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우리 사위 왔는가. 어서 오게나. ”
문을 연 차현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본사에서 출발한 차현은 태경이 말해 준 곳에 도착했다. 직원이 안내한 곳에는 한창 술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언뜻 둘러봐도 눈에 익은 유명 정치인들이 앉아 있었다.
차현은 룸으로 들어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차현입니다.”
“어서 앉아. 응?”
태경이 씨익 웃으며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보다니 너무 신기하네. 어서 와요.”
“실물이 더 훤하구먼. 내 옆에 앉지 그래요.”
그의 인사에 서로 앞다투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자 태경이 보란 듯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어딜. 우리 사위를. 이리 와서 앉아.”
차마 다른 곳에 앉기도 뭐해 차현이 재킷의 단추를 풀고는 태경의 옆에 착석했다.
이미 술을 거하게 마신 건지 태경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차현은 애써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한 잔 줘도 되겠습니까.”
태경과 같은 당에 있는 삼선을 한 국회의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럼 그럼. 내 생일이라고 우리 이 부사장 특별히 시간 내서 온 건데. 괜찮지?”
태경은 말은 그리하면서도 이미 차현의 손에 잔을 쥐여 준 상태였다.
차현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우리 재희가 잘나기도 했지만, 사위도 아주 완벽하고.”
뭐라는 건지.
술에 잔뜩 취해 태경은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차현은 몸을 돌려 술을 단숨에 마셨다.
“나도 한 잔 드리지. 반가워요. 국회의원 추진수예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날 혹시 아는가?”
“물론입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유명한 정치인들이기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술을 받은 차현은 빠르게 잔을 비웠다.
여덟 명의 관심이 오로지 차현에게로 쏟아졌다.
사실 이런 관심은 아무 상관 없었으나 자랑스러워하는 태경의 태도는 보고 있기 역겨울 정도였다.
“이번 대선 때 우리 사위가 있어서 아주 든든할 것 같아.”
차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태경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차현의 미간이 슬쩍 일그러졌다.
“이형 그룹이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아주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혼을 서둘렀지. 우리 사위 덕 좀 보려고.”
태경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지원할 계획이 없었다.
이만큼 회사를 일군 형우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차현 역시 은태경만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떠벌리는 태경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마도 으스대기 위해 자신을 이 자리에 부른 모양이었다.
“기사 보니 재희랑도 만나던 사이인가 보던데.”
“그랬지. 근데 그 녀석이 헤어지고도 못 잊었는지 선볼 때마다 싫다고 하더라고. 수인 그룹에 시집 보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그, 그 양아치 새끼 정말.”
옆에서 듣고 있던 차현이 이를 사리물었다.
제 스캔들을 덮기 위해 딸을 팔아넘기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저러는 걸 보자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딸을 이용하면서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선 전에 우리 이형우 회장 한 번 만나 볼 생각일세. 그 양반이 냉랭해 보여도 얼마나 살가운지 몰라.”
“의원님.”
가만히 듣고만 있던 차현이 태경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태경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차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서방, 술 한 잔 줘. 전화 한 통에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오고. 내가 사위 복이 아주 많아.”
“…….”
뻔뻔한 행태에 욕이 차오른다.
차현은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태경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정말 부러워서. 사위 없는 사람은 살겠나.”
“그러게 말일세. 자랑도 좀 정도껏 해야지.”
“생일이니 이해 좀 해 주게나. 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차현은 주먹을 말아 쥐며 자리를 지켜야 했다.
△ ▼ △
태경은 굳이 차현과 함께 가겠다고 했다. 차현은 어쩔 수 없이 태경과 함께 평창동으로 향했다.
차 안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차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섞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오늘 사위 덕에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지 뭐야.”
어지간히 만족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으스대고 자랑을 해댔으니.
태경은 차현의 기분,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떠들어댔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저 사람들의 부러움이 필요한 듯했다.
“자네가 이만큼 잘된 게 다 내 덕이기도 하니 나 너무 원망하지 말게.”
“참 뻔뻔하시네요.”
“많이 컸네. 맞받아칠 줄도 알고.”
술을 그리 많이 마셔도 태경은 제법 멀쩡해 보였다.
말투도 또렷한 걸 보니 취한 건 연기였던 건지. 그사이 깬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지원 기대하겠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럴 마음 전혀 없습니다. 기대 접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대통령이 되면 자네도 분명 좋은 부분이 있을 텐데. 참 인정머리하고는.”
“뭔가 착각하고 계신가 본데.”
차현이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경을 직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형형한 눈빛이 태경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태경 역시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 하나 먼저 피하지 않는.
“그쪽한테 관심 없고, 고마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재희,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니 김칫국은 그만 드시죠.”
제법 노골적인 비난에도 태경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던 사람이라 그런지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그렇게 말하면 좀 낫나?”
“은 의원님.”
“부정해 봐야, 재희가 내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적당히 맞춰 주는 게, 이형 그룹에도 좋을 거야.”
“그 무엇도 드릴 생각 없습니다.”
“과연 자네 뜻대로 될까.”
태경은 사악한 미소를 흘렸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명치 끝이 답답할 만큼 짜증이 치솟는다.
그냥 재희의 말대로 가지 않는 건데.
은미의 선물도 있고 첫 생일이라 거절하지 못한 결과가 이 꼴이라니.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앞으로 다시는 찾아뵐 일 없을 겁니다.”
“그래그래. 뜻대로 해.”
결국 차현은 입을 다물었다.
심상치 않은 대화에 세민은 운전하며 룸미러로 차현의 안색을 살펴야 했다.
△ ▼ △
“술 마셨어?”
집에 들어서자 퇴근해서 쉬고 있던 재희가 쪼르르 달려 나와 그에게 다가왔다.
태경을 내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긴장이 확 풀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다른 날보다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다.
“응.”
“얼마나 마신 거야?”
그에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하.”
구두를 벗고 들어선 그가 잠시 휘청거리며 벽을 손으로 짚었다.
“오빠!”
재희가 다소 놀란 얼굴로 그의 팔을 부축했다. 차현은 주량이 제법 센 편이었기에 오늘처럼 취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 있어?”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재희가 걱정 섞인 목소리를 냈다.
술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어.”
차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술을 어찌나 많이 주는지.
거절할 수 없어 다 마셨더니 주량을 훨씬 넘기고 말았다.
게다가 편한 자리도 아니고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아 안주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제대로 걸어 봐.”
“하아.”
휘청휘청 걷던 그가 겨우 거실에 있는 소파에 털썩 드러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 좀 줄까? 아니면 꿀물…….”
차현은 옆에서 쫑알쫑알 말하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재희가 그의 너른 가슴에 풀썩 쓰러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심상치 않은 눈빛에 재희는 선뜻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재희야.”
“듣고 있어. 말해.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지.”
“…….”
“혹시 아빠랑 관련된 일이야? 그래?”
“아니야. 그런 거.”
곧장 유추하는 그녀 때문에 차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차현만큼이나 재희 역시 그의 심리 변화에 민감한 편이었다.
차현이 잡은 손을 조금 더 꽉 그러쥐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오빠.”
“저녁은, 먹었어?”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표정도 분위기도,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차현은 절대 말해 주지 않을 눈치였다.
혹시 내일이 태경의 생일이라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닐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뭐가.”
“기분 안 좋잖아, 지금. 아니면……회장님께 혼난 건가?”
가만히 하나씩 이유를 찾는 그녀가 귀여워 차현이 재희를 당겨 안았다.
재희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안겨 가슴에 뺨을 가져다 댔다.
차현은 다짐했다.
재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또 자책하며 미안해할 게 눈에 훤했기 때문에.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