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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完) (62/62)

62.(完)

“오늘은 뭐 했어?”

“그냥……공방 가서 배냇저고리도 만들고. 답답해서 좀 걷기도 하고.”

저녁을 먹은 차현과 재희는 집 근처 산책길을 걷기로 했다.

소화도 시킬 겸, 밤공기도 쐴 겸.

차현이 재희의 손을 꽉 그러쥐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 괜찮아, 오빠.”

“거짓말. 너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정말 다 알아?”

“그럼.”

평소 재희는 표정 관리에 능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차현은 그녀의 작은 숨소리, 슬쩍 구겨진 미간. 하다못해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원래 성격이 세심하기도 하지만 재희와 오래 사귀며 사소한 습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는 안 괜찮다고 해도 돼.”

“뭐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잘못한 건데.”

재희가 쓰게 웃었다.

은태경이 구속되었다.

그는 절대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며 부정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고 말았다.

그 모든 기사를 다 보진 않더라도 재희도 알고 있을 테니 그녀의 기분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그래서 차현은 평소보다 퇴근을 일찍 서둘렀다.

혼자 두면 그녀가 더 우울해할 것 같아서.

“오빠.”

“응?”

“나……아주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만에 하나. 만분의 1의 확률이라도.

막상 말하려고 하자 차마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졌다.

그 말을 밖으로 뱉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으므로.

“그냥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재희가 애써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걱정하는 일의 90%는 사실 일어나지 않는대.”

“90%나?”

“응. 그저 걱정일 뿐이라는 거지.”

정상의 자리에 있어서일까.

재희는 일하는 내내 늘 불안해했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들. 게다가 능력 있는 후배를 고깝게 여기는 선배들까지.

그래서 재희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었다.

“그니까 나중에 생각해. 네가 지금 말하려고 했던 거. 그렇게 안 될 거니까.”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희가 희미하게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다.”

마치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 차현이 위로했다.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굴뚝같았다. 그런데 태경이 구속되자 실낱같던 희망마저 사라진 기분이다.

그래서 오늘 내내 기분이 울적했던 건데.

대수롭지 않은 듯, 위로해 주는 차현의 말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남편 잘 만났네.”

“그걸 이제 알았어?”

“으, 뻔뻔해.”

재희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린다. 장난스럽게 받아쳐 준 그 덕분에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이제 중기도 됐으니까 신혼여행 가자. 가고 싶은 곳 있어?”

“사실 유럽으로 가고 싶었는데 걷는 건 좀 무리인 것 같아서. 휴양지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입덧이 나아지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차현은 못 갔던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다.

벌써 20주가 가까워져 오고 있어서 지금쯤 다녀와야 할 듯했다. 더 늦으면 못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차현은 지난번 진료 때 주치의에게 허락까지 받았다.

“비행시간 길지 않은 곳으로 가자.”

“그럼 태국이나 베트남 쪽이겠네.”

“가서 먹고 자고 쉬고 수영하고. 그러면 될 것 같아. 근데 오빠는 휴가 낼 수 있는 거야?”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괜찮아.”

열흘 정도의 시간을 허락받았다.

그간 쉬지 않고 일했던 그였기에 형우는 흔쾌히 휴가를 허락했다.

“그럼 오빠 휴가 날짜 나오면 내가 알아볼게.”

“그래. 그러자.”

재희가 해사하게 웃으며 차현의 팔에 바짝 매달렸다.

시원한 밤공기가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 ▼ △

“내일 오후에 출발한다고?”

“네.”

출국하기 전, 재희와 차현은 본가에 들렀다.

밥 한 끼 먹고 가라는 은미의 말에 인사도 할 겸, 겸사겸사 들른 참이었다.

“몸은 괜찮은 게냐. 비행기를 타도 될지 모르겠구나.”

형우도 궁금했는지 넌지시 물었다.

“네. 주치의 선생님께 여쭤봤어요. 다 괜찮다고 합니다.”

혹시나 어디가 안 좋을까 싶어, 어제 병원도 들러서 한 번 더 확답을 들었다.

다만 의사는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래도 좀 걱정이 되긴 하네.”

“조심히 다녀올게요.”

은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가서 어디 아프기라도 할까 봐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다.

재희의 앞으로 갈비찜을 놓아주며 은미가 말을 이었다.

“혹시 어디가 안 좋거나 불편하면 병원 꼭 가야 해. 알았지.”

“네. 걱정 마세요.”

“현아, 재희 잘 챙기고. 응?”

“그럴게요.”

은미는 차현에게도 누차 당부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대화를 듣고 있던 형우가 입을 열었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혹시 원하면 주치의 한 명 붙여 주고.”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아요.”

재희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안정기라고 말했지만 형우와 은미는 그래도 몹시 걱정되는 모양이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형우가 입가를 정리하며 맞은편에 앉은 차현을 바라보았다.

“용돈 넉넉히 줄 테니 가서 아가 맛있는 거 많이 사 주고 와.”

“감사합니다.”

“엄마도 재희 챙겨 줘야겠다.”

은미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저녁 식사 자리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재희와 형우는 아직 조금 어색하긴 했으나 이전보다는 많이 편해진 듯했다.

“다 드신 거예요?”

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미가 물었다. 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어서들 더 먹어.”

“조금 후에 디저트 가져다드릴게요. 재희가 당신 좋아하는 당근 케이크 사 왔어요.”

“좋네. 잘 먹으마.”

형우의 인사에 재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형우가 주방을 빠져나가고 은미가 재희의 밥공기를 살폈다.

“재희 밥 더 먹을래?”

“제가 먹을 만큼 퍼올게요!”

“그래, 그럼. 현이는?”

“저는 충분해요.”

재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밥솥 앞으로 다가갔다. 직원이 대신 퍼 주겠다고 했지만, 재희가 사양하며 직접 먹을 만큼만 담았다.

다시 자리에 앉자, 그녀의 앞으로 반찬이 더 가까이 놓였다.

은미가 앞에 놓아준 탓이었다.

“어머님 댁 오면 과식하는 것 같아요. 너무 맛있어서.”

“다행이네. 음식 싸 주고 싶은데, 집을 오래 비워서. 다음에 다녀오면 내가 그때 만들어 줄게.”

“네.”

재희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보통 사양하는 편이었지만 은미의 솜씨가 너무 좋은 게 문제였다.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갈비찜은 여느 유명한 맛집보다 맛있을 정도였다.

“푹 쉬다가 와. 현이도 잘 못 쉬었잖아.”

“그때 3주 쉬었는데요.”

“너 고생한 거 생각하면 3주가 뭐야. 몇 달을 쉬어도 시원치 않아.”

은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자리를 비울 수 없기에 오래 쉴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고생만 하는 차현이 그저 안쓰럽다.

“다녀오면 저희 집에서 식사 대접할게요, 어머님.”

“식사 대접은 무슨. 됐어. 힘든데.”

“그래도 아기 낳기 전에 꼭 모시고 싶어요.”

혹여나 그녀가 힘들까 봐 일부러 거절하는 거라는 걸 재희는 안다.

벌써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은미는 확고했다.

“알았어. 조심히 잘 다녀오면 그때 고려해 볼게.”

재희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득 먹고 나서야 재희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은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진짜 설레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재희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현과는 예전에 사귈 때 이후, 같이 가는 첫 여행이었다.

어젯밤에는 너무 설레는 탓에 재희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뒤척여야 했다.

“잠도 못 잤잖아. 안 졸려?”

“기내에서 자면 되지.”

곧 공항에 도착한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재희가 선셰이드를 내리고는 선글라스를 꼈다.

스카프를 입까지 올리고 선글라스를 끼자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졌다.

“못 알아보겠지?”

“알아보면 어때.”

“그냥. 귀찮기도 하고……. 사실 화장도 안 했어.”

사람들의 수군거림, 시선이 귀찮아 일부러 재희는 못 알아보게 치장했다.

거리낄 것은 없었지만 조금은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안 해도 예뻐서 괜찮아.”

“그렇긴 하지.”

그의 칭찬에 재희가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은 비서를 물리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사실 내색은 안 했으나 그 역시 몹시 들뜬 상태였다.

“회장님께서 용돈을 어마어마하게 주셨어.”

“정말?”

“응. 원래 신혼여행 갈 땐 주는 거라고 하시더라고.”

“오오. 그럼 나 맛있는 거 사 주나?”

재희가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차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내가 사 줄 수도 있긴 한데. 뭐 먹고 싶은데?”

“나 태국 음식 너무 먹고 싶었거든. 기대된다.”

대화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게이트 앞에 잠시 정차하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짐을 챙겼다.

둘은 차에서 내렸다.

차현이 재희의 앞으로 손을 뻗자, 재희가 웃으며 그의 손의 덥석 잡았다.

“신혼여행 가자.”

차현의 한마디에 재희가 해사하게 미소를 그렸다.

게이트로 향하는 그들에게 붉은 노을이 쏟아져 내렸다.


 

깊숙이 탐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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