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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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분명히 괜찮지 않을 텐데,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일이 많기도 했지만, 일부러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더 매달리는 게 훤히 보였으니까.

“그 선택은 그 아이가 한 거다.”

형우의 말에 차현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무슨 말을 했던 걸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입가에 맴돌 뿐. 차마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네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 아이를 얻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그 말만 했다.”

“…….”

“차현아.”

형우가 그를 나직이 불렀다. 깊어진 형우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차현은 귀를 기울였다.

“네가 피가 섞인 내 아들이 아니라도 달라질 건 없어. 아들로 받아들이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너는 내 아들이야. 다만.”

잠시 숨을 고르며 형우는 말을 이었다.

“친아들이었다면 결혼은 안 시켰을 거다. 그랬다면 물론 네가 그렇게 당했을 리도 없겠지.”

“회장님.”

“네가 내 뜻을 거역하고 결혼했어도 더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내쳤을 수도 있고.”

아들이면 아마 더 막대했을 것이다.

그래도 제 친아들이 아니라 형우도 차현에게 적당히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한 노력이 있으니 나도 다 감안한 건데. 최소한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정도는 그 아이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만 알고 있는, 애잔했던 차현의 노력을 알아 주길 바랐다.

차현의 성정이라면 절대 먼저 말하지 않을 테니.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매번 저렇게 당하는 녀석이 안쓰럽기도 했으므로.

“그래서 헤어질 생각인 거냐.”

“모르겠습니다.”

너무 화가 나 이혼하자고 말은 했지만, 사실 재희와 다시 헤어지는 경우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혼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차현은 잡생각을 떨치려 일에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벌써 2주나 흘러 있었다.

“후회할 것 같으면 한 번 더 잡아. 그렇게 네가 못 놓는 아이잖니.”

“…….”

“다만 좀 네가 힘든 걸 그 아이가 알아 줬으면 했어. 내 아비 된 마음으로 말해 준 것뿐이다.”

차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여전히 차현이 자신을 어려워하는 걸 알고 있다.

저에게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래도 원망스럽다고 한마디 해 준 것도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며칠 좀 쉬고 와.”

“아닙니다.”

“그러다 쓰러지면 네 엄마 또 얼마나 호들갑일지 안 봐도 훤해. 지금도 너한텐 말도 못 하고 뒤에서 전전긍긍이야. 아들 눈치만 보고 있거든.”

순간 목구멍으로 뜨끈한 무언가가 치밀었다.

굳이 그 말을 왜 했을까. 사실 참 원망스러웠다.

결국 자신을 이용했구나 싶어서.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 주는 형우의 모습에 그간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다.

“사업하다 보면 위기가 셀 수도 없다. 그때마다 잘 일어서는 건 네 몫이야.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너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키워야 하는 거고.”

“…….”

“내가 봐 줄 수 있는데 까지는 뒤에서 봐 줄 테니. 열심히 해 봐라.”

“감, 사합니다.”

“며칠 쉬어. 출근하면 정말 진심으로 화를 낼 생각이니.”

형우가 차현을 보며 작게 웃었다.

눈가가 자꾸만 시큰거려 차현은 이를 사리물며 참아 냈다.

△ ▼ △

“하아.”

집에 들어온 차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샤워를 하러 들를 때를 제외하곤 2주간 집에서는 잠도 자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며 지내왔는데 이제야 그녀가 없는 집이 눈에 들어온다. 차현이 소파에 털썩 앉아 몸을 묻었다.

‘나라고 마음이 편해? 만나기만 하면 이런 일이 자꾸 터지는데. 아무것도 모른 척, 염치없이 계속 오빠 옆에 있으면. 내 마음도 지옥이야.’

“지옥…….”

무슨 마음으로 그런 소릴 했을지 짐작은 하지만, 참 서운했다.

“뭐 하고 있으려나.”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아봐 달라고, 다시 잡아 달라고.

하지만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혼자 마음고생 좀 했으면. 나쁘지만 그런 마음이 들었다.

차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위스키 한 병을 든 그가 온더록스 잔에 가득 부어 따랐다.

“하아.”

단숨에 들이켜자 식도를 타고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술을 입에 대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멀리하며 지냈는데, 대충 모든 게 정리되고 나니 술 생각이 참 간절하다.

다시 잔에 가득 따르자 호박색 액체가 넘실거린다. 한 잔 더 들이켠 그가 얼굴을 구겼다.

차현이 잔을 채우고는 거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타이를 느슨하게 당긴 그가 다시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후회할 것 같으면 한 번 더 잡아. 그렇게 네가 못 놓는 아이잖니.’

애초에 놓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마음을 돌려야 할지. 그게 참 고민이다.

“연락도 없네.”

예상하긴 했으나 연락 한 통 없는 게 섭섭하기도 하다.

은재희 고집 한번 알아 줘야 한다며 차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허공에 잔을 빙그르- 돌리던 그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

잠시 고민하던 차현이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민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네, 부사장님.

참 한결같다. 미국에서나 한국에 와서나.

차현의 아래에서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세민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쉬라고 해 놓고 또 전화를 했네.”

-괜찮습니다.

차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슈, 하나만 만들어야겠어.”

-무슨 이슈 말씀이십니까.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은 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결정할 시간이었다.

△ ▼ △

침대에 누운 재희가 까만색 초음파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심장은 보고 또 봐도 참 경이로웠다.

“참 작네.”

고작 1cm도 안 되는데 존재감을 알리듯, 쿵쿵 뛰던 심장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축하합니다. 임신이네요.’

그 누구한테도 받지 못한 축하를 의사에게 받다니.

참 입이 쓰다.

날이 갈수록 입덧은 점점 더 심해졌다. 임신인 걸 알면서도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수 없기에 재희는 오늘 오후, 병원이 끝나기 전에 진료를 보고 왔다.

그녀를 알아본 의사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진료를 봐 주었다.

“태명은 뭐로 지어 줄까.”

그래도 부를 이름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저녁은 겨우 주스만 먹었는데, 갑자기 토마토가 생각난다.

냉장고에 있었나.

관리인이 가끔 장을 봐 냉장고를 채우긴 했으나 토마토는 없던 것 같은데.

재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옆에 놓아둔 주스를 모두 마셨다. 메스꺼운 입덧은 주스를 마시면 조금은 잠잠해지는 기분이다.

“태명은 좀 더 생각해 볼게.”

재희가 작게 웃으며 초음파 사진을 산모 수첩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임신해서 좋은 건 딱 하나였다.

잠이 많아졌다는 것.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져 밤낮이고 머리만 대면 자기 바빴다.

오늘은 오전 내내 자서 그런지 저녁이 되어도 눈이 말똥말똥하다.

핸드폰을 들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포털 사이트 앱을 터치했다. 그리고 검색창에 이형 그룹을 검색했다.

“…….”

오늘 올라온 기사들을 눈으로 훑던 그녀의 낯에 안도의 기색이 번졌다.

벌써 그와 헤어진 지 2주째.

다행히 차현은 일을 하며 잘살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알 수 있어서 좋네.”

부사장이라 기사도 올라오고.

이형 그룹만 검색해도 그가 어떻게 일하는지, 잘 지내는지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섭섭하기도 하고.”

다시 와서 잡아 주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잘 지내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섭섭하기도 했다.

아니면, 늘 그랬듯 그냥 잘 지내는 척을 하고 있을지.

눈을 감아도 떠도 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다시 시작이네.”

그와 재회하고 이제 겨우 이 그리움이 사라지나 싶었는데 다시 원점이다.

할 일이 없어 자꾸만 잡생각이 드는 탓에 재희는 일부러 다른 곳에 집중하려 애썼다.

잠을 자거나 정원에 나가 물을 주거나.

물론 입덧이 심해 그마저도 쉬면서 해야 했다.

“이젠 뉴스도 안 하는데.”

그녀가 진행하는 뉴스를 매일 챙겨 본다고 했는데.

이젠 그것조차 하지 않으니 차현이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내가 그를 보고 싶은 만큼, 이차현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아도, 너 괜찮은 거지.’

그가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건데.”

근데 왜 그 생각만 하면 이렇게 억장이 무너지는지.

재희는 다시 몸을 뉜 후 눈을 감았다.

이혼 서류는 다 작성하고 왔는데, 아직 그에게서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입덧이 심해 먼저 연락할 정도의 에너지는 없었기에 잠자코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혼하자고 했으니 곧 연락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어서 자자.”

재희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작게 미소를 그렸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혼자가 아니라서. 배 속의 아이와 함께라 5년 전보다는 덜 외로우니까.

애써 잠을 청하며 재희는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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