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몸을 뒤척이던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제 옆에서 자고 있는 차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온 거지.
늦은 밤까지 거실에 앉아 있던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곧장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든 모양이다.
“…….”
곤히 자는 그의 모습은 여전했다.
잘생기고, 그림같이 멋있고. 그녀가 첫눈에 반했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려던 재희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잠도 못 자고 일했을 텐데. 조금 더 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칠해진 얼굴을 보자 속이 상한다.
재희는 자는 그를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침대에서 조심히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후.”
싱크대 앞에 선 그녀는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옆에 걸려 있던 앞치마를 꺼내 둘렀다.
그녀가 늘 꿈꿨던 신혼의 로망.
차현이 일어나기 전까지 뭐라도 만들어야겠다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뭘 만들지.”
그가 뭘 좋아했더라.
차현이 좋아하던 것을 머릿속으로 그리던 재희가 쓰게 웃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그녀가 좋아하는 건 늘 뚝딱뚝딱 만들어 주던 그였는데.
정작 자신은 그가 잘 먹는 것 중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심하다, 은재희.”
재희가 혀를 차며 가장 만만해 보이는 계란 네 알을 집어 들었다.
“우유도 넣었던 것 같은데.”
차현이 뭘 넣었었더라. 재희는 그가 요리했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가장 흔하고 하기 쉽다는 계란 오믈렛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러다 망치면 휘휘 저어서 스크램블이라고 우기지 뭐.
고민하던 그녀가 우유도 꺼내고는 문을 닫았다.
“그릇이 어디 있더라. 여기 있다!”
상부 장과 하부 장을 열어 살피던 그녀가 스테인리스 볼을 발견하고는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커다란 볼 안에 계란 네 개를 깨고 우유도 조금 부었다.
“소금도 넣어야지.”
소금을 톡톡 뿌리고 거품기로 휘휘 젓던 그녀가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네?”
벌써 그럴싸한 요리라도 만든 기분이다.
재희는 계란과 우유를 다 섞은 후, 프라이팬도 하나 꺼내 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기름…….”
그냥 식용유를 넣으면 되는 건가. 올리브유?
제법 많은 기름의 종류를 보며 재희는 또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팔짱까지 끼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평소 그가 좋아했던 아보카도 오일을 집어 들었다.
“괜찮겠지 뭐.”
차현은 이걸로 버섯도 볶고 그랬으니.
“아, 버섯도 볶아 줘야겠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미니 새송이 버섯이 있던 게 떠올랐다.
서둘러 오믈렛을 만들고 버섯도 볶아야겠다며 재희는 프라이팬에 오일을 두르고 불을 켰다.
“럭비공처럼. 예쁘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요리하는 차현을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구경했더니, 다행히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한창 만들던 재희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처음인데.”
자주 해 줄걸.
바쁘다는 이유로, 못한다는 핑계로. 그간 한 번도 안 해줬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밀려온다.
커다란 접시에 오믈렛을 담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냉장고에서 버섯을 꺼냈다.
“일어나기 전에 빨리해야겠다.”
재희는 주방을 분주히 움직였다.
△ ▼ △
대충 마무리한 재희는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차현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기에, 몇 시에 온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깨우지 말아야 하나.”
잠도 자지 못하고 일했을 게 뻔하다.
밥도 못 챙겨 먹었는지 더 살이 빠진 상태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뒤척이던 차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깜빡이던 그가 앞에 앉아있는 재희를 보곤 작게 웃었다.
그 작은 미소에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재희는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깼어? 오빠 오는지도 모르고 잤지 뭐야. 언제 온 건데? 응?”
말할 기운도 없는지 차현이 한쪽 팔을 펼치고 고개를 까딱였다.
팔을 베고 같이 눕자는 뜻이었다.
재희가 작게 웃으며 냉큼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러자 차현이 눈을 감고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내가 아침 차렸어.”
“기특하네.”
“뭐 했는지 안 궁금해?”
“음…….”
차현은 잠시 고민했다.
은재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더라.
하지만 생각을 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뭐야. 왜 말을 안 해?”
“커피?”
“그것도 하긴 했어.”
그건 그냥 내리기만 하면 되니 일단 해 놓은 모양이다.
혼자 분주히 움직였을 은재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절로 미소가 번졌다.
“왜 웃어?”
“귀여워서.”
“알아 나도.”
뻔뻔한 답에 차현이 픽 웃으며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척에서 시선이 얽혀들었다.
가만히 보던 그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재희야.”
“……응?”
“나 괜찮아.”
“…….”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하지만 주책맞게도 그 말을 듣자 목이 메어왔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재희가 일부러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럼 어서 일어나. 밥 먹게. 아우 나는 오빠 피곤할까 봐 깨우지도 못…….”
촉.
그때 차현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재희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애쓰지 않아도 돼.”
차현은 안다.
그녀가 일부러 밝은 척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고생하는 자신에게 미안해서. 그래서 지금 그녀는 억지로 이러고 있는 거다.
누구보다 마음이 지옥일 텐데.
그 모습이 안쓰러워 명치 끝이 저릿했다.
“만회할 수 있는 것들은 대충 정리했고. 그리고…… 어그러진 건, 다시 하면 돼.”
“…….”
“나 능력 있잖아.”
그렇게 고생해 놓고 차현은 또 그녀의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결국 꾹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차현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결국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재희는 눈물을 삼켰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도,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무심했던 아버지도.
그리고 저 하나 때문에 고생하는 차현도.
어느 것 하나 괜찮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오늘까지만 울어. 응?”
“……흡.”
“나 너 우는 거 보면 속상해. 그러니까 그만 울자.”
차현이 슬쩍 몸을 떼어 그녀의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잔뜩 야윈 그녀의 얼굴을 보자 속상함은 배가 되었다.
원래도 말랐는데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당장 벌어진 눈앞의 일 때문에 그녀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넓은 집에서 혼자 울고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왔으면 보고 가지 그랬어.”
그의 한마디에 재희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현이 옅은 미소를 그리며 짓무른 눈가를 어루만졌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
“…….”
그 말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들어 왔어야지.”
“내가……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그새 그걸 말했어?”
그 와중에 그게 또 억울한 모양이다. 그녀의 어이없는 질문 포인트에 차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세민이가 너 가는 걸 봤다더라고.”
“아…….”
“얼추 정리했으니까, 이제 조금 후면 좀 덜 바쁠 거야.”
우는 그녀를 달래며 차현은 한참이나 품에 안았다.
△ ▼ △
“제법이네.”
“그치?”
의기양양한 모습이 참 귀엽다. 그녀가 차려 놓은 아침 식사는 제법 그럴싸했다.
토스트도 굽고, 버터도 꺼내고. 잼도 꺼내고.
나름 오믈렛도 잘 말아 놓고.
“근데 왜 한 번만 먹어? 별로야?”
“참나.”
눈으로 보느라 잠시 멈췄더니 맛이 없어서 그만 먹는 줄 아는 모양이다.
차현이 포크로 오믈렛을 한입 떠먹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으로도 먹는 거잖아.”
“맛있게, 열심히 먹으란 말이야.”
“오케이.”
그가 알겠다며 식빵을 들었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식빵에 버터를 발라 그녀에게 건네자 재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왜?”
“나는 만들면서 냄새를 많이 맡아서 그런가, 속이 안 좋아.”
“언제부터 그랬는데.”
“글쎄…….”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영 입맛도 없어 커피만 홀짝홀짝 마실 뿐이었다. 차현이 걱정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좀 늦게 출근할 테니까, 나랑 병원 가자.”
“싫어.”
“재희야.”
“괜찮대도. 싫어. 사람들 보는 것도 싫고. 더 있다가 정 못 견디겠으면 그때 갈게.”
영양제라도 맞춰 주고 싶은데…….
저렇게 고집을 부리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집으로 김 교수님을 부르는 건 질색하던 그녀였기에.
“오빠 늦겠다. 어서 먹고 출근해. 응?”
차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