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48/62)

48.

“말씀, 해 주세요.”

들어야 했다.

차현이 정말 형우의 아들이 되기로 한 이유.

재희와 태경 때문일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내용이 듣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도 없었으므로.

“괜찮겠니.”

마지 마지막 기회를 주듯 형우가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안 좋은 얘기이구나.

그 말을 들은 재희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괜찮지 않겠지만,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제법 단호한 모습에 형우가 설핏 웃으며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잠시 회상하는 듯, 형우는 생각에 잠겼다.

재희는 그런 그를 눈에 담았다.

그저 이용을 위해 입양했다고 생각했는데, 형우는 차현에 대해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너한테 냉랭해서 서운하냐.”

“아닙니다.”

“이 정도로 서운하면 안 된다. 그 녀석이 당한 설움 생각하면.”

재희는 주먹을 꼭 쥐었다. 불안감에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어댔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리는 기분.

듣기도 전에 눈가가 젖어 갔다.

“내 친자식이었다면 그런 일을 당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설사 당했다면. 은태경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야.”

딸이 만나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태경은 직접 사람까지 고용해 차현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

질이 무척 안 좋은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뒀다면 저러다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형우는 자신이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내 아들로 삼긴 했지만, 그 녀석 참 애잔하다.”

차현을 향한 형우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형우는 차현의 아버지가 제 아래에서 일할 때부터, 아주 어릴 적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

매사에 바르고 성실하던 녀석.

엄마 없이 자랐음에도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차현은 매우 반듯했다.

“그런 애가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아들이 되겠다고 하더라.”

차현이 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 모든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할 때였다.

삶이 무기력하고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모든 게 허무했던.

아들 또래의 차현은 아버지를 잃고,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고 형우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그 녀석이 그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내 핏줄도 아니라……. 물어뜯어서 끌어 내리기 위해 다들 혈안이 되어 있어. 사방이 적이야. 그런데 네가, 네 아비가. 그런 아이한테 빌미를 제공한 거다.”

“…….”

“차현이 성격상 너에게 아무 소리도 안 했을 거라는 것도 안다. 차현이 지금 회사 일만으로도 많이 힘든 상태거든. 그간 노력했던 게 무너지고 위태로워.”

너무 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었다.

재희는 울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내 아들로 삼은 이상,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을 거다. 내가 다 커버해 줄 예정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마 내 얼굴 볼 낯도 없겠지. 내가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거든.”

역시나 형우는 제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울컥하고 말았다. 재희가 작게 숨을 골랐다.

“처음 무릎 꿇던 날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 녀석이 근래에 한 번 더 그 짓을 했어.”

“…….”

“결혼 발표 기사가 나기 몇 시간 전, 내가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재지 않고 곧장 무릎을 꿇더구나.”

“하아.”

결국 그녀의 뺨에 눈물이 떨어졌다. 한번 터진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끅끅 눈물을 참으며 재희가 입술을 짓이겼다.

“사정을 해 볼 생각이라고. 자기가 더 잘하겠다고. 부탁드린다고.”

“…….”

“그래서 허락했다. 그것 하나쯤은 허락해 줘도 될 것 같아서.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그 정도는 누려도 될 것 같아서. 내 아들이 되고 싶었던 이유도 너를 잡기 위해서, 그 이유 때문이었을 테니.”

재희의 고개가 떨어졌다. 작은 어깨가 애처롭게 떨린다.

그럼에도 형우는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다. 홀로 전방에 서서 싸우고 있는 제 아들이 안쓰러워서. 재희도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너를 부른 거야. 알아야 하니까. 그 녀석 성격으로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걸 아니까.”

형우의 목소리는 참 단호했다. 재희는 겨우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어떤 걸……원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뭘 원할 것 같으냐.”

그의 형형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잘 생각해 보거라. 5년 전에도, 지금도. 차현이가 너랑 있으면 참 괴로워 보이는구나.”

네게 선택권을 넘기겠다는 뜻이었다.

재희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 ▼ △

“안녕하십니까.”

집으로 가던 재희는 차현의 회사로 향했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진 탓이었다.

일전에 봤던 비서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깍듯이 인사했다.

“부사장님 집무실에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니에요. 그냥 여기서 보고 갈게요. 잠깐이면 돼요.”

그녀의 만류에 비서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구석에 선 그녀가 집무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풀어진 타이와 단추. 소매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지 차현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크게 한숨을 쉰 그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고개를 젖힌 채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차현은 눈을 감고 양손을 눈두덩이 위로 올렸다.

“…….”

무척이나 지친 모습에 억장이 무너진다.

네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재희는 안다.

아버지가 한 짓들도 모두 제 탓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왔다는 건, 그이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아…….”

“꼭, 부탁 좀 드릴게요.”

재희는 비서를 바라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알겠습니다.”

난감해하던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재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 ▼ △

집으로 돌아온 재희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벌써 몇 시간 째.

그는 오늘도 늦는 모양이었다.

창에서 내리는 달빛만이 어두운 거실을 밝히고 있었다.

‘내가 오늘 최 홍수 회장님을 만났어.’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재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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