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찰칵.
문을 열자 그 앞에 서 있는 차현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일부러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차피 알아내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금방 만나게 될 거라는 건 집을 나오면서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했던 그 테스트기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게 문제였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해.”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지금 그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이렇게 감정을 누른 차가운 말투를 안다.
얼마 전, 그와 재회 후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은재희, 내가 말했지. 내 손 놓지 말라고.”
재희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제 마음을 들킬 수 없기에 그녀는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회장님께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 말을 하기까지. 그간의 시간을 알면 너 그렇게 쉽게 놓으면 안 되는 거야. 들었으면 더더욱 이러면 안 되는 거고.”
“쉽게 놓은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겠지. 근데 너, 쉽게 놓은 거 맞아.”
차현은 단호했다.
경솔했다고. 지금 네가 한 행동은 몹시 경솔한 거라고.
재희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서늘한 눈매를 보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애써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오빠.”
“너 아니어도, 나 지금 무척 힘들거든.”
그의 입술 새로 한숨이 흩어졌다. 그래서 놓은 거였다.
제 옆에만 있으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이 정도로 자꾸 힘들면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제 모습이 이토록 한심해 보일 수는 없었다.
“마지막 기회 주려고 온 거야.”
마지막, 기회.
그 단어가 심장에 콕 박혀 들었다.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다시는, 묻지 않을 거고. 5년 전 그때랑은 달라. ”
“…….”
“지금 아무 말 하지 않고 같이 가겠다고 하면 그냥 없던 일인 것처럼 지내면 돼. 그러니 잘 생각하고 대답해.”
말아쥔 그의 커다란 손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그의 목소리가 정말 진심인 것 같아서 명치 끝이 저릿하다.
냉정할 땐 한없이 냉정하던 차현이었다. 이성적인 그의 모습에 불안감이 몸을 휘감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아도, 너 괜찮은 거지.”
그의 입술 새로 흐른 말에 재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른 여자, 아이.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차현이 직접 말하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피부에 와닿았다.
“괜찮으니 그렇게 이혼하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오빠는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 말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잖아.”
“은재희.”
“나라고 마음이 편해? 만나기만 하면 이런 일이 자꾸 터지는데. 아무것도 모른 척, 염치없이 계속 오빠 옆에 있으면. 내 마음도 지옥이야.”
울지 않기 위해 재희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차현의 눈가에 핏발이 섰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곳에 올 때부터 쉬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재희는 참 한결같았다.
차현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괜찮다잖아. 그거 다 감수하고, 5년 전 일도 다 묻고. 너 하나 잡겠다고 내가…….”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아.
차현은 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화를 눌렀다.
“결론만 말해. 후회, 안 해?”
“…….”
“대답해.”
입술을 짓이기던 재희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차현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 그럼. 내 손 놓은 거 너야. 잊지 마. ”
“…….”
“이혼하자, 우리.”
그 말 한마디를 남긴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재희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형우의 말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차현에게 나는 짐스러운 존재였다.
지금도 그 어떤 것도 도와주지 못한 채, 힘들다고 집안에 처박혀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제 선택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입에서 이혼하자는 말을 듣자 제 선택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한심하다.”
재희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차현이 가고 재희는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하루를 보냈다.
집 안이 어두워졌음에도 불도 켜지 않은 채.
눈물도 안 나는 걸 보니 정말 끝이라는 게 자각이 된 모양이다.
‘내 손 놓은 거 너야. 잊지 마.’
모른 척 매달려 볼걸. 그냥 너무 미안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 볼걸.
그랬다면 차현은 괜찮다고 안아 줬을 텐데. 그조차도 염치가 없어 그럴 수 없었는데 또 후회가 된다.
“…….”
재희가 소파에 기대며 아랫배를 감쌌다.
“임신도 했는데.”
한 번 결정하면 냉정한 그였기에 정말 모든 게 끝난 듯했다.
‘이혼하자, 우리.’
내가 이혼하자는 말을 했을 때, 차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심장이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다. 그가 다시 돌아와 결혼했을 때, 정말 마지막 기회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 오늘이라도 잡았다면.
그때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재희가 그것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은미의 전화였다.
고민하던 재희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가져다 댔다.
“네, 어머니.”
-재희야, 좀 괜찮니?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듣자 울컥 목이 메어왔다.
차현 외에는 그 누구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다못해 저를 낳은 엄마조차도.
-걱정돼서. 전화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혹시나 내가 전화하면 더 심란해 할까 봐. 그래서 못했거든.
“괜찮아요.”
-뭐 괜찮겠니. 현이가 전화가 왔더라고. 혹시 너 왔을 때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걱정하는 것 같던데. 혹시 너희 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래서 알게 된 듯했다.
그녀가 본가에 다녀가고, 그 결정을 했다는 것을.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다시 은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울고 나온 것 같아서 그 말만 했는데. 괜히 했다 싶기도 하고. 현이 전화했더니 회사라고 해서……그래서 너한테 전화해 봤어.
“네.”
은미의 목소리는 참 다정했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라도 말해. 응?
“감, 사합니다.”
-내가 뭘 해 줬다고. 목소리 들으니 그래도 마음이 좀 편하네. 너희 싸우기라도 한 걸까 봐 걱정많이 했거든. 밥 잘 챙겨 먹어.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버텨야 해.
은미는 진심이었다.
차현의 친엄마도 아닌데, 자신과는 그저 며느리와 시어머니일 뿐인데.
딸처럼 걱정해 주는 목소리를 듣자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조만간 반찬이라도 해서 갈 테니 얼굴 좀 보여 줘. 잠깐만 들를 테니까.
“네.”
-그럼 쉬어라.
짧은 통화가 끝났다.
끊긴 전화를 보며 재희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일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차현은 형우에게 허리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형우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형우가 재희를 만난 지 벌써 2주일이 흘러있었다. 그 사이 차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벌어진 일을 수습하느라 밤낮없이 회사에 매달렸다.
그가 고생하고 있다는 건 형우 또한 알고 있었다.
“손해 본 부분은 앞으로 분발해서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하겠습니다.”
“고생 많았다.”
형우가 뒤에서 힘을 써 주긴 했으나, 그간 차현의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사실 형우도 이렇게까지 금세 정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잔뜩 상한 차현의 얼굴을 보며 형우가 입을 열었다.
“차현아.”
“네, 회장님.”
“나 원망하냐.”
형우의 물음에 차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얼마 전, 그의 집에 들른 은미는 다소 놀란 목소리로 형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재희가 집에 없어요, 여보. 현이 비서한테 들어 보니…… 2주 전에 집을 나갔다고 하던데. 그날 우리 집에 오고 둘이 싸운 거 아닐까요.’
형우가 했던 말로 인해 둘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차현은 형우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일에만 집중할 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형우는 궁금해졌다.
“답, 안 할 거니.”
“괜찮습니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네가.”
거짓이었다. 절대 괜찮을 리 없다는 걸 형우도 알고 있었으므로.
차현이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버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형우였기에 지금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망, 스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던 차현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형우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