 영식이 우악스럽게 잡아 붉어진 내 손목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르나르 경, 우리 로즈를 집에 데려다주겠어? 내가 지금 아주 중요한 볼일이 생긴 것 같아서 말이야.”
눈빛이 선득해진 미르엣의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뒤 미르엣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르나르가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레이디께선 좋은 것만 보셔야죠.”
진지한 듯 장난스럽게 말한 르나르가 별안간 내 무릎 아래 손을 넣었다.
그러곤 날 공주님 안기로 번쩍 안아 들었다.
“……!”
놀란 내가 미르엣을 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르엣은 영식한테 집중하느라 이쪽 사정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빨리 가야겠네요. 곧 검을 휘두르실 것 같아.”
미르엣이 검을 드는 걸 본 르나르가 발걸음을 서두르자 미르엣과 영식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다.
여전히 얼떨떨했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올라가는 르나르의 입꼬리가 보였다.
그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내려주세요.”
보던트 귀족 상점 거리를 한참 벗어나 미르엣과 영식이 보이지 않게 된 뒤 내가 르나르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날 내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원작의 그는 여자와 몸이 닿는 걸 혐오했으니, 이렇게 날 안고 있는 건 분명 거부감이 들 텐데도.
“이곳, 오랜만이네요.”
르나르의 눈동자가 어딘가에 고정됐다.
그 고정된 곳을 시선으로 좇자, 카르웨인 후작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보던트 귀족 상점 거리에서 코웰 대공작 저택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르나르가 싱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역시….’
르나르는 열한 살 가출 때 내가 만난 그 아이가 맞는 듯했다.
‘이곳까지밖에 길을 모른다면.’
아이가 날 집에 데려다줬을 때, 신분을 숨기고 싶었던 내가 그를 이곳까지만 동행하게 했으니.
그런데 기억 속 아이와 눈앞의 르나르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 아이는 작고 말랐었는데 이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는 넓고 몸은 단단하니.’
애벌레와 나비처럼 풍기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래도 되짚어 보니 그 아이도 유난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긴 했다.
첫 만남이 해사한 미소로 귀부인을 홀린 뒤 목걸이를 훔치는 모습일 정도였으니.
회상에서 날 깨운 건 재촉하는 르나르 목소리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 안 알려주실 겁니까? 무거운데.”
“무거우면 내려주세요.”
“농담입니다.”
그가 씩 웃었다.
“그리고 같이 듣지 않으셨습니까? 대공자님께서 대공녀님을 잘 모셔다드리라고 하신 것을.”
“그게 안고 가란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피식, 가볍게 웃은 르나르가 정말 안 가르쳐줄 거냐는 듯 시선을 맞춘 채 눈썹을 들었다.
어린 시절의 만남에서 그가 내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일까?
마음이 약해진 내가 손가락으로 저택 방향을 가리켰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이 약해진 건 그가 ‘르나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원작의 르나르.
그는 내가 소설을 읽을 때부터 연민한 인물이었다.
르나르는 옆 나라 플루토나 제국 공녀였던 친어머니 가문이, 그레이시아나 제국 황제인 친아버지 계략에 휩쓸려 멸문된 뒤 평범한 평민처럼 자랐다.
날 때부터 남다른 외모를 가졌던 그는 남창가 마담에게 납치되는 사건을 겪은 후 여자와 몸이 닿는 걸 혐오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라며 스킨십을 해야만 하게 됐다.
어머니를 위한 복수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반란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유력 가문 영애들에게 접근했는데, 사랑에 빠진 척하면서 손끝도 건드리지 않을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드 마스터이자 마법사인 그는 타고난 능력 덕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까진 문제가 없었지만, 반란 후 민심을 잠재워주고 그를 정당화해 줄 지지 권력은 필요했던 것.
그런데 르나르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전 여주 캐스티나에게 독살당하게 된다.
그가 사랑한 망국 플루토나 제국의 황녀 캐스티나에게.
사실 캐스티나 또한 르나르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캐스티나는 르나르가 만나는 영애들을 보고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했고, 슬퍼하던 차, 원작 남주 올렌도 황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다 르나르가 올렌도 자리를 빼앗을 것을 염려해 그를 독살해 버린 것이었다.
“혹시 이곳입니까?”
어느새 코웰 저택 앞에 도착한 르나르가 물었다.
조용히 그의 품에서 내려온 내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잠시만요.”
르나르가 날 붙잡았다.
르나르는 내게 다가와 내 머리칼을 한 움큼 손에 쥐더니, 향을 맡는 듯하면서 내 머리칼 위에 입술을 눌렀다. 그러곤,
“다시 볼 수 있겠죠?”
라고 내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내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던 순간,
“아마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스스로 자신의 질문에 답한 르나르가 웃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경이… 왜 여기….”
코웰 저택 정원에서 르나르를 보게 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르나르를 만나기 전, 나는 정원 일각에 마련된 그네형 벤치에 앉아 막내 오빠 에반과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실 책을 읽던 것은 나뿐이었고 에반은 책을 읽기 시작한 지 5분도 채 안 되어 잠들어 버렸지만.
독서에 취미도 없으면서 그저 내 옆에 있고 싶어 자기도 책을 읽을 거라 말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에반을 속으로 귀여워하는데 에반의 얼굴에 나비 한 마리가 앉으려 했다.
에반의 잠이 깰까 싶어 쫓아주려니 나비가 내 손을 요리조리 피하며 춤을 췄다.
나비는 내 눈앞까지 날아왔다가 멀리 날아가는 기이한 행동을 반복했다.
마치 나에게 따라오라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나비를 따라간 곳엔 르나르가 있었다.
“홀렸… 나…?”
내가 혼잣말로 말하자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홀린 게 대공녀님이 아니라 나비일 수도 있죠.”
나는 그 말을 의미심장하게 느꼈다.
원작엔 검에 흘러 들어갈 수 있단 것 외에, 그의 마력이 또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하지만 르나르 주변을 홀린 듯 맴도는 나비를 보고 있으려니, 그의 마력이 나비를 홀릴 수 있는 것 같단 생각에 확신이 더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렴 좋았다.
그 순간 내가 궁금했던 건, 르나르의 구체적인 능력이 아닌, 그가 어째서 그런 능력까지 사용해 날 불러냈나 하는 것이었다.
“절 만나러 오신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더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택엔 미르엣 대공자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대공자님께서 제게 부탁하신 물건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복도에서 보이더군요, 이곳에 계신 대공녀님이. 대공녀님을 만나고 싶어 절 안내하던 집사를 따돌렸습니다.”
“…….”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중이란 얘기를 참 신박하게 했다.
“우연히 보게 된 저는 왜 만나고 싶으셨던 건데요?”
르나르가 웃었다.
“보고 싶어서요.”
“……네?”
“보고 싶었거든요. 대공녀님이.”
그 말을 하는 르나르는 참 태연해 보였다.
일부러 흘리는 눈웃음은 매혹적이었다.
순간, 르나르 뒤로 웅장한 코웰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 원작이 스쳐 지나갔다.
[르나르는 알았다.
영식의 호감을 사는 것보단 영애를 유혹하는 쪽이 그에겐 훨씬 수월하다는 사실.
타고난 얼굴에 기인한 마땅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시작은 영식으로 하기로 했다.
르나르 못지않은 외모로 사교계를 휩쓰는 미르엣 코웰.
미르엣 코웰에겐 여동생이 있었다. 엘로즈 코웰.
르나르가 그녀에게까지 손을 뻗지 않은 건, 그녀가, 르나르의 이복형제 올렌도 황자의 약혼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엘로즈 코웰은, 내가 빙의한 엘로즈 코웰은, 향후 누명을 쓰고 죽게 된다.
황후 자리에 집착하다, 여주 캐스티나와 결혼을 원했던 약혼자 올렌도에게.
이 사건의 여파로 코웰 가문까지 멸문당하게 되는데, 안 그래도 그 엔딩을 피하고자 했던 나는, 여주 캐스티나를 찾는 중이었다.
내가 직접 올렌도와 캐스티나를 이어주고 사망 플래그를 뽑기 위해.
‘그런데 코웰 가문이 르나르 편이 되어주고 르나르가 황제가 되면, 나와 우리 가문 모두가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캐스티나와 올렌도를 이어주지 않아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 생각을 하게 된 건 아직 올렌도 황자와 약혼하지 않은 나를, 르나르가 유혹하려 하는 것이 내 눈에 보였기 때문.
‘원작의 르나르는 엘로즈는 꼬시지 않았었는데….’
어린 시절 만나게 된 일 때문에 원작이 꼬이기라도 한 걸까?
그때, 별안간 내 뒤에서 잔뜩 날 이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지? 왜 우리 로즈와 같이 있는 거야?”
막내 오빠 에반이었다.
“엘로즈, 이리 와.”
에반이 날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그 손을 잡으니 에반이 날 끌어 등 뒤에 숨겼다.
르나르가 그런 우릴 흥미로운 표정으로 관찰했다.
“코웰 가문 대공자님이십니까? 금발의 곱슬머리… 에반 대공자님이시겠군요. 전 미르엣 대공자님께 드릴 것이 있어 저택에 들르게 된 르나르라고 합니다. 황실 기사죠. 대공녀님과는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니 걱정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르나르가 선한 얼굴을 가면처럼 걸곤 웃었다.
상당히 호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었는데 그럼에도 에반은, 분명한 경계심을 담아 르나르에게 말했다.
“미르엣의 손님이면 가보도록 해. 그렇지만 기억해. 다음부턴 엘로즈를 봐도 그냥 모른 척하는 거야. 알아들어? 가자, 로즈.”
에반이 날 저택 안으로 이끌었다.
무심코 뒤돌아보니 여전히 날 보던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
엘로즈와 에반이 사라지자 휘어졌던 르나르의 눈꼬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입가엔 여전히 가벼운 미소가 머물렀지만, 그럼에도 퍽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쉽진 않겠는데. 장애물이 넷… 아니, 다섯인가?”
르나르가 먹잇감을 노려보는 육식동물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황금빛 햇살을 담은 적갈색 눈동자가 이채로 번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