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상부상조
단전에 모인 힘들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호흡과 함께 퍼져나간 작은 힘들은 그의 의지에 따라 다시 단전으로 모여들었고, 쌓인 피로가 조금씩 풀려나갔다.
띠리리링.
희미하게 들리는 도어락 소리에 이문후는 기운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었다.
“후우우.”
깊게 호흡을 내뱉은 그는 달라진 스스로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탯은 줄었는데. 짧은 순간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다라.’
나한보 대신 나한기공을 장착하자 운기가 가능했다.
몸에 있는 내공을 움직이면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었지만, 성취가 높지 않았다.
1성의 나한기공이 주는 내공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내공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건곤대나이한테는 못 비비겠네.’
나한기공의 성취가 높아지면 괜찮은 힘을 낼 것 같았지만, 처음부터 손에 넣은 건곤대나이에 비교해서는 한참 모자랐다.
내공을 움직이면 스탯이 달라졌다.
집중을 하는 것에 따라서 부족한 근력이나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지만, 향상된 능력은 건곤대나이를 유지하고 있을 때보다 부족했다.
건곤대나이의 능력이 너무나 월등했다.
다른 스킬 슬롯을 개방하지 않는다면 굳이 다른 능력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레벨인데.’
슬롯을 개방하기 위해서라도 레벨을 하나 더 올려야만 했다.
게임대로 흘러가는 거라면 5레벨이 돼야 세 번째 슬롯을 열 수 있었지만, 3레벨까지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레벨도 중요했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역시 중요했다.
지금은 레벨보다 건곤대나이의 성취를 올리는 게 빠르게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건곤대나이를 착용한 상황에서 나한기공까지 착용하면…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우선은 경험치 구슬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정민석의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를 대했다.
“변비냐?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집은 갔다 온 거야?”
“그래. 반찬 좀 가지고 왔어.”
“그럴 필요 없다니까.”
“나 먹을 거야. 당분간 여기에서 지낸다고 했잖아.”
정민석은 이문후의 미안한 감정을 덜어주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검은 봉지를 건넸다.
“이거. 받아라. 민영이가 주라고 하더라.”
“이게 뭔데?”
“네가 만들어달라고 했던 거.”
“벌써 만들었다고?”
“엄마도 당분간은 일 안 나가신대. 급한 일 먼저 해결해야 한다면서 도와주셨다고 하더라고.”
“급한… 하아. 또 이상하게 말했겠네.”
“살다보면 지릴 수도 있지 뭐.”
“미친놈.”
일부러 놀리는 정민석의 말에 이문후는 말을 아꼈다.
대신, 건네받은 봉지를 확인하며 안에 있는 천을 꺼내 들었다.
조잡했던 천 조각이 짧은 반바지로 바뀌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상태에 이문후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단하시네.”
“우리 엄마 솜씨가 좋긴 하지.”
“잘 입겠다고 전해드려.”
“네가 연락 좀 드려. 평소에도 엄마가 섭섭해하시더라.”
“크흠. 나중에.”
“내가 부담 주지 말라고 했어. 이제 연락 드려도 너한테 고맙다는 말씀은 안 하실 거야.”
“알았어. 나중에 연락드린다니까. 그만 가자.”
이문후는 정민석의 말을 끊으며 그를 재촉했고, 뜬금없는 말에 정민석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긴 어딜 가? 편의점은 당분간 닫는다니까?”
“이걸 확인해 봐야지.”
“던전을 가자고?”
“그래. 이제부터 바빠질 거야. 편의점은 그냥… 버려라.”
“미친놈. 뭔 개소리야?”
편의점을 버리라는 말에 정민석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 편의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를 이문후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돈벌이가 생길 거라고.”
“쫌! 알아먹을 수 있게 말하라고.”
“던전에서 힘을 얻는다는 걸 우리만 알고 있을 것 같냐?”
“…….”
“어제 네가 좋다고 보상까지 넘긴 사람들이 경찰이었다면서?”
“그런데?”
“그 사람들도 힘을 얻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통제를 하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오고 있어! 던전으로 가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앞으로 당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이문후의 말에 정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을 얻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던전으로 몰릴 테고, 모두가 맨몸일 거 아니야?”
“그럼 그 속옷을 만든 이유가?”
“그래. 비싸게 팔 수 있을 거야.”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속옷을 만들기 위해서 정민영에게 부탁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머니까지 도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질은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연장이나 챙겨.”
“아악. 씨발, 내 눈! 미친놈아. 뭐하는 거야?”
정민석은 스스럼없이 속옷을 바꿔 입는 이문후의 행동에 질겁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상당히 괜찮은 착용감과 부드러운 천의 재질에 만족하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
두 사람은 일회성 던전으로 들어왔다.
이번이 두 번째인 정민석은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놀라며 뇌까렸다.
“여기 던전 맞아?”
“그럼 어디겠냐?”
“어제 간 곳이랑 차이가 있는데?”
“네가 간 곳이 규모가 더 컸던 거지. 그곳에서 나온 보상은 더 좋았을 테고.”
“…….”
보상이라는 말에 정민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철제 상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임성효의 알몸을 봤다고 마냥 좋아했던 스스로가 병신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흐음. 이런 문제가 있었네.”
“문제 무슨… 아악, 내 눈!”
실망이 가득한 이문후의 말에 그를 바라보던 정민석을 질겁하며 눈을 가렸다.
“지랄하지 마. 내 눈은 좋을 것 같냐?”
“…….”
그의 말에 자신 역시도 알몸이라는 사실에 정민석은 손을 내렸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속옷은?”
“실이 문제였어.”
“실?”
“여기에서 얻은 천에서 실을 뽑아내야 할 것 같은데? 밴드도 사라졌고.”
남은 건 바닥에 떨어진 제단 된 천뿐이었다.
새로운 사실을 확인한 그는 떨어진 천을 주워들며 주변을 둘러봤다.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지금까지 클리어했던 던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으로, 대충 구조를 살핀 이문후는 정민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는 나 혼자서 움직일 거야.”
“너 혼자? 나는?”
“우선 지켜봐. 너는 다음 던전부터 바빠질 테니까.”
“나도 고블린 몇 마리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그리고 굳이 이런 살벌한 칼 같은 것도 필요 없고.”
정민석은 손에 쥔 단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이문후는 그를 무시했다.
“고블린은 그렇다고 치고, 다른 놈들은 어떻게 상대할 건데?”
“그야…”
“어차피 여기에서 얻은 능력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야 하니까, 당분간은 잔말 말고 따르는 게 좋아.”
말을 마친 이문후는 앞장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추며 신중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정민석도 천천히 뒤를 따랐다.
투욱.
돌덩이를 던지면서 고블린을 유인하는 이문후의 모습에 정민석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놈들을 유인하는 건가? 잔머리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자연스럽게 편한 방법을 찾아내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민석은 이어지는 이문후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며 눈을 비볐다.
푸욱.
다가온 고블린의 뒤를 잡은 이문후는 그대로 놈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한 놈이 쓰러지자, 침입자를 보고 놀란 다른 고블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끼이… 끄흡!”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대로 목이 꿰뚫리며 쓰러졌다.
“뭐, 뭐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민석은 경악했다.
이제 각성을 한 만큼 이문후와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너 뭐야?”
어제 같이 움직였던 경찰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날랜 모습을 보인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가 베테랑이라던 임성효의 말을 떠올린 그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뭐해? 가자.”
“바로 간다고?”
“기다려서 뭐해. 어차피 저놈들도 눈치챘을 텐데.”
“괜찮겠어?”
“이제 한 여덟 마리 남았겠네.”
담담한 말투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역시 고블린들을 상대해봤다. 일대일로 붙으면 어렵지 않은 놈들이었지만, 그 수가 모이면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침입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놈이 안전할 리 없었다.
‘칼을 써서 그런가? 너무 쉽게 해결하네.’
정민석은 손에 쥔 단검을 바라봤다.
제법 날이 선 놈이라 잘만 사용하면 어렵지 않게 고블린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날붙이가 아니더라도 이문후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조폭들을 상대했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 빠르고 과감한 모습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때 조폭들을 봐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뭐해?”
“같이 가.”
그는 어느새 멀어진 이문후를 뒤따랐다.
하지만 이문후는 통로로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뒤로 물러나. 곧 놈들이 올 거니까.”
좁은 통로에서 고블린들을 상대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의 의도를 이해한 정민석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내가 안 도와줘도 되는 거냐?”
“다음 던전부터 도와. 그때는 이렇게 못 움직일 테니까.”
“…뭐라는 거야?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면 안 되냐?”
“어차피 그때 되면 이해할 거야.”
“…….”
“온다. 물러나!”
여덟 마리의 고블린이 몰려오고 있었다.
흉흉한 놈들의 기세에 걱정이 됐지만, 정민석은 이문후를 믿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문후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쉬이익.
달려드는 고블린들의 공격은 그에게 닿지 못 했다.
이문후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아슬아슬하게 놈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리고 그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고블린은 쓰러져 나갔다.
푸욱. 푸욱.
“완전… 영화를 찍네! 영화를 찍어!”
마치 합이 잘 짜여진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멀리서도 죽일 듯이 달려드는 고블린의 흉흉한 기세가 느껴졌지만, 이문후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있었다.
비교할 수 없는 스피드와 정교한 일격에 고블린들이 쓰러져 나갔다.
천 조각을 남기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놈들의 모습에 정민석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몽둥이를 든 놈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저놈은 또 뭐야?”
“고블린 전사.”
“키아아아!”
놈은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제대로 맞으면 머리가 깨져 나갈 것 같은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문후는 그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부우웅. 부우웅!
고블린 전사는 그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상처가 늘어만 갔다.
푸욱!
놈의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기 무섭게 이문후가 품을 파고들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놈이 쓰러졌고, 곧 흩어지며 모습을 감췄다.
“후우.”
가볍게 호흡을 고른 이문후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민석을 일깨웠다.
“뭐해?”
“뭐? 뭐라고?”
“상자나 열어.”
“내가?”
“우선 뭐라도 얻어야 비비기라도 하지.”
정민석은 그제야 이문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버스를 태워준다더니. 이런 거였나?’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말이었지만, 지금 본 이문후의 모습만 봐서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저놈들은 네가 다 잡았잖아? 내가 열어도 괜찮아?”
“그 여자한테는 막 퍼준 놈이 이제 와서 왜 이래?”
“그거야… 그때는 뭘 몰랐으니까!”
정곡을 찌른 이문후의 지적에 그는 나무 상자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에 들어온 낯선 힘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문후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얻은 걸 빈 슬롯에 넣으면 된다고?”
“그래. 뭐가 나왔는데?”
“철비공(鐵譬功)이라는 무공이야.”
“철비공?”
“극성으로 익히면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신체를 얻을 수 있는 무공이래.”
정민석의 설명에 이문후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무식해 보여도 너한테는 딱이네.”
“무식하기는! 소림 무공이라는데.”
“차라리 다행이다. 이제 네 걱정은 덜 수 있을 테니까.”
정민석이 얻은 능력이 나쁘지 않았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어울리는 무공이었지만, 그와 상성이 맞는 것 같았다.
‘대충 구색은 갖춘 건가?’
이제 다른 던전을 돌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 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정민석이라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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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