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선배님, 신혼 어때요? 좋아요?”
“뭐, 글쎄.”
민경의 물음에 재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런 류의 질문은 숱하게 받았지만 아직 적응되지 않는다.
사실 좀 민망하기도 했고.
“저 원래 비혼이었거든요. 근데 선배님 보니 정말 너무너무 연애하고 싶은 거 있죠.”
“더 늦기 전에 연애해.”
“좋은 사람이 있어야 하죠. 부사장님 몇 번 뵀었는데 완전 로맨티스트가 따로 없으시더라고요. 어쩐지, 선배님 보는 눈빛이 애틋하더라니.”
“애틋하긴 무슨.”
재희의 결혼 기사가 나간 후, 보도국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결혼에는 관심도 없던 도도한 은재희가 결혼이라니.
게다가 오래전 연인이었던 차현과의 러브스토리가 드러나고 운명 같은 사랑이라며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마주치기만 하면 차현에 대해 물어보느라 아주 곤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근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선배님 2세 생각은 없으세요?”
“음. 아기?”
“네. 비주얼 커플이라 사실 아기 얼굴 엄청 예쁠 것 같거든요.”
사실 재희는 아기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딩크족에 가까울 만큼.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무척 고생했기에 내려놓을 용기도 없었다.
임신 기간에는 버티더라도 육아휴직을 하고 나면 다시 돌아오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응. 아기 생각은 없네.”
“하긴. 선배님은 능력도 좋으시니까. 임 출 육은 여자 커리어에 전혀 득 될 게 없잖아요. 이해는 돼요. 저 같아도 선배님이었음 아마 안 낳았을 것 같아요.”
민경이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은 그랬지만 과연 차현의 입장도 그녀와 같을지.
물론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할 그였으나, 부부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였기에 멋대로 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맞다. 이건 소문이긴 한데요. 최소율 선배 있잖아요. 그 김민준이랑 사귀다가 차였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얼마 전에 호텔에서 머리채 잡혀서 질질 끌려갔대요.”
“왜?”
“그건 모르죠. 근데 그 사진이 제법 많이 퍼져서 이미지에 완전 스크래치.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는 거 보면 정말 멘탈 리스펙이에요.”
그 개차반이던 김민준.
결국 최소율한테 손도 댄 모양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쯧.
재희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태경의 욕심대로라면 김민준과 결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때마침 나타나 구해 준 차현이 고맙기도 했고.
“이제 곧 선거유세 시작하죠?”
“응. 대선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여론조사 보니까 완전 지지율 압승이시던데. 대박이에요. 배경도 외모도 남편까지……. 선배님은 정말 다 가지셨네요.”
“민망하게 왜 그래.”
재희가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남들 보기에는 제 배경과 상황들이 그저 부럽기만 한 듯했다.
그간 제 맘고생을 글로 쓰면 책 한 권은 될 텐데.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국장님 콜이에요. 저 가 볼게요, 선배님!”
“그래.”
민경이 전화를 받으며 빠르게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흠.”
정말 곧 있으면 대선이었다. 대선 개표방송을 위해 방송국 역시 분주히 준비 중이었다.
뉴스 메인 앵커였지만, 민경의 말대로 그녀의 아버지 관련 일이라 재희는 이번 개표방송에서 제외되었다.
부디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기를.
워낙 서슴없이 일을 저질렀던 태경이었기에 불안한 마음이 밀려온다.
재희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복잡한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 ▼ △
“이게 얼마만의 여유야.”
“그렇게 좋아?”
“응. 좋지.”
재희가 음식을 하는 차현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일요일에도 쉬는 차현 덕에 같이 늘어지게 자고, 이제야 늦은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사실 작은 로망이 있었어.”
“뭔데?”
“왜 결혼하면 그런 거 있잖아. 이른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예쁜 앞치마 두르고 요리하고. 자고 있는 남편한테 가서 뽀뽀하면서 여보오, 일어나세요. 같이 아침 먹어요.”
콧소리를 내는 그녀가 귀여워 차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나름대로 결혼에 대한 환상이 많은 듯했다. 프러포즈도 그렇고, 종종 이렇게 말 하는 걸 보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건지.
차현은 아보카도를 반으로 가르며 답했다.
“하면 되지.”
“그러기엔 걸림돌이 너무 많더라고. 일단 남편이 주말 아침 늦게까지 자지 않아.”
“그럼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 늦게까지 자 줄게.”
“퍽이나. 이렇게 쉬는 것도 처음이면서.”
재희가 셀러리를 마요네즈에 찍어 한입 먹으며 툴툴거린다.
결혼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주말에 쉰 건 처음이었다.
밤낮없이, 주말 없이 일하는 탓에 그의 얼굴을 보는것도 쉽지 않았으니까.
“그럼 다음에 쉴 때 해 주면 되겠네.”
“아냐.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요리를 못하더라고.”
“푸흡.”
“웃어?”
결국 차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은재희는 참 요리를 못하는 편이었다는 것을.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쉬운 요리를 망쳐 놓는 걸 보고는 그때 깨달았다. 이 정도로 요리에 재주가 없을 수도 있구나.
그래서 오늘도 그녀 대신 그가 준비 중이었다.
“너무 웃는다. 못할 수도 있지.”
“내가 하면 되니까 괜찮아.”
“그치?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지 뭐.”
“다 됐다.”
“우아!”
그때 그녀의 앞에 돌돌 잘 말아 놓은 오일파스타가 놓였다.
그 옆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샐러드까지.
알싸한 마늘 향이 코끝을 스치자 갑자기 허기가 진다.
“잘 먹겠습니다.”
“천천히 먹어.”
포크를 들며 재희가 해사하게 웃었다. 맞은 편에 앉은 차현도 스푼과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음, 최고네, 이차현 씨. 오빠 요리 너무 먹고 싶더라. 내가 하면 이 맛이 안 나더라고.”
“많이 먹어.”
“그래서 누룽지 먹고 펑펑 울었잖아.”
그와 냉전 중이던 그때, 차현이 해 준 누룽지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었다.
너무 그리웠던 음식이어서.
아니, 그리웠던 건 음식이 아니라 이차현일지도 모른다.
“그거, 너랑 헤어지고 그날 처음 만든 건데.”
“진짜?”
차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해 먹고 싶지도 않았으나, 혹시나 음식을 보면 재희가 생각날까 봐.
그녀와의 추억이 무척 많았기에 차현도 외면하려고 부단히 애써야 했다.
“갑자기 누룽지도 먹고 싶네.”
“저녁에 해 줄게.”
좋다는 듯 재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신 재희가 눈을 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차현이 그런 그녀를 보며 눈짓했다.
“말해. 할 말 있으면.”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뭔데?”
말하라는 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민경이 그녀에게 했던 말 때문에 내내 고민하던 참이었다.
이차현과 은재희의 2세.
아이 생각이 전혀 없는 자신과 달리 차현의 입장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음…….”
생각해 보면, 연애를 할 때 그는 아기를 무척 예뻐하는 편이었다.
음식점에서 다른 테이블에 있는 아기를 봐도,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애들만 봐도 얼굴에 미소가 번지던 그였다.
“아기.”
겨우 맴돌던 그 단어를 밖으로 내뱉자 차현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오빠 생각이 궁금해서.”
그녀의 물음에 차현은 곧장 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재희는 그의 입술을 직시하며 답을 기다렸다.
“네 생각은?”
“오빠 생각 물은 거잖아.”
“그러니까. 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차현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탄산수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입가를 정리했다.
제법 진지해진 그의 표정에 괜스레 심장이 콩닥거린다.
“물어보기까지 너도 고민 많이 했을 거 아냐.”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문제였다.
재희가 시선을 내려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며 입을 열었다.
“나는 반반.”
“반반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잘 모르겠어.”
“그 정도로 고민인 거면 안 낳는 게 맞아.”
생각보다 그의 답은 단호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마음인 건지.
안 낳는 게 낫다는 의견에 괜스레 섭섭한 마음이 밀려왔다.
“오빠는 괜찮아?”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하지. 내가 육아를 해도, 낳는 건 네가 하는 거잖아.”
그간 그녀가 노력한 것들이 혹시나 날아갈지도 모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차현 역시 알기에 선뜻 낳고 싶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희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번졌다.
“왜, 섭섭해?”
“그냥 좀…… 고민 많이 했는데도 잘 모르겠어.”
“복귀하면 괜찮은데. 그게 아닐까 봐.”
“그건 나도 알지.”
“그러니까 네 마음이 내킬 때 하는 게 좋아. 애쓸 필요 없어. 난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해.”
고민하는 그녀를 보며 차현이 옅은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