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화
새로운 구도
“유이치가 죽었다?”
“그렇게 전해들었습니다.”
“…….”
아들의 부고를 전해들은 요시다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그의 모습에 유이치의 죽음을 전한 수하도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은 요시다는 고개를 들며 수하를 바라봤다.
“다른 녀석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다케다는?”
“뒤늦게 유이치를 구하려고 움직였답니다. 하지만 유이치를 잡은 놈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유이치를 구해?”
“처음에는 인질로 잡혔다고 합니다. 유이치를 잡은 놈이 일회성 던전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답니다.”
그는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유이치의 죽음을 알리면서 모든 상황을 밝혀야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요시다의 반응이 너무나 격했기 때문에 그걸 밝힐 겨를이 없었다.
모든 상황을 전해들은 요시다는 침음을 삼켰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 문후?”
“예.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각성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합니다.”
상대가 좋지 않았다.
아무리 일본에 못 미치는 한국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한 국가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유이치의 자만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로군.”
“…….”
“다케다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오야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케다는 유이치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결단 때문에 조직의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었다.
굳이 여기에서 다케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 책임을 지운다고 하더라도 유이치가 살아나지는 않았다.
“한국 반응은?”
“그들 역시 적극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놈들이? 우리들 눈치를 살필 놈들이 아닐 텐데?”
“그쪽 오야붕의 아들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이문후라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래?”
묘하게 상황이 닮았다.
타국에서 죽은 아들의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요시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쪽에서는 이문후라는 사람을 잡으려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우선 협조를 구해왔습니다.”
“도와달라는 건가?”
“굳이 그들의 의도에 따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겠지. 상대는 유이치를 죽인 놈이니까.”
“… 예.”
“아들을 죽인 놈이라.”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냥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면이 서질 않았다.
“한국에 연락을 취해. 내가 직접 그쪽 오야붕하고 이야기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혈육을 잃은 요시다의 감정은 나창준과 다르지 않았다.
분노한 그는 같은 아픔을 가진 나창준과 함께 공동된 적을 상대하기로 마음 먹었다.
***
“한국 쪽에서 요청이 있었는데 말이야.”
“한국? 또 그 소리야? 일본놈들하고 같이 힘을 합치자던?”
왕룽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라룽샤에 집중했다.
계속 들었던 소리였다. 굳이 그놈들과 힘을 합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윗선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의뢰야.”
“의뢰?”
“사람을 한 명 처리해주면 좋겠대. 문제는 그놈이 평범한 놈이 아니라는 거야.”
“누군데?”
“이문후라고 조금 유명한 놈이야.”
“이문후?”
왕룽은 처음 듣는 이름을 되뇌었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없는 그인지라 이름 자체가 생소했다.
“그게 누군데?”
“상당한 실력을 가진 각성자야. 한국에서 지금 명성을 떨치고 있는 놈이야.”
“그런 놈을 죽여달라고 청부를 한 거라고?”
“금액이… 만만치 않아.”
“네가 솔깃할 정도라면 최소 10장은 넘는다는 건데.”
“50억.”
“뭐? 50억?”
왕룽은 들고 있던 음식을 내려놨다.
작지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대신 선수금은 없어. 놈을 죽이는데 성공하면 곧바로 50억을 더 주겠대.”
“선수금이 없다고?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믿을 수 있어? 그놈이 누군데 그런 거금을 쓰는 거야?”
“그놈이 한국 조직 보스의 아들을 죽였다고 해. 그리고 일본에서도 중요한 놈이 죽은 것 같아. 그것 때문에 꼭지가 돈 거겠지.”
“한국 보스? 그 건설회사?”
“맞아. 그 정도 돈은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곳이야.”
이미 그들과 조직이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선 건설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크큭. 우리한테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그건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이 정도 금액을 제시한 걸보면 그만큼 위험하다는 거니까.”
“우리가 언제 그런 것 따졌어? 바로 시작하자!”
왕룽은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각성을 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그놈 역시 사람이었다. 몸이 강철이 아닌 이상, 칼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아직 위에서 명확한 지시가 안 내려왔어.”
“그 노친네들이 무슨 상관이야? 직접 움직일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바로 애들 모아. 지금 던전으로 들어간 놈들이 몇 명이지?”
“대략 오백 정도?”
“절반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오라고 해. 모두 한국으로 갈 테니까.”
“모두 데리고 가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텐데.”
한꺼번에 200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정상적인 방법을 이용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밀항하면 충분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다시 돌아오는 건…”
“무슨 상관이야. 대부분은 거기에서 죽을 텐데.”
돈 몇 푼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한 놈들이 수두룩했다.
아무리 각성을 했다고 하더라도 특출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상, 다른 조직원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각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죽은 각성자는 새로운 각성자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방패 삼아서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머릿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왕룽은 다시 마라룽샤에 집중했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그의 모습에 원차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한 왕룽이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 없는 것, 왕룽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차오는 왕룽을 뒤로하고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우선 던전으로 들어간 자들에게 연락을 취해야만 했다.
던전으로 들어간 사람들과 연락 자체가 쉽지 않았다.
워낙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사람을 보내야 왕룽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지금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냐?]
정민석은 흥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많이 섭섭해하는 말투였다.
“내가 뭘?”
[내가 뭘? 너 결혼한다며?]
“무슨 개소리야?”
[재벌이랑 결혼한다고 난리가 났던데? 내가 그걸 다른 사람한테 들어야겠냐?]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아니지?]
“아니라고!”
아무래도 나명진과의 일로 소문이 난 것 같았다.
김연희의 발언이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지만, 곧바로 결혼을 한다고 소문이 와전될 줄은 몰랐다.
[하긴, 재벌이 뭐가 아쉬워서 너를…]
“지랄. 그거 물어 볼려고 연락한 거야?”
[그것도 있고. 근데, 정말 아니야? 그 DS그룹 손녀가 직접 말했다고 하던데? 결혼할 사이라고?]
“좀 복잡해.”
[미친!]
김정우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부정을 할 수도 없었다. 당분간은 DS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뭔가가 있는 듯한 이문후의 태도에 정민석은 깜짝 놀랐다.
그냥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문후가 진즉에 그 사실을 알렸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문후의 반응을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결혼할 사이야?]
“그게 복잡하다니까. 그냥 형식적으로는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형식적? 그게 무슨 뜻이야?]
“아무튼.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말고.”
[내가 바보냐! 이런 걸 떠벌리고 다니게?]
그래도 입이 무거운 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걸 밝히고 싶었지만, 이런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근데, 너 어디야? 왜 집에 없어?]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가.”
[왜?]
“일이 좀 있거든.”
[일? 무슨 일?]
“당분간 던전에 들어갈 거야.”
[던전? 허가가 쉽지는 않을 것 같던데? 그 조규종이라는 놈이 또 뒤에서 손을…]
“몰래 들어갈 거야. 다른 게이트로.”
권형태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정부 쪽 사람들 중에서는 권형태가 제일 믿을만했다. 정민석도 그의 팀에 속한 만큼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걱정이었다. 방금 정민석이 밝힌 것처럼 조규종이 손을 쓰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렇다고 DS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너무 과한 호의를 보이고 있었지만, 결국 이런 호의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혼자서 해결하는 게 나았다.
[지금 바로 움직이는 거야?]
“거의 다 왔어. 이 통화 끝나면 당분간 연락 안 될 거야.”
[뭐가 그렇게 급해?]
큰일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던전으로 들어간다는 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문후에게는 이런 시간도 아까웠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해져야 안전할 것 같으니까.”
[내가 도울 일은?]
“몸이나 조심해. 어쩌면 나 때문에 너한테 불똥이 튈지도 모르니까.”
[네 걱정이나 해.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그만 끊어. 나도 준비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알았어. 조심해라!]
정민석의 걱정을 뒤로한 그는 가지고 온 장비를 확인했다.
김정우에게 받은 새로운 방어구. 그리고 활력단을 비롯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겼다.
‘한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며칠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여차하면 고블린으로 변해서 자급자족을 할 생각까지 한 그는 멀리 보이는 게이트로 향했다.
지방의 작은 산에 자리잡은 정규 던전.
군인들이 그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 던전이 도시에 있는 던전보다 진입하기는 더 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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