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오! 진짜 맛있어요!”
재희가 무쌈말이를 먹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콤한 무와 그 안에 든 채소들이 어우러져 메스꺼운 속을 잠잠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역시 좀 새콤달콤한 게 당기는가 보네.”
12인용 식탁이 가득 찰 만큼, 은미가 만들어 온 음식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각종 반찬부터 메인 요리. 그리고 디저트까지.
이토록 정성 가득한 음식을 받아 본 건 생전 처음이었다.
“다행이네. 이것도 먹어 봐. 응?”
은미가 그녀의 앞에 빨간 도라지무침을 놓아 주었다.
음식은 입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입덧이 심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은미가 해 온 음식은 입맛에 착착 맞는다.
침도 못 삼킬 만큼 속이 울렁거렸던 걸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맛있어요.”
“먹고 토해도 먹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 여기서 먹을 만한 건 좀 챙겨서 먹고.”
친엄마도, 새엄마도 그녀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새엄마야 남이니 그렇다고 해도, 친엄마는 어떻게 하면 딸에게 돈을 뜯어 갈까. 그 궁리만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나운서 자리에서 내려오고 태경도 이렇게 된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괜찮냐는 전화 한 통 없는 걸 보면 자식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없는 듯했다.
“감사해요, 어머님.”
“감사하기는. 현이도 처음이니 아마 잘 모를 거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다 해다 줄게.”
따뜻하게 챙기는 은미의 마음이 참 고맙다. 자식을 돈으로 보는 한숙과는 참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근데 현이는 어디 갔니?”
“아, 잠시 회사에 갔어요. 급하게 처리할 게 있다고. 올 때 됐는데.”
재희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정말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음에도 벌써 세 시간이나 흘러있었다.
“휴가 준다고 하시더니 순 거짓말이셨네, 이 회장님. 며느리 임신해서 힘든데.”
은미가 못마땅하다는 듯 툴툴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재희와 오붓하게 마주 보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니 이것도 제법 즐겁다.
그때 그의 차량이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재희의 눈매가 보기 좋게 기울었다.
“그이 왔나 봐요.”
“아들 얼굴도 보고 가면 되겠다.”
“저녁 드시고 가세요.”
“저녁은 무슨. 네 아버님 혼자 밥 먹는 거 싫어하셔서 가 봐야 해. 애도 아니고 아직도 나를 그렇게 찾으시거든.”
은미는 입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대며 흉을 보듯 속삭였다. 그 모습조차 참 보기 좋다.
서로 위하는 모습이 진심인 것 같아서.
옅게 웃던 재희가 궁금하다는 듯 조심히 물었다.
“어머님은 아버님 어떻게 만나셨어요?”
“갑자기 그게 궁금했어?”
“네. 제 친구들은 다 선 본 사람들이랑 정략결혼했거든요.”
애초에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집안이 이어 준 대로, 서로 사업의 이득을 위해 집안 간의 거래를 하듯 결혼을 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대부분 사이가 좀 안 좋은 편이던데, 은미와 형우는 아직까지 매우 다정해 보여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땐 지금처럼 이형 그룹이 잘된 시절도 아니고, 막 사업 시작할 때였지.”
“아…….”
은미가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첫눈에 반했었어.”
“정말요?”
재희가 놀라며 묻자 은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지금은 좀 나이를 먹긴 했지만, 회장님 젊었을 땐 정말 잘생기셨었거든. 내가 얼굴을 좀 보는 편이라.”
“푸흡.”
듣던 그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왔니?”
한창 재밌게 대화하고 있는데 차현이 도착했다.
주방으로 들어온 그는 은미를 보곤 다소 놀란 눈치였다.
게다가 식탁 위에 차려진 어마어마한 음식을 보고 또 놀라고.
“언제 오셨어요?”
“한 시간쯤 된 것 같은데. 어서 씻고 와. 너 먹는 것까지는 보고 갈게.”
“늦었네요? 재킷 주세요.”
차현의 재킷을 받기 위해 재희가 일어나자 은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다시 의자에 앉혔다.
“쟤도 손 있어. 뭘 재킷까지 받고.”
“어머님도 회장님 재킷 받으시잖아요.”
“임신 중이잖니. 안정이 제일 중요하니 손끝 하나 움직이지 말어.”
살갑게 챙기는 은미를 보며 차현이 작게 웃었다.
“씻고 올게요.”
“어서 다녀오렴.”
은미가 차현을 향해 해사하게 미소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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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은 괜찮아?”
“응. 너무 신기해.”
“다행이다.”
재희는 차현의 다리를 베고 소파에 누웠다.
차현이 먹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은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집을 나섰다.
다음에도 또 맛있는 걸 해 주겠다는 말을 남긴 채.
“다들 임신하면 친정 엄마가 해 준 음식이 먹고 싶다던데 난 그런 게 없더라고.”
보통 엄마가 해 줬던, 어릴 적부터 먹던 음식이 당긴다고 들었다.
그런데 재희는 음식만 생각해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차피 정성 가득한 요리를 챙겨 줄 사람도 없긴 했지만.
“근데 오늘 어머님이 해 주신 거 먹어 보니,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
차현이 애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자식처럼 재희를 챙겨 주는 은미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임신했다는 제 한마디에 단숨에 달려올 줄은 차현도 알지 못했다.
“사실 오빠도 엄마 안 계셨잖아. 그래서 어머님같이 다정한 분이 계셔서 참 다행이다 생각했거든?”
“응.”
“근데 나도 꼭 엄마가 생긴 기분이야.”
그녀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다른 때는 입덧 때문에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더니, 이렇게 거실에서 대화도 하고.
조금은 나아 보여서 참 다행이다.
“이차현 덕분이네.”
“내가 뭘 했다고.”
“오빠 복이지. 인복. 난 그런 이차현을 얻었으니 내 인복이 최고인가 보다.”
재희가 눈꼬리를 늘이며 씨익 웃었다.
그 미소가 예뻐 차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다음 소식입니다…….]
갑자기 들린 TV 소리에 재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차현이 채널을 돌리기 위해 빠르게 리모컨을 들자 그녀가 가로채며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거 보자.”
그냥 습관처럼 켜 두었는데.
시간이 지나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혹시나 뉴스를 보면 재희의 마음이 안 좋을까 봐 채널을 돌리려던 건데 그녀는 괜찮다는 듯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재희의 후임이었던 소율은 메인 뉴스 자리에 앉자마자 사생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민준이 앙심을 품고 소율의 뒤를 밟은 게 문제였다.
민준 말고도 다른 남자도 만나고 있었던 모양인지, 난잡한 사생활이라며 민준이 기사를 터트리는 바람에 소율은 곧장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민경 씨 진행 잘하네.”
대신 그 자리는 그녀의 후배인 민경이 하게 되었다.
평소 빠릿빠릿하고 열심히 하던 민경이었기에 재희는 먼저 연락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네가 더 잘해.”
“그건 알지.”
“정말 못 말려.”
“왜, 사실인데.”
재희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여전히 마음은 안 좋겠지만 그래도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아주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
“아기 낳고, 반드시 복귀할 거야.”
“그래. 할 수 있어.”
“응. 나 정말 실력 있는 아나운서였거든.”
“알지. 그것도.”
차현이 맞다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태경이 죗값을 받게 되면. 그땐 다시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재희는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뿌옇게 안개가 낀 듯, 눈앞이 캄캄했는데 좋은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배 속에 아이도 있었으므로.
“맞다. 그래서 태명 뭐로 지을 건데?”
“넌 생각해 본 거 없어?”
“음…….”
그저 쉽게 부를 수 있는 게 좋다고 하던데, 왜 이리 짓기가 어려운 건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빠는?”
“찾아봤는데 된 소리가 좋다고 하네. 아기한테 잘 들린다고 하더라고.”
“아 뭐 꿀떡이 이런 거?”
“응.”
그런데도 역시 확 와닿지 않는다.
재희가 미간을 모으며 고민하자 차현이 엄지로 그녀의 좁혀진 미간을 꾹 눌렀다.
“예쁜 얼굴 인상 쓰지 말고.”
“알았어어.”
재희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 나 얼마 전에 꿈꿨는데. 그게 태몽인가?”
차현이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진짜? 난 못 꿨는데. 무슨 꿈이야?”
“네가 엄청 큰 복숭아를 안고 있더라고.”
뽀얗고 하얀 백도였다.
딱 보기에도 무척 귀해 보이는 복숭아였다. 그림처럼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태몽이었던 모양이다.
“백도였어.”
“빽도는 좀 어감이 별로네.”
“그럼 다른 거 해.”
“뽁뽁이가 좋겠어.”
재희가 결정했다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차현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그러자 재희가 눈치를 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
“……왜, 별로야?”
“응.”
“귀여운데, 왜.”
“별로야 별로.”
아, 그럼 뭘 하나.
재희가 다시 입술을 내밀며 고민에 빠졌다.
둘은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누가 보면 국가고시라도 본다고 생각할 만큼.
“그럼 오늘까지 다섯 개씩 생각해서 그 안에서 결정하기로 해.”
이러다가는 못 짓겠다며 재희가 먼저 방법을 제안했다.
“좋아. 다섯 개 생각해 볼게.”
“오케이.”
재희는 핸드폰 메모장 앱을 켜고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