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 말을 들은 재희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재희가 천천히 몸을 돌려 소율을 직시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소율의 표정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 같잖아서.
그녀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뭐?”
“아니 그렇잖아요. 아버지는 당장 정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딸은 메인 뉴스 자리에서 그걸 보도하겠다고 할 순 없으니까. 이 기회에 조금 쉬세요.”
“너, 진짜 정신 나갔나 보구나.”
재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 기어올라도 오냐오냐 봐 줬더니, 드디어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율은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 못해요.”
“최소율. 이만 나가는 게 좋겠어.”
듣다 못 한 국장이 불쑥 끼어들어 소율을 제지했다. 하지만 소율은 개의치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시집 잘 가셨으니 이 기회에 임신하셔도 될 것 같네요.”
“너, 지금 그 자리에 앉을 생각 하니 설레서 뵈는 게 없나 본데.”
재희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호시탐탐 그녀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후배가 바로 최소율이었다.
사실 외모가 무척 예쁘기도 했으나 제 능력을 믿고 저렇게 설치는 중이었다.
“내가 너 반드시 끌어내릴 테니 그렇게 알아.”
“그러세요, 그럼.”
소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치마를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고고한 표정을 지으며 재희를 직시했다.
“저 준비할게요, 국장님.”
소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 모습을 본 재희의 입매가 차게 비틀렸다.
소율은 고개를 까딱한 후, 곧장 국장실을 빠져나갔다.
“하.”
김 국장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재희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말아쥔 작은 주먹이 덜덜 떨렸다.
침착해야 한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여기서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 아나 대신 내가 사과할게. 마음 잘 추스르고.”
“걱정하지 마세요. 가 보겠습니다.”
국장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죄송합니다.”
차현이 깍듯이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태경의 비리 의혹으로 인해 형우의 회사까지 해가 끼치고 말았다.
태경과는 아무 일도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차현의 오산이었다.
형우가 미간을 구긴 채 차현을 직시했다.
“은태경의 생일 자리에 갔었다고.”
“네.”
“그 자리에 있던 추진수가 결국 모두 폭로한 모양이야.”
추진수라면 차현에게 직접 술을 따라 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태경의 개처럼 딸랑거리더니 결국 뒤통수를 친 듯했다.
“근데 문제는 네가 아무 짓을 하지 않았어도 은태경이 없는 말까지 지어낸 것 같은데.”
“…….”
“그게 제법 구체적이라는 거야.”
든든한 사돈을 만났다며 으스대고 싶었던 건지.
태경은 없는 말까지 해 대며 어깨에 힘을 줬다고 했다. 게다가 형우에게까지 직접 연락해 선거 비리 자금을 부탁했다고.
“좀 복잡하게 됐다.”
형우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그곳에 가지 않는 건데.
후회가 밀려왔다. 어떤 건수라도 만들지 말았어야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하필 신제품 출시를 곧 앞두고 있어 그 타격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어떻게 해결할 건지 머리 굴려 와.”
날이 선 형우의 목소리에 뭐라 답할 수 없어, 차현은 고개만 숙인 채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하아.”
차현이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아니 1년에 걸쳐서 준비한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될 지경이었다.
집무실로 간 차현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부사장님! 어떡해요?”
비서가 사색이 되어 차현에게 다가왔다.
남자와 경찰 여럿이 그의 집무실로 빠르게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검찰입니다.”
남자가 차현의 앞으로 종이를 펼쳐 들었다.
“압수수색 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소파에 앉아 있던 재희의 얼굴이 흑빛이다.
국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그 길로 곧장 방송국을 나섰다.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 뿐이라 갈 곳은 집뿐이었다.
재희는 가방에 있던 대본을 꺼내들었다.
아버지의 비리 의혹이 담긴 대본이 마지막일 줄이야.
재희는 그것을 천천히 넘겨 보았다.
한줄 한줄 읽던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현실은 더 처참했다.
“정말…….”
어쩌면 이렇게 더럽게 살았을까.
한 명이 쏘아 올린 공의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두 태경을 끊어 내기로 한 건지, 돌아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제 편이 한 명도 없는 걸까.
차기 대선, 유력 후보.
화려한 정치 인생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도저히 수습 불가능한 상황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때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스트레스성인지 속도 메스껍고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려 온종일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했다.
“하아.”
재희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에 눈가가 시큰거린다.
눈을 감자 그간 고생한 일들이 눈앞을 스쳤다. 제 속을 뒤집고 길길이 날뛰던 최소율, 그리고 저와 결혼 할 뻔한 집안들.
아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
“……아.”
핑 도는 어지럼증에 그녀가 이를 사리물었다. 재희가 숨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차현은 바쁜지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민규의 전화였다.
“네, 선배.”
-너 어디야.
“……집.”
-하.
예상했는지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속보 들어왔는데 한 번 봐봐.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재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응.”
-몸 잘 챙기고.
“고마워.”
전화를 끊은 그녀는 민규가 보낸 문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내용일지. 차마 볼 용기가 없어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크게 숨을 고른 재희가 그것을 터치하고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검찰, 은태경 비리 연루 의혹, 이형 전자 압수수색.]
기사 타이틀을 본 재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빠르게 기사를 훑은 재희의 얼굴이 결국 완전히 무너졌다.
△ ▼ △
도어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집중했다.
가까이 다가왔던 그가 다시금 멀어져갔다.
“하아.”
깊은 한숨 소리가 침실까지 들려왔다.
차현은 회사에 닥친 일들을 수습하고 수사를 받느라 몇 날 며칠 집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조차도 정말 짧은 통화로 알 수 있었다.
재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했다.
“…….”
차현은 재킷을 벗은 채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거실 등도 켜지 않은 탓에 창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잔뜩 지친 모습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때, 타이를 당겨 풀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 때문에 깼나 보네. 미안.”
그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불면증이 다시 심해졌는지, 재희는 며칠째 한숨도 자지 못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자 차현이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왜 이래.”
차현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타박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간간이 기사로도 확인하고 있었지만, 태경 탓에 그가 그간 준비했던 신제품 출시일도 미뤄졌다고 들었다.
주식 역시 폭락하긴 마찬가지.
“뭐 좀 먹었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잡자 차현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빠.”
“괜찮아.”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차현이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전혀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하는 그를 보자 또 눈가가 시큰거린다.
그간 그녀가 쌓아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속이 상했지만, 저 때문에 위기에 몰린 그를 보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나가 봐야 하는데. 너 걱정돼서 잠시 들렀어.”
“…….”
“네가 미안할 일 아니야. 그러니까…….”
결국 재희는 앞에 있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스치자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하아.”
차현이 제게 안긴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자책하며 혼자 있을 걸 알면서도 집에 들를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다 잠시 짬이 나서 샤워도 하고 얼굴도 볼 겸 들른 건데.
재희는 마치 비에 흠뻑 젖은 고양이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재희야.”
괜찮다는 한마디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혼자 있을 땐 마치 정신이 나간 듯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이제야 실감 나기 시작했다.
“흐흡.”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