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 (56/62)

56.

“오빠.”

“응?”

재희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집에 도착한 후, 재희와 차현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세민에게 별장에 있는 짐을 가져오라고 지시하려 했지만, 직접 가서 챙기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차현은 내일 함께 가자고 했다.

“전에 어디서 본 적 있는데. 배란기에 딱 관계를 해도 임신이 될 확률이 16% 정도래.”

“낮네, 확률이.”

“근데 임신이라니. 신기하지?”

차현이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자 재희도 차현 쪽으로 움직여 마주 보았다.

그가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의 아랫배를 손으로 감쌌다.

“임신인 거, 언제 알았어?”

“오빠가 별장으로 찾아온 날. 그날 아침에 확인했어.”

그 말을 들은 차현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설마 그날일 줄은…….

재희는 그를 바라보며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막 결정하라고 오빠가 다그치는데, 나 임신했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차마 할 수가 없더라.”

“말했어야지.”

“오빠 돌아가고 얼마나 울었는지.”

재희가 눈물을 글썽이며 작게 웃었다.

마치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그런 기분이었다.

차가운 그의 태도에 더 마음이 시렸던.

“그래도 후회 안 해.”

“무슨 후회.”

“그때 그렇게 따라갔으면, 아마 평생 마음속에 남았을 거야.”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 없었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다른 여자랑 아기 낳고 사는 것도 속상한데……. 혹시나 오빠가 세상에 없으면. 그건 못 견디겠더라고.”

“…….”

“그건 상상이 안 돼.”

“재희야.”

재희가 입꼬리를 당겨 억지로 웃었다. 그러고는 아랫배 위에 있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나, 아직 태명 못 지었어. 뭐가 좋을까?”

가만히 바라보던 차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명…….

그녀와 자신을 닮은 예쁜 아기가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금방 아기천사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예쁜 걸로 생각해 보자.”

당장 짓기보단 나름 예쁜 걸로 짓고 싶은 마음이었다.

재희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꿈같네.”

“뭐가?”

“아기. 조금 더 조심할 걸 그랬다.”

“아냐. 뭐, 일부러 육아휴직도 내는데. 나 어차피 이제 다시 아나운서 못 할 수도 있고.”

그 말을 입에 올리자 정말 현실이라는 게 피부에 와닿았다.

정말 다신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직업을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간 제 노력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쳤다.

“아기 키우면 되지.”

그 말을 하는 재희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슬퍼 보였다. 차현이 재희를 꼭 안으며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 와이프 예쁘고, 능력 있어서, 반드시 다시 복귀할 거야.”

“……진짜 그러고 싶다.”

평일 저녁을 반납하면서도 아나운서를 하면서 무척 행복했었다.

몸이 좋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쌩쌩했던.

일을 그만두고, 매일 그 시간만 되면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그렇게 될 거야.”

그의 말대로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재희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했어.”

주방에 놓인 수많은 음식을 보며 형우가 물었다.

언뜻 보기에도 음식은 최소 열 가지 이상이었다.

직원 세 명과 은미는 앞치마를 하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보, 재희 임신했대요.”

은미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형우는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임신?”

“네. 그제 현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재희 다시 데리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둘이 싸우고 헤어지는 건 아닌지 얼마나 걱정했나 몰라.”

은미가 찬합에 음식을 예쁘게 담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임신도 했다고 말해 줬어요. 정말 잘 됐죠.”

은미는 오랜만에 무척이나 즐거운 낯이었다. 안 그래도 요새 차현과 재희의 일로 심란해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야 한시름 놓은 모양이다.

형우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그녀의 공허했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처럼 생기 넘치던 아내는 한순간에 말라 갔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쯤, 차현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 많은 음식을 한 거야? 며느리 주려고?”

“네. 당신 기억 안 나세요? 나……우리 아들 임신했을 때 유독 못 먹어서. 당신이 새벽에 나가서 딸기도 사다 주고 그랬잖아요. 임신하면 불쑥불쑥 뭐가 먹고 싶고 그래요. 근데 지금 재희는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데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음, 정말 모르는 소리.”

은미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어느새 3단 찬합에는 반찬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그녀가 다른 찬합을 가져와 음식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못 먹는다고 안 먹으면 안 되죠. 임신 중인데. 입맛에 맞는 걸 찾아야 한다고요. 여기 음식 중에서 분명히 먹을 수 있는 게 있을 거예요.”

“그러다 없으면 어쩌려고.”

“그럼 우리 현이 먹이고 다른 거 해다 주면 되죠.”

뭐가 문제냐는 듯 은미가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그녀를 바라보는 형우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단아한 얼굴만큼이나 마음이 참 고운 사람이었다.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래도 가장 힘들 때 차현을 아들로 품고 애정을 쏟은 덕에 다시 이렇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차현이 부담을 느낄까 봐 조심하고 있다는 것을 형우는 안다.

“나도 식혜 한 그릇 좀 줘.”

“여보, 이 인절미 막 해 온 건데 이것도 같이 드릴까요?”

형우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은미의 모습에 형우의 얼굴에도 모처럼 미소가 번졌다.

“살얼음 있어서 시원하실 거예요.”

고소해 보이는 인절미와 얼음이 동동 띄워진 식혜가 그의 앞에 놓였다.

형우가 떡 하나를 입에 넣자 은미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꼭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때와 같았다.

소녀같이 수줍게 웃던 20대 때의 아내의 모습이.

“맛있네.”

“어서 식혜도 드셔 보세요.”

그녀의 재촉에 형우가 픽 웃으며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시원한 식혜는 몹시 맛이 좋았다.

“당신 식혜는 참 한결같네.”

“어머님께 배운 건데요 뭐. 재희도 잘 먹었으면 좋겠어요. 입덧하면 얼마나 힘들지.”

어느새 정리를 마친 은미가 찬합을 보자기에 하나씩 싸며 마무리했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 잘 갠 후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같이 가실래요?”

“난 됐어. 조심히 다녀와.”

곧장 거절하자 은미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재희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다 은 의원이 한 걸 텐데.”

“나도 알지.”

“그럼 이제 좀 살갑게 좀 대해 줘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우리 아버님은 나한테 잘해 주셨는데 비교되네요.”

형우를 타박하며 씽긋 눈을 찡그린 그녀가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다녀올게요. 우리 며느리 챙기러.”

형우는 그런 그녀를 배웅하러 현관까지 걸어 나갔다.

차현의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인다.

△ ▼ △

“어서 오세요, 어머님.”

은미가 집으로 들어오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은미를 뒤따라 들어온 비서의 손에는 짐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재희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짓자, 은미가 그녀의 팔을 당기며 거실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히고 재희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딸을 보듯 걱정 가득한 눈빛이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은 거야?”

“네.”

“괜찮기는.”

못 본 사이 재희의 얼굴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마음고생이 너무 심하기도 했겠지만, 임신을 하고 제대로 먹지 못해 그런 듯했다.

은미가 애잔한 눈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많이 힘들지? 고생 많았어.”

고생했다는 한마디에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울컥하고 말았다. 은미를 가만히 보던 재희의 고개가 떨어졌다.

몇 번 보지 않았지만 은미는 정말 친자식처럼 차현과 재희를 챙겼다.

임신을 해서 감정 기복이 심해진 탓 인지, 아니면 너무 마음이 힘든 탓인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눈물이 차올랐다.

가만히 보던 은미가 그런 재희를 안았다.

“힘들지. 왜 안 힘들겠니.”

은미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들을 잃고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하던 제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무뎌지더라.”

어떻게든 꿋꿋이 살고 있는 걸 보면.

시간이 약인 게 맞는 모양이다.

은미가 품에 있던 재희의 젖은 뺨을 닦으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자. 응? 다 괜찮아질 거야.”

그 어떤 것보다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였다.

은미의 위로에 재희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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