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화
악연의 끝
“크으윽. 뭐해? 빨리 차 빼!”
“…….”
나명진은 운전사를 다그쳤다. 하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씨발!”
욕설을 내뱉은 그는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조금씩 기운을 모으면서 기회를 노렸다.
지금은 천천히 다가오는 이문후를 떨쳐내는 게 먼저였다.
아무리 기습을 하더라도 그를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제는 도망을 먼저 생각해야만 했다.
‘시내로 나가야 돼!’
그나마 사람이 많은 곳으로 움직여야만 이문후를 피할 수 있었다.
결정을 내린 그는 더 많은 힘을 끌어모았다.
기습적인 한 방을 쏟아내고, 차를 돌리고 있는 일본인들을 끌어들여야만 살 수 있었다.
덜컹!
문을 열자, 곧바로 은빛 섬광이 날아왔다.
콰직!
길게 늘어난 봉이 순식간에 차문을 꿰뚫었다.
하지만 나명진은 곧바로 부서진 창문으로 몸을 날리면서 한데 끌어올린 기운을 뿌렸다.
쐐에엑!
단검에서부터 날아오는 예리한 기운.
검기였다. 작정을 하고 뿌린 만큼 그 위력이 낮지 않았지만, 이문후는 어렵지 않게 그의 공격을 받아냈다.
투웅!
다시 줄어든 봉을 휘두르자, 그를 향해 날아오던 검기가 밀려났다.
교묘하게 방향을 바꾸자, 그대로 날아간 검기는 옆에 있는 건물을 때렸다.
콰과광!
단단한 벽에 기다란 상흔이 생겨났다.
나명진 역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건곤대나이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괴물 같은 새끼!’
이문후는 작정하고 날린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흘렸다.
비슷한 힘으로 공격을 받아냈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방향만 바꿨다는 것에서부터 격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고집을 부려봤자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도망가는데 최선을 다했다.
“흐으읍!”
다시 한번 힘을 집중한 그는 제운종을 펼치며 바닥을 박찼다. 크게 뛰어오른 그는 도로를 벗어나는 또 다른 차에 타올랐다.
쿠웅!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일본인들은 당황하며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나명진은 그들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내로 달려! 시내로!”
“뭐, 뭐야?”
“한국 오야붕입니다! 차에 올라탔습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시내로 나가랍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라는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달라붙은 나명진을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사람이 많은 곳으로 찾아가는 말은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도를 높였다.
부아아앙!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모습에 이문후도 반응을 보였다.
곧바로 봉의 길이를 늘리며 차를 노렸지만, 안에 타고 있던 일본인은 나명진을 대신해서 그의 공격을 받아냈다.
터엉!
그들 역시 도망가기 위해서는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문후는 밀려나는 봉을 회수하며 곧바로 주먹을 뻗었다.
쐐에엑! 콰앙!
날아간 권기는 그대로 타이어를 터뜨렸고, 다시 한번 나명진이 올라탄 차가 뒤집혔다.
“크윽.”
굴러떨어진 나명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처박히면서 다리를 다친 것 같았지만, 지금은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가까이에 있는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이문후는 나명진을 뒤쫓았다. 하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시선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지? 함정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놈이었다.
여기에서 함정을 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미끼를 자처할 놈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감들.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피자 익숙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그때 봤던 사람인데?’
오크 대전사와 싸웠을 때, 조규종의 뒤에 있던 각성자였다. 은밀한 곳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문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신전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건가?’
조규종과의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선과의 일에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그 새끼 성격이 지랄 맞았던 걸 생각하면…’
조규종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나명진을 그냥 둘 생각은 없었다.
‘흐음.’
상념을 떨쳐낸 그는 나명진을 쫓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지만, 숨어 있는 사람들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
“개자식 왜 이렇게 쫓아오는 거야!”
안으로 들어온 그는 핸드폰을 꺼내며 주변을 살폈다.
우선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아무리 이문후가 막나온다고 하더라도 일반인이 있는 곳에서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씨발! 여기에는 왜 아무도 없는 거야!”
DS에서 관리하는 일회성 던전이 있는 곳이었다.
주변의 건물에 일반인들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나명진은 불만을 쏟아냈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거기 112죠! 지금 어떤 미친놈이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
터엉!
멀리서 날아온 봉이 그의 핸드폰을 부쉈다.
신고를 하던 나명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문후가 멀쩡한 모습으로 그를 쫓아왔기 때문이다.
“그때랑 똑같네? 그때도 혼자 도망가더니.”
“씨발! 지긋지긋한 새끼!”
“그건 내가 할 말이고.”
“나한테 왜 이래!”
“나 죽이자고 쫓아온 놈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무, 무슨 개소리야? 내가 왜 널 죽이려고 쫓아와!”
굳이 말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앞에 있는 놈하고의 악연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계속 지껄여 봐. 그게 유언이 될 테니까.”
“…….”
싸늘한 말에 나명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이문후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문후를 너무 얕잡아본 것 같았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죽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유언이라니? 무슨 개소리야?”
“시간이라도 끌어보게? 누구 도와줄 사람이라도 있다는 거냐?”
“…….”
혹시나 하고 떠봤다. 신전 쪽에 있는 사람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관련이 돼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명진도 모르는 눈치였다.
나명진은 뒷걸음질을 치며 그와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힘을 쥐어 짜내면 한 방은 먹일 수 있겠지만,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여기에서 공격을 했다가는 무조건 죽었다고 봐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저놈을…’
살아날 방법을 찾던 그는 뒤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몸을 던지며 이문후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죽으면 너라고 무사할 것 같아?”
“그딴 협박이 통할 것 같냐?”
“그래! 같이 죽자. 이 새끼야! 여기 지금 다 녹화되고 있거든!”
나명진은 발악을 했다. 그리고 그 발악이 통했는지 감시 카메라를 발견한 이문후가 머뭇거렸다.
“그래. 너도 이제 돈 좀 만졌잖아? 그 돈도 다 못 쓰고 죽으면 억울하겠지. 안 그래?”
“…….”
“씨발, 아깝지? 힘도 얻었겠다. 돈도 얻었겠다. 근데, 여기에서 살인을 저지르면 너는 얄짤 없이…”
“좋은 지적이네. 너 때문에 그놈들이 왜 근처에 있는지 이해가 가네.”
“무, 무슨 개소리야?”
나명진은 뜬금없는 소리에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이문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눈을 감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나명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문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랐다.
제대로 된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일이 커진 만큼 무슨 조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있는 놈들이라면 신고를 했겠지?’
도망간 나선 소속의 각성자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최소한 이 상황이 부친의 귀에도 들어갔을 거라고 확신했다.
조금만 버티면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이문후도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기 무섭게 이문후가 눈을 떴다.
“너 같은 새끼가 또 있는 것 같네.”
“무슨 개소리…”
뜬금없는 소리가 황당했지만, 나명진은 이어지는 이문후의 행동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대뜸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포기하려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나명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문후를 바라봤다.
“무슨 꿍꿍이야?”
“…….”
이대로 물러날 놈이었다면 이렇게 쫓아오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문후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 씨발, 저 새끼도 아까웠던 거야!’
페라리를 몰고다닐 정도라면 많은 돈을 벌었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했던 말이 이문후를 설득시킨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런 굴욕을 겪은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다음에 다시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명진은 달라진 이문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씨, 씨발! 뭐, 뭐야?”
뒤로 물러난 이문후가 사라졌다.
대신, 그가 있던 자리에 고블린이 서 있었다.
단검을 손에 쥔 고블린은 갑자기 그를 향해 달려왔다.
미처 반응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고블린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지금 뛰어든 놈은 그가 반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푸욱!
가슴에서부터 전해지는 화끈한 고통이 나명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다시 비슷한 고통이 계속 이어졌다.
푸욱! 푸욱!
그의 가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고블린은 잔인하게 그를 난도질했다.
“끄으윽!”
나명진은 그런 고블린을 피해서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든 살겠다는 열망에 힘을 쥐어 짜냈지만,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몸으로는 멀리 갈 수가 없었다.
푸욱! 푸욱!
고블린은 물러나는 나명진을 쫓아갔다.
집요한 고블린의 행동에 나명진의 몸은 넝마가 됐고, 결국 차가운 바닥에 늘어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스킬, 제운종을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구슬 7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명진이 죽자,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손에 들어왔다.
고블린의 모습을 한 이문후는 한참을 서서 죽은 나명진의 모습을 지켜봤다.
막상 나명진과의 악연을 끝냈지만,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이놈 때문에 겪었던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그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개자식!’
죽은 나명진을 욕한 그는 놈의 품을 뒤졌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던 단검을 챙겼다.
‘후우. 이제 조규종. 그놈을 상대해야 하나?’
일부러 고블린으로 변한 것은 주변에 있는 신전의 각성자들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조규종 그놈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나명진을 살려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 알리바이를 만든 것이다.
상념을 떨쳐낸 그는 죽은 나명진을 옮겼다.
뒤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카메라가 없는 곳까지 그를 끌고 갔다. 그리고 순간이동을 사용하면서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가만히 뇌까리던 그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며 나명진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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