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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화 (1/100)
  •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

    1화

    아파요

    “아가씨, 장미는 어떠세요? 저는 오늘의 꽃으로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이 장미를 추천합니다!”

    꽃집 주인 나타샤가 붉은 장미 한 다발을 내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난 내키지 않았다.

    장미처럼 화려한 내 인생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난 이 소설 속 세계의 빙의자다.

    “별로야. 다른 건 없어?”

    단호한 내 거절에 나타샤가 입술을 쭉 내밀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성인식도 치르셨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정말 장미를 사 가셨으면 했는데… 분홍 장미도 싫으세요?”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녀가 내게 분홍 장미 다발을 내밀었다.

    탐스럽게 터진 꽃망울이 예뻐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별로, 파란 장미라면 모를까.”

    나타샤를 단념시키려는 의도로 내가 말했다.

    나타샤의 꽃집엔 파란 장미가 없었기에.

    내 말에 나타샤가 가볍게 콧방귀 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아가씨. 세상에 파란 장미는 없어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그 장미는 게다가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요. 아가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하고 싶으세….”

    그런데 나타샤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는 가벼운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나타샤와 나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나타샤가 든 장미보다 아름답다고 평할 수 있을 만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하얀 피부.

    붉은 기운이 강한 적갈색 눈동자.

    거기에 수려한 외모까지 더해져 첫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남자였다.

    나타샤와 대화하느라 미처 알지 못했지만, 나와 나타샤를 제외한 꽃집 영애들의 시선은 모두 남자를 향해 있었다.

    꽤 노골적인 눈빛들이었다.

    ‘남자도 저 시선들을 알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 남자를 다시 보니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 커진 눈.

    살짝 벌어진 입술.

    ‘놀란 얼굴?’

    의아한 내 고개가 모로 기울어지는데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싱긋 웃은 그는 허리를 숙이더니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랜만이야.”

    남자가 듣기 좋은 저음으로 내게 말했다.

    내가 대답 대신 물음표가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봤다.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봤는데 잊을 수 있을 얼굴은 분명 아니었으니.

    “죄송하지만… 절 아실까요?”

    내가 묻자 남자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남자는 뭐가 재밌는지 얕은 웃음을 흘렸다.

    사람을 홀리는 웃음이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입니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남자가 다시 한번 싱긋 웃으며 내 손등에 입 맞추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곤 순식간에 꽃집 밖으로 사라졌다.

    ‘손등에 입을 맞춰 인사하는 것을 보니 기사인가?’라고 내가 생각하는데,

    딸랑—

    꽃집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꽃집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일순간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당황하는 사내는 아까 나간 그 남자가 아니었다.

    옷차림을 보니 어느 귀한 집 자제 같았다.

    ‘적어도 백작가 정도?’

    그런데 백작가 자제로 추측되는 영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뭐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흑발 남자와 방금 벌어진 일도 있었기에, 내가 평소에 그랬을 것보다 유심히 영식을 살폈다.

    하지만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나타샤에게로 몸을 돌렸다.

    “나 이만 가 볼게. 꽃은 대충 골라 집으로 보내줘. 대신 장미는 빼고?”

    “아이참, 아가씨! 이토록 제 맘을 몰라주시면…!”

    “내가 나타샤 마음을 왜 몰라? 나타샤 나 좋아하잖아. 나도 나타샤 좋아해.”

    미소와 함께 말하자 잠시 멈칫한 나타샤가 날 따라 배시시 웃었다.

    나타샤는 날 좋아해 줬다.

    나타샤 외에도 아버지 코웰 대공, 네 명의 잘생긴 오빠들을 포함한 이 세계 많은 사람이 날 좋아해 줬다.

    그래서일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있던 세계로 갑자기 돌아가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 하나를 내가 몰래 모두에게 세우고 있는 것은.

    “또 오세요, 아가씨! 예쁜 꽃 많이 들여놓을게요, 꼭요…! 꼭!”

    나타샤가 붕붕 손을 흔들며 떠나는 날 배웅했다.

    꽃집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발길을 서둘렀다.

    네 명의 오빠 중 특히 외모가 출중한, 나의 셋째 오빠 미르엣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영애! 은발 머리 영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선 흔치 않은 머리색.

    ‘아마 날 부르는 것이겠지?’

    잠시 후, 꽃집에서 본 영식이 내 앞에 나타났다.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영식은 숨을 헉헉댔다.

    ‘그런데 다시 봐도….’

    정말 모르는 얼굴인데?

    “무슨 일이시죠?”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유는요?”

    “그게 그러니까….”

    “제가 아는 분이세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닌가요? 그렇다면….”

    “‘아는 분’이 되고 싶어서요.”

    “네?”

    “그, 그쪽을… 제가 알고 싶어서요….”

    더듬는 영식의 얼굴이 겨울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은 조금 바빠서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번화가에 나오면 종종 겪는 일이었다.

    예의 갖춘 미소로 영식을 거절한 내가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방금까진 눈도 잘 못 맞추던 영식이 우악스러운 힘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자, 잠시만요…! 그러니까… 저는 영애에게 첫눈에…!”

    영식의 얼굴이 더욱 발갛게 물드는 사이, 내 손목을 붙든 그의 악력이 강해졌다.

    나는 미간을 접었다. 통증이 강하게 왔기 때문이었다.

    “놔주세요.”

    “자,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놔달라니까요?”

    내가 영식의 손에서 억지로 내 손목을 빼냈다.

    그런데 그 순간,

    “아.”

    손끝에서 찌릿한 느낌이 났다.

    특이하게 생긴 영식의 커프스버튼에 베인 모양이었다.

    꽤 길게 베인 손끝을 보는데, 영식은 다친 나와 상관없이 그저 제 할 말을 하기 바빴다.

    “처음 뵙는 얼굴인 걸 보니 유력 귀족 가문 영애는 아니신가 봅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스웬 백작가의….”

    말하는 영식이 은근슬쩍 다시 내 손목을 잡았다.

    ‘당신이 내 얼굴을 모르는 건 대공과 오빠들이 날 사교계에 내놓지 않기 때문인데?’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영식은 겁도 없이 날 끌고 가려 했다.

    잠깐.

    끌고 간다고?

    ‘그건 정말 아니잖아.’

    “놔요, 아파요.”

    “…….”

    “아프다고요.”

    “…….”

    “아프단 말 안 들려요?”

    “그러니까…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아프다잖아.”

    그런데 그때, 서늘하게 가라앉은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퍽—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영식이 돌바닥 위를 굴렀다.

    놀라 뒤돌아보니, 꽃집에서 본 흑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영식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한 것이었다.

    “아프단 말 안 들려? 귀를 먹었나?”

    구겨진 표정의 남자가 허리춤에서 뽑아 올린 검의 끝이 영식의 목울대에 닿았다.

    잘 벼려진 칼날이 정오의 태양 빛을 반사하며 시퍼렇게 웃었다.

    당황한 내가 남자를 불렀다.

    “저, 저기요…!”

    하지만 남자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행동했다.

    “아프단 말도 못 듣는 형편없는 귀를 잘라줄까? 아님, 주제를 모르는 그 손모가지를 잘라줄까?”

    영식의 안식이 파리해졌다.

    정말 벨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 눈에도 남자는 정말 영식을 벨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저기요!!”

    안 되겠다 싶었던 내가 좀 더 강하게 남자를 불렀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날 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손 쪽이 죄가 더 크겠지?”

    남자의 검 끝이 작열하는 태양을 향했다.

    그리고 그 검의 검신이 마침 불어온 봄바람의 향긋한 몸체를 정확히 둘로 가르던 바로 그 순간,

    “아악!!”

    내가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그제야 날 봤다.

    살기 어린 눈빛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내 등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꿀꺽—

    마른침을 절로 삼키게 됐다.

    나 또한 영식이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신체 일부가 날아가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현대 사회에서 왔기 때문인지 나는 그런 것에 비위가 매우 약하기도 했다.

    눈앞에서 손을 잃는 영식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는 한동안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야 할지도 몰랐다.

    “이유.”

    남자가 가늘어진 눈으로 내게 물었다.

    제대로 된 이유를 대지 않으면 꼭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제지당한 것이 영 못마땅한 모양.

    어쨌든 그랬기에, 어떠한 변명이든 해야 했던 나는….

    “아파요…. 다쳤어요….”

    내가 우물쭈물 말했다.

    순간 손가락이 따끔했기 때문에 하게 된 말이었다.

    그런데…

    “어딜?”

    내게 묻는 남자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제 남자는 영식의 손이 아닌 목을 베고 싶어 하는 기세였다.

    “마, 많이 다친 건 아니고…!”

    놀란 나는 다친 손가락을 얼른 남자 쪽으로 내밀었다.

    죽 그어진 상처 위로 새빨간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상처를 보던 남자가 갑자기 실소했다.

    “넌 정말… 변한 게 없구나?”

    “네?”

    “그때도 그랬잖아. 너 다쳤다고. 그러면서 나한테 손가락 내밀었잖아. 지금처럼.”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는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내가 물러서는 것보다 남자가 다가서는 게 빨랐다.

    “그래서 난, 너한테 이랬을걸?”

    남자가 내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입에…

    물었다…?

    놀란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나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는 눈을 휘어 웃을 따름이었다.

    놀란 내 표정이 만족스럽다는 듯.

    남자가 내 상처 부위를 혀로 쓸었다.

    탁한 눈빛, 야릇한 표정으로 그런 짓을 하니 등허리가 절로 저릿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천성적으로 색기를 품은 그런 얼굴이다.

    그런데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얼굴이 있었다.

    ‘그때 그 아이? 내가 가출했을 때 만난?’

    다쳤다고 손가락을 내밀었던 나.

    그런 내 손가락을 무는 동일한 행동.

    내가 남자의 정체를 깨달은, 바로 그 순간.

    쿵—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롱한 진주알이 굴러 내 발치에 닿았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혼이 나간 목소리.

    “에, 엘로즈…….”

    “미르엣……?”

    바닥에 떨어진 커다란 상자.

    상자에서 쏟아진 여자 액세서리들.

    볼일이 있다고 사라졌으면서 또 내 선물을 사러 갔던 모양이었다.

    ‘잘생긴 얼굴’, ‘동생 바라기’로 유명한 나의 네 명의 오빠들.

    그중 세 번째 오빠 미르엣이, 잔뜩 굳은 푸른 눈동자로 나와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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