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59/62)

59.

“어서 와라.”

제법 다정한 목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재희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형우의 앞에 디저트를 내려놓았다.

그가 앉으라는 듯 맞은 편으로 눈짓하자, 재희는 쟁반을 앞으로 안고 그의 앞에 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의 빤한 시선에 재희가 침을 꼴깍 삼키며 쟁반을 꼭 그러쥐었다.

“몸은 좀 어떠니. 입덧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많이 나아졌습니다.”

“다행이구나.”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다.

형우와 이렇게 단둘이 마주한 건 두 번째였다. 게다가 지난번에도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기에 더 민망한 기분이었다.

“아가.”

“……네.”

형우가 가만히 바라보다 나직이 불렀다.

“혹시 너도 나 원망하냐.”

“무슨…….”

“지난번에 네게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 녀석은 원망한다던데. 네 마음이 어떤지 궁금했다.”

차현에게도 했던 질문이었다.

‘원망, 스럽습니다.’

원망한다는 차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둘이 틀어지고 잠시 떨어져 있었다고 들었기에 형우는 재희의 속내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아뇨.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의외의 답이었다.

서운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런 종류의 감정일 거라 생각했는데, 재희는 제법 단호했다.

“차현 씨가 어떻게 살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말씀 안 해 주셨으면 계속 모른 채 살았을 거예요.”

그저 짐작만 했었다. 그런데 직접 듣자,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더 미안하고, 애틋하고.

흔들리지 않고 다시 제 옆으로 와 준 그에게 참 고맙다.

“그랬으면 됐다.”

그제야 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태경 의원님 일은 참 유감이다.”

“…….”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건 참 안쓰러운 일이었다.

의도와 다르게 뉴스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고, 재희도 한동안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속상하긴 한데…… 자업자득이라 생각해서요. 괜찮습니다.”

재희가 쓴 미소를 지었다. 참 속상하긴 했다.

왜 그렇게 살아서 이제껏 이룬 걸 한순간에 무너트리는 건지.

아니, 애초에 모래성 위에 집을 지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급하게 쌓아 올린 건 언젠간 무너질 테니까.

“마음 잘 추스르거라.”

“네.”

“나가 봐도 좋아.”

그제야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리자 등에 그의 목소리가 닿았다.

“아가.”

형우의 부름에 재희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네.”

“네 시어머니 너 입덧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어.”

입덧이 심할 때도 은미는 가끔 음식을 만들어 주곤 했었다. 사실 맛도 무척 좋아 은미의 음식은 입덧 기간에도 잘 먹을 수 있는 편이었다.

“말씀드릴게요.”

“그래.”

재희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서재를 빠져나왔다.

△ ▼ △

“잘 잤어?”

“너무 많이 잤어요. 죄송해요.”

재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은미와 함께 테라스에서 호두 파이와 차를 먹고 나자 잠이 쏟아지는 게 문제였다.

눈 좀 붙이라고 게스트 룸으로 등을 떠미는 은미 덕분에 잠시만 자야지 했는데.

눈을 뜬 재희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맛 좀 봐. 지금 막 해서 아마 맛있을 거야.”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너 시킬 생각 눈곱만큼도 없었어. 원래 임신하면 시도 때도 없이 졸려. 잘 잤으면 됐지.”

은미도 안다는 듯 괜찮다고 답해 주었다.

은미가 방금 만든 잡채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아주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알록달록 고명을 보자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그렇다고 덥석 먹기도 조금은 민망해 망설이자 은미가 재희의 팔을 잡아당겨 의자에 앉히고는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친정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좀 지내.”

그녀에겐 친정조차 무척 불편했다.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어 일찍 독립했기에 친정의 편안함이라는 건 느껴 볼 기회가 없었다.

재희의 집안 사정이 그렇다는 건 은미도 알고 있는 듯했다.

은미가 애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 봐. 응?”

“어머님.”

“응?”

“정말, 감사해요.”

“고작 잡채 하나로 그렇게 감동 받은 표정 할 거 없어.”

재희가 머쓱하지 않게 은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해 주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앞에 놓인 잡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희는 한 젓가락 떠서 크게 한 입 먹었다.

탱글탱글한 당면의 식감이 무척이나 좋다.

간도 잘 맞고.

재희가 엄지를 추켜들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믓있어요!”

그런 재희를 바라보는 은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네. 다른 것도 했으니 많이 먹고. 다 싸 줄 테니까 가져가서 더 먹어.”

“네에.”

재희는 다시 잡채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 ▼ △

“불편하진 않았어?”

“전혀. 매번 느끼지만, 너무 좋으신 것 같아.”

회사에서 퇴근한 차현은 곧장 형우의 집으로 향했다.

온종일 본가에 있었다는 얘기에 놀라고, 형우와 둘이 대화를 했다는 얘기에 또 놀랐다.

“낮잠도 잤다며.”

“정말 잠깐 눈 붙였거든? 근데 시간이 순식간에 마디 점프한 거 있지.”

다시 생각해도 너무 민망한 일이었다.

한 시간이면 조금 덜 민망했을 텐데.

그래도 편히 생각하라는 은미의 말에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반찬 엄청 많이 주셨어. 언제 다 먹지.”

“같이 열심히 먹어야겠네.”

은미는 손이 큰 편이었기에 한번 음식을 만들 때마다 잔치를 하는 것처럼 대량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종류도 최소 다섯 가지 이상.

트렁크에 가득 실어 주고는 흐뭇해하던 은미의 얼굴이 선연하다.

“회장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형우와 대화를 했다는 이야기에 궁금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잠시 정차를 한 사이에 차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별 얘기 안 했는데.”

“말해 줘. 듣고 싶어서 그래.”

“그때 불러서 오빠 얘기해 주신 거. 원망하냐고 물으시더라고.”

아…….

차현의 입술 새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제게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답했어?”

“원망 안 한다고.”

“난 원망스럽다고 했는데.”

“왜?”

“굳이 네가 알 필요 없는 부분이니까.”

그간 그가 고생한 건, 재희가 몰랐으면 했다.

굳이 알아 달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다시 차가 출발하고 차현이 핸들을 그러쥐었다.

“나도 알아야지. 그래서 더 우리 사이가 단단해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안 그랬으면……아마 오빠 옆에 있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것 같거든.”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불안하고 초조했던 부분이 모조리 사라지자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재희가 그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빠.”

“응?”

“나 왜 좋아?”

“음…….”

왜 좋냐는 물음은 처음인 듯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차현은 왜 그렇게 고생하면서까지 은재희여야만 했는지.

“이유가 있나.”

“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뭐 예뻐서라든지?”

“그건 맞는 말이네.”

차현이 우습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가 손을 뻗어 재희의 손을 잡았다.

재희가 잡은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임신 중엔 살도 엄청 찌고 낳고도 잘 안 빠진대. 그럼 안 좋아지는 거 아냐?”

“내 사랑이 그렇게 얄팍하지 않아.”

그의 답이 제법 흡족하다. 재희가 픽 웃음을 흘리며 쫑알쫑알 말을 이었다.

“뭐, 살은 나중에 빼면 되지.”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나랑 운동도 하고 그러면 될 거야.”

“그래서, 좋은 이유는 그게 다야?”

다시 답을 재촉하자 차현이 옅게 미소를 그렸다.

“그냥 너라서.”

“응?”

“은재희니까. 정말 다른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아.”

가만히 생각하던 재희는 그 말이 납득이 되었다.

저 역시 그가 이차현이라서 좋은 거니까.

만족스러운 답변에 재희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입술을 씰룩였다.

“내가 매력이 좀 많긴 해. 매력 부자라고.”

“정답이네.”

“오늘따라 답이 매우 후한 편이네?”

“그래 보여?”

“응. 다 내 편 들어 주고 기분도 좋게 해 주고. 오빠 혹시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비딱해진 질문에 차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도 그랬듯 한결같은 모습이 참 귀엽기만 하다.

“없어. 잘못은 무슨.”

“근데 오빠 나 지금 키위가 먹고 싶어.”

“키위?”

“응. 집에 없었던 것 같은데.”

집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변덕스러운 식욕이 참 문제였다.

재희가 난감한 듯 말꼬리를 늘이자 차현은 망설임 없이 핸들을 꺾었다.

“뭐 어려운 거라고. 장 보고 들어가자. 또 먹고 싶은 건?”

“음……군고구마.”

“알았어.”

다정한 그가 참 좋다.

재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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