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58/62)

58.

“좀 아쉽다.”

“대신 일찍 퇴근할게. 약속해.”

“2주를 쉬었는데, 퍽이나. 무리하지 않아도 돼. 난 반짝이랑 놀고 있을게.”

재희가 타이를 묶으며 중얼거렸다.

차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2주간의 휴가가 끝났다. 결혼하고도 쉬지 못했던 그였기에 형우는 차현에게 3주의 휴가를 주었다.

하지만 계속 자리를 비워 둘 수도 없기에 그는 예정보다 복귀를 일주일 당기기로 했다.

“여행이라도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진 않아?”

“난 오빠랑 집에서 뒹구는 것도 좋고, 같이 낮잠 자는 것도 좋아. 여행보다 더 좋았어.”

그녀 역시 몇 년을 못 쉬고 일만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랜만의 휴식이 무척 달콤하고 즐거웠다. 게다가 곁에는 차현이, 배 속에는 그와 자신을 닮은 아기가 있었으니까.

“초기 지나면 비행기 타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니까. 그때 못 간 신혼여행 가자.”

끄덕끄덕.

재희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재킷까지 입혀 준 재희가 차현의 앞으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눈은 꾹 감은 채.

하지만 곧장 뽀뽀를 해 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재희가 한쪽 눈을 슬쩍 뜨자 코앞에서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안 해 줘?”

“갈수록 애교가 느네.”

“…… 안 해.”

촉.

안 한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차현이 입을 맞추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갈무리했다.

“허. 누가 맘대로 뽀뽀하래. 안 한다니까?”

촉. 그러자 차현이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그만해애!”

“반짝아, 엄마랑 잘 놀고 있어.”

차현이 시치미를 떼며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귓가에 속삭인 탓에 뜨거운 숨이 훅 끼치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재희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잔뜩 흘겼다.

“좋은 생각만 하고, 화내지 말고. 응?”

“이거 봐. 진짜 변한 거 맞다니까?”

요즘 놀리는 재미에 들린 건지 그는 얄밉게 장난을 치곤 했다.

슈트를 입고 온갖 무게 잡는 이형 전자 부사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변했지. 시간이 흘렀는데.”

“사랑이 식었네, 식었어.”

“예전에는 마냥 좋았다면.”

“……!”

“지금은 조금 더 많이 좋아하고.”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은 그가 진하게 입술을 삼켰다.

흠칫 놀라 바동거리던 그녀는 이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를 받아 냈다.

조금 더 바짝 몸을 밀착한 채, 차현이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농도 짙은 키스가 이어졌다. 몰아치는 키스에 숨을 헐떡이던 재희는 결국 먼저 고개를 틀었다.

“하아, 하.”

숨을 몰아쉬는 사이 다시 그가 다가왔다. 그러자 재희가 고개를 격하게 내저으며 본인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 어서 출근해! 늦겠어.”

“괜찮은데.”

괜찮다는 한마디에 그와 드레스룸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아, 아직 안 돼. 초기라서…….”

갑자기 대뜸 말을 꺼내는 그녀가 귀여워 차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재희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뭐가 안 되는데?”

“…….”

“말해 봐. 무슨 생각 했는지.”

“정말 오늘 너무 못마땅해. 그치. 반짝아.”

입술을 앙다문 채 노려보는 그녀가 몹시 귀엽다.

덕분에 차현은 아침부터 무척 난처해지고 말았다. 임신 초기라 이런 진한 키스 외의 스킨십은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재희.”

“뭐, 왜.”

“하나만 해.”

“뭐?”

알 수 없는 그의 이야기에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귀엽든지, 예쁘든지. 아니면…….”

“…….”

“섹시하든지. 딱 하나만 하라고. 내가 정신을 못 차리잖아.”

“아니, 이게 무슨…… 가 빨리. 출근해.”

낯 간지러운 그의 언사에 얼굴에 화르르 열이 오른다.

예전엔 조금 무뚝뚝하지만 다정했던 그였다면 근래의 차현은 조금 더 능글맞아진 기분이다.

이런 말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니.

좋기도 했지만 조금은 쑥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재희가 질색하며 몸서리를 쳤다.

“알았어. 저녁에는 일찍 들어와 볼게.”

“그럼 나는 준비를 하고 있겠어.”

“무슨 준비?”

“외식할 준비.”

차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출근하기 싫다는 그를 현관까지 끌고 나가 겨우 배웅했다. 그리고 거실로 들어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출근시키기 되게 힘드네.”

말은 이렇게 해도 나가자마자 다시 보고 싶은 거 보면 이차현을 향한 사랑은 중증인 듯했다.

“반짝아, 엄마랑 맛있는 과일 먹자아.”

재희와 차현은 결국 고심 끝에 ‘반짝이’로 태명을 지었다.

반짝반짝 빛났으면 하는 마음에.

자꾸 부르다 보니 정말 입에 착착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뭘 먹지.”

재희는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 입덧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지옥 같던 입덧 기간이 지나고 그녀의 식욕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갔다.

신기한 건, 평소 징그럽다며 먹지도 않던 장어나 닭발. 이런 게 먹고 싶다는 점이었다.

“귤 하나 먹어야겠다.”

탐스러운 귤 하나를 꺼내든 재희는 잘 씻어 껍질을 깠다.

오늘 저녁에 그가 퇴근하면 밖에 나가 족발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귤을 하나씩 까먹으며 재희가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소파 위에 놓았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발신자를 본 재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은미의 전화였다.

“네, 어머님.”

-현이는 출근했어?

“네. 조금 전에 했어요.”

-재희는 아침 먹었고?

“네. 그이가 꼭 먹는 거 보고 나가겠다고 챙겨 주거든요. 같이 아침 먹었어요.”

재희는 통화를 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워낙 마른 터라 10주가 넘어가자 그녀의 아랫배는 조금 볼록하게 나온 상태였다. 배를 쓰다듬으며 재희가 귤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입덧은 많이 나아진 거지?

“네. 요새는 이것저것 잘 먹고 있어요.”

-음…….

은미는 잠시 머뭇거렸다. 전화기 너머로 은미의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재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님,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실까요?”

-사실, 회장님께서 너희 보고 싶으신 눈치야.

“아…….”

형우와는 서재에서 둘이 만난 이후 본 적이 없었다.

차현과 재회 후, 인사를 하러 가겠다고 했으나 입덧이 심하니 조금 지나고 나아지면 오라는 말에 아직 본가엔 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 저희 오늘 갈게요.”

-내가 조금 더 있다가 말할까 했는데. 회장님께서 자꾸 너 입덧 괜찮냐고 물어보시는 게, 아무래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더라고.

“저희가 먼저 갔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그런 건 아니고. 잠깐 들러서 저녁만 먹고 가. 내가 재희 먹고 싶은 거 만들어 놓을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랑이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부담스러워할까 봐 조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님 요리하시는 거 궁금한데. 저도 가서 거들면 안 될까요?”

-무슨. 와서 맛있게만 먹고 가. 응?

“저 오늘 혼자 있어서 심심해요. 이제 씻고 준비해서 갈게요, 어머님.”

-그럼 와서 구경해.

그녀가 온다는 이야기에 은미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재희가 작게 미소를 그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에 봬요. 금방 갈게요!”

-서두르지 말고 조심히. 알았지?

“네에!”

전화를 끊은 재희는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 ▼ △

“빨리 왔네.”

“안녕하셨어요! 이거 어머님께서 좋아하신다고 해서 사 왔어요.”

재희가 은미에게 호두 파이를 건넸다. 익숙한 쇼핑백이었다.

그것을 본 은미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어머, 내가 여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전에 그이한테 들었어요. 여기 호두파이 좋아하신다고.”

“고마워. 우리 차랑 같이 먹자.”

“네.”

은미는 재희와 함께 거실로 향했다. 서재를 흘긋거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자 은미가 곧장 눈치채고는 작게 미소를 그렸다.

“한 조각 접시에 담을 테니 가지고 들어가 봐.”

“네.”

은미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재희가 졸졸 따라 들어갔다.

찬장에서 예쁜 접시를 꺼낸 은미는 호두파이를 잘라 한 조각을 담았다. 그리고 쟁반에 호두 파이와 따뜻한 자스민 차를 올렸다.

“잘 들고 갈 수 있지?”

“그럼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재희는 은미에게서 쟁반을 건네받았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그 이후에 처음 보는 거였기에 사실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괜찮겠어?”

“저, 사실 좀 떨려요.”

“떨 거 없어. 그럴 일도 없겠지만 혹시나 회장님이 이상한 소리 하시거나 혼내시거든 나 불러. 당장 뛰어갈 테니.”

장난 섞인 한마디에 재희의 얼굴이 그제야 유해졌다.

“다녀올게요.”

“응. 나오면 우리 같이 차 마시자.”

“네.”

재희는 서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선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후.”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결심한 듯 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

허락이 떨어지자 재희는 조심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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