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화
새로운 구도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그냥 도우려고 한 것뿐이에요.”
“그런다고 결혼을 한다고 말하면 어떡해요?”
“깔끔하잖아요. 그 사람들도 아무말도 못하고.”
“하…”
김연희도 보통이 아니었다. 대뜸 일을 벌이는 것은 부친을 닮은 것 같았다.
뒤늦게 그녀가 김정우의 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이문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김연희의 말처럼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조규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변한 그 얼굴은 마음에 들었지만, DS와 의도치 않게 엮인 이 상황도 문제였다.
“근데, 나명진은 어떻게 된 거죠?”
“거기 찍힌 그대로예요.”
“정말로 고블린이 죽였다는 거예요? 갑자기 고블린이 왜 나오는 건데요?”
“그건 저도 모르죠.”
“…….”
김연희가 도와준 것은 고마웠지만, 저주받은 피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이문후의 태도에 김연희는 입술을 삐쭉였다. 나름 큰 마음을 먹고 도와줬지만, 이문후는 너무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 거예요?”
“뭘요?”
“나선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문후 씨가 나명진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움직여주면 더 좋죠. 명분은 저한테 있을 테니까요.”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나창준 회장은 나명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입지적인 인물이에요. 나선 건설의 모든 힘을 움직일 수 있어요. 그가 모든 힘을 동원한다면 아무리 이문후 씨라도…”
“명색이 DS그룹 사윈데. 나선 건설 따위를 무서워하면 안 되지 않나요?”
“그건…”
짓궂은 말에 김연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문후에게 그 말을 들은 김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농담이었어요. 걱정하지 마요.”
“…….”
***
“사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
“DS그룹 법무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조금 전에 했던 말도 다 녹취를 했다고 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저는 죽습니다!”
“…….”
“사장님을 믿고 특공대도 출동시키고, 군 병력까지 동원 했습니다. 월권으로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면…”
“아이 씨발!”
“…….”
“자리는 알아서 마련해 줄 테니까. 그만 징징거리라고!”
“죄, 죄송합니다.”
조규종은 앓는 소리를 하는 경찰 간부의 말을 일축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은 상황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흘러가지?’
엄청 유리한 상황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도 이문후가 죽일 놈이 되고 쫓기는 것이었지만, 그것보다 더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분명히 그 새끼가 죽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런 방법으로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
은밀하게 일을 진행 시킨 만큼 비밀이 새어나갈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뭔가를 눈치채고 준비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예. 분명히 이문후가 나명진을 뒤쫓아서 들어갔습니다. 놈이 나명진을 뒤따라가자마자 바로 연락을 드렸고요.”
“근데, 어떻게 된 거냐고? 왜 고블린이…”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일이 이렇게 꼬일 수는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웨이브에서 처치하지 못한 고블린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놈이 나명진을 죽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비록 나명진의 실력이 그에게는 못 미쳤지만, 나름 실력이 있는 놈이었다.
나명진은 나선 건설의 후계자였다.
나선의 역량을 집중시킨 놈이 고블린보다 약할 수는 없었다.
“하아.”
계획했던 것처럼 흘러가지 않은 상황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명진이 죽은 것은 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냥 친분도 없는 놈이었다. 언젠가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였지만, 이번에 드러난 둘의 관계가 걱정이었다.
“문제는 그 새끼 뒤에 있는 DS인데.”
이문후와의 관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정이 나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깔끔하게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놈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김연희 그 여자와 결혼할 사이라니.”
“…….”
“그냥 허튼소리였겠지?”
“결혼 말입니까?”
“그래. 그년이 뭐가 아쉬워서…”
“김정우 사장이 그 일을 추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정우. 그 아저씨라면…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도 않네.”
조규종은 옆에 있던 오 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고 있는 김정우라면 오히려 둘의 교제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을 것 같았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란 말이지.’
그가 알고 있는 김정우의 수완은 대단했다.
이미 사업 쪽으로는 신전이 DS에 조금 밀리고 있었다. 그나마 각성자의 질이나 수로 그들을 견제하고 있었지만, 이문후가 그쪽 사람이 되는 거라면 상황이 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까다로운 놈이었는데, DS를 등에 업으면…”
조규종은 씁쓸해하며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슬아슬하게 피했던 이문후의 공격은 너무 매서웠다. 아무리 기습이라고 하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낭패를 봤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지금 싸워도 이긴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진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바로 이문후였다.
“어쩔 수 없네. 나선을 끌어들여야겠어.”
“나선 건설 말입니까?”
“그래. 아들놈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이렇게 된 거 나선을 움직이는 게 좋겠어.”
“하지만 그들이 쉽게 움직일까요?”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은 정보만 제공해 줄 테니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야쿠자들와 교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삼합회의 움직임도 이상한 걸 보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선 이 사실을 알려. 은밀하게.”
“알겠습니다.”
나명진의 죽음에는 뒤에는 이문후가 있었다.
비록, 고블린이라는 말도 안 되는 놈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있었지만, 조규종은 그것도 이문후의 짓일 거라고 생각했다.
***
집으로 돌아온 이문후는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손으로 나명진을 처리했지만,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고작 그런 새끼 때문에… 후우.’
답답한 마음에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나명진의 배경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성인이 아니었다. 혼자서 그런 사건을 벌일 수는 없었다.
“남은 건 나선 건설인가.”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김연희는 나선의 힘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문후는 오히려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제 대놓고 달려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그의 뒤에 DS라는 거대한 기업이 있었다. 김연희의 기지로 DS의 사위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굳이 바로 잡을 필요는 없었다.
“DS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사회적으로는 그들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김연희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이문후가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문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규종. 그놈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고.”
이미 일을 꾸미면서 그를 처리하려고 했던 놈이었다.
조규종과 신전 그룹은 확실한 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앞으로 그 두 그룹을 상대해야만 했다.
당연히 그에 걸맞은 힘이 필요했다.
“다시 던전을 들어가야겠지?”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던전뿐이었다.
손에 들어온 경험치 구슬을 조금만 더 모으면 5레벨까지 올릴 수 있었다.
‘5레벨이 되면 장착할 수 있는 스킬이 더 늘어나려나?’
게임을 생각하면 새로운 스킬을 장착할 수 있었다.
시스템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레벨을 올리고, 장착할 수 있는 스킬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거기에 건곤대나이의 성취까지 올리면 앞으로의 싸움을 더 유리하게 이끌고 갈 수 있었다.
‘남은 스킬은 저주받은 피가 좋겠지?’
이 스킬이 없었다면 조규종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블린으로 변하면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던전에서의 활동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스킬이었다.
레벨이 올라가면 어떤 효과가 더해질지는 몰랐지만, 투자할 가치는 충분했다.
이문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면서 천천히 단전에 있는 기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명진과의 싸움으로 소진한 내공을 회복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집중을 통해서 머리도 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운공을 하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이 아저씨는 왜 또…”
김정우가 연락을 해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DS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여보세요?”
[아, 사위?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일부러 피하는 줄 알았네.]
“뭐, 뭐요?”
[들었어. 우리 연희와 결혼할 사이라며?]
“…….”
황당한 말에 말문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김정우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밝았다. 유쾌한 김정우의 목소리에 이문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은? 장인이 연락도 못…]
“끊습니다.”
[얼굴 좀 보자고. 할 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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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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