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 (60/62)

60.

-보고 받자마자 바로 지시하긴 했는데……. 이미 다 퍼진 모양이야.

차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전, 재희의 임신 관련 소식이 기사로 떴다. 나름 프라이빗하게 운영되는 산부인과로 진료를 보러 다녔는데, 그곳에 왔던 기자 한 명이 재희를 보고 기사를 쓴 모양이었다.

그 기사를 시작으로 수십 개의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조금 수척해진 재희의 사진과 함께.

“나 괜찮아, 오빠. 임신한 거 사실이고, 숨길 것도 아닌데 뭐.”

재희는 오히려 당황하는 그를 위로했다.

어차피 출산하면 어떻게서든 이야기가 새어 나갈 터였다.

그때 알려지나 지금 알려지나.

-그래도.

“조금 더 일찍 밝혀진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사실 아나운서를 하며 이런 사소한 것에도 숱하게 노출되었기에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일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좋은 생각만 하며 태교를 하기에도 바빴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인데.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일하세요. 나 이제 태교 수업하러 갈 거야.”

재희는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입덧이 조금 나아지고 14주 차에 들어섰다.

무기력하고 어지럽고 힘들었던 초기에 비해 컨디션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걸어서 한두 시간 쇼핑을 할 수도 있을 만큼.

그래서 태교도 하고 바람도 쐴 겸, 재희는 지난주부터 태교 수업을 들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조심히 다녀와. 도착해서 연락하고 집에 와서도 연락하고. 알았지?

“참나, 내가 애야?”

임신하고 더 심해진 과잉보호에 재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걱정되니까 연락해.

“알았어요. 나 이제 나가. 끊을게.”

재희가 통화를 마무리했다.

민낯으로 나가긴 조금 민망하니 대충이라도 화장을 하고 나가야 할 듯하다.

“설마 집 앞에도 기자들 있으려나.”

톡톡 파운데이션을 찍어 바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재희의 임신 소식에 집 앞으로 몰려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태경 때문에 뉴스에서 하차한 걸로 기사가 났었는데, 사실은 임신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올라와 있었다.

뭐 겸사겸사이긴 했지만, 굳이 정정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좀 지나면 금방 사그라지겠지.”

그냥 호기심, 가십 정도의 관심이라는 걸 재희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립스틱을 바른 그녀가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다 됐다.”

재희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 ▼ △

“은 아나운서님 진행 잘하시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손재주도 좋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재희가 만든 턱받이를 보며 강사가 칭찬했다.

으레 하는 칭찬이겠지만 그래도 잘했다는 이야기는 늘 듣기 좋다.

“다음 주에는 배냇저고리 만들어 볼게요.”

“다음 수업 때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재희가 강사를 향해 해사하게 웃으며 공방을 나섰다.

수강생이 많은 수업은 조금 부담스러워 1:1로 개인 수업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아기에게 필요한 배냇저고리, 턱받이, 겉싸개, 등을 바느질하는 수업인데, 만들 때면 잡생각도 사라지고 집중도 할 수 있어 태교에 딱인 듯했다.

“후. 목말라.”

차에 탄 재희는 루이보스티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렸다.

앉아서 내내 집중했더니 어깨도 뻐근한 기분이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그녀는 시동을 켜고 핸들을 잡았다.

그때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출발하려던 그녀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문자를 확인한 재희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재희가 무시하기 위해 내려놓으려는 찰나, 다시 문자 소리가 들려왔다.

“하.”

입술을 꾹 씹고 망설이던 그녀는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 ▼ △

“먹었으면 후딱후딱 가지 뭘 이렇게 진을 치고 있어.”

“한 잔만 더 먹고 갈 거야.”

“어딜 손을 대. 신고할 줄 알아.”

한숙이 질색하며 행주를 휘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술에 취한 남자는 여전히 한숙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재희는 문밖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퍼스트레이디가 될 수도 있었던 한숙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남루한 국밥집. 재희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굳이 오고 싶지도 않았지만 보면 마음이 더 약해질 것 같아 일부러 오지 않았었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줘.”

“네에.”

한숙은 대충 답을 한 후 냉장고에서 초록색 병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빌지에 체크를 하고 몸을 돌리던 한숙이 문밖에 서 있는 재희와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거기서 뭐 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미간을 구기며 서 있던 재희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뒤에서 한숙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먹고 가. 그러지 말고.”

“하아.”

재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곳에 왔을까.

뭐에 홀린 듯 왔지만, 곧장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손목이 붙들렸다.

하지만 재희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냥 갈 거야?”

“갑자기 왜 착한 척이에요.”

“애미가 돼서 착한 척 한번 해 보려고 그런다. 그러니 먹고 가.”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재희가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다.

가게 옆으로 난 길로 가자 작은 주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시끄러운 시장통 속에 있던 가게와는 사뭇 다른, 조용한 길이었다.

녹이 슨 초록색 철문을 열고 들어간 한숙은 재희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들어와.”

집안 꼴은 최악이었다.

거실 겸 주방,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방 하나.

집은 몹시 좁은 편이었다.

쭉 둘러보던 재희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한심하게도.

“임신했다며.”

낡은 싱크대 앞에서 무언가를 하던 한숙이 원형 형태의 상하나를 거실 한가운데에 펼쳤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밀폐 용기 하나를 꺼냈다.

“얼마나 된 건데.”

기사를 본 모양이다.

재희가 입술을 짓이기며 숨을 골랐다.

[밥 한 끼 먹고 가. 임신했다며.]

[기다릴 테니까 꼭 와. 돈 얘기 안 할 거니 걱정하지 말고.]

한숙이 보낸 문자를 보며 재희는 한참을 고민했다. 엄마에게 숱하게 당하고 돈을 뜯겼지만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문자였다.

이상하게도.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마음이 내내 불편해서일까.

결국 재희는 한숙이 하는 가게로 오고 말았다.

“그래도 오늘 올 줄은 몰랐네. 오전에 재어 놔서 맛이 어떨진 모르겠다.”

“…….”

“임신했는데 그래도 한우는 먹어야지. 이거 비싼 거야.”

프라이팬에 잘 재어 둔 불고기를 올리며 한숙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냄비에서 미역국을 퍼 상에 내려놓았다.

잘 지은 하얀 쌀밥 한 그릇도 함께.

“누가 이런 거 해 달래요?”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필요 없다잖아.”

원망 가득한 목소리에 한숙이 한숨을 내쉬었다.

낡은 앞치마, 하얗게 센 머리카락. 얼굴 곳곳에 팬 주름.

저 사람을 누가 은태경의 전 와이프라고 생각할지.

보면 볼수록 사람 억장 무너지게 하는 데 뭐 있는 사람이었다.

“딸한테 몹쓸 짓인 줄 알면서도, 삶이 팍팍해서 그랬어.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박복해도 이렇게 박복할까.

한숙은 이혼 후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죄다 실패하고 말았다. 위해 주고 사랑받고 사는 게 뭐 이리 힘든 건지.

결국 마지막 남자한테도 사기를 당하고 또 딸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한숙은 제 모습을 곱씹으며 한참을 후회했었다.

“어서 방으로 올라와.”

“갈게요.”

“재희야.”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밥상이라니.

어릴 때도 기억나지 않고, 그 이후로도 받아본 적 없는 엄마의 밥상을 보자 목이 메고 말았다.

“네가 좋아하는 걸 전혀 몰라서. 그냥 좋다는 고기 산 거야. 한 끼만 먹고 가.”

혹시나 그녀가 갈세라, 한숙은 양말만 신은 채로 뛰어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재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섰다.

낡은 상 앞에 앉자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몇 가지 밑반찬과 미역국, 비싸다는 한우 불고기.

눈물을 닦자 한숙이 그녀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뇌물 뭐 그런 거 아냐. 오해하지 마.”

“뭐라고요?”

“돈 달라고 차려 주는 밥 아니라는 소리야. 그냥……임신하면 엄마 밥 먹고 싶을 테니.”

한숙의 말끝이 잔뜩 떨린다.

혹시나 돈을 달라고 오해할까 봐 그랬는지 한숙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시선을 들자 한숙의 눈가도 빨갛게 젖어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숙은 물 한 컵을 그 옆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먹고 있어. 나 잠깐 가게 다녀올 테니까.”

그 한마디만 남긴 채, 한숙은 부리나케 집을 빠져나갔다.

“흐흡.”

재희는 상 앞에 앉아 먹지 못한 채 한참이나 눈물을 쏟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