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걸로 할게요.”
“이건 너무…….”
차현이 거울 속 제 모습을 훑으며 말끝을 흐렸다.
평소 차현과 재희는 의상은 포멀한 스타일이었다.
직업적인 이유에서였다. 아나운서인 재희도 그랬지만 차현도 회사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슈트만 챙겨입었다.
“잘 어울리는데 왜 그래?”
위풍당당한 재희의 모습에 차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레이컬러의 치노팬츠, 베이지컬러의 니트.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스니커즈까지.
잠시 들를 곳이 있다며 재희는 가로수길에 있는 편집숍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이것저것 그의 몸 앞에 대 보고는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옷이 오늘 네 스타일이랑도 잘 어울리긴 하네.”
“옷이 너어어무 고리타분해.”
“뭐?”
“누가 부사장 아니랄까 봐.”
재희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슈트핏은 기가 막힐 만큼 좋은 편이긴 했다. 멋있기도 했고.
하지만 답답한 슈트를 입고 데이트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어서 가. 응?”
빠르게 계산하고 온 그녀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젖혔다.
한껏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절로 미소가 나온다. 온종일 쌓였던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차현과 재희는 함께 거리로 나섰다.
드라이브나 하며 바람을 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재희는 이렇게 손을 잡고 걷기를 원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다행히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거 같지?”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응. 아니야?”
정말 모르는 건지.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흘긋거리는 게 다 보이는데.
아니면 신경을 안 쓰는 건지도 모른다.
재희는 나름 평소의 분위기와 다르게 옷도 캐주얼하게 입고, 머리도 하나로 묶은 채였다.
“사실 뭐, 알아보면 어때. 어차피 여기 연예인들 발에 채도록 다니잖아. 아나운서를 누가 신경 쓴다고.”
“근데 우리 어디가?”
“그냥 좀 걸으면서 쇼핑하고 싶어서.”
재희가 맞잡은 손을 위로 들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찌르르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순간을 위해 몇 년을 버텼던,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서.
잠도 못 잘 만큼 피곤해도 그 모든 게 상쇄될 만큼. 행복했다.
“뭐 사고 싶은데. 내가 다 사 줄게.”
“오, 정말? 나 저기 저 건물.”
재희가 앞에 보이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손가락질하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차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건물?”
“왜? 이미 오빠 거야?”
“아니. 그 옆에 건물이 내 거야.”
“…….”
그가 말한 것은 그녀가 가리킨 것보다 더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재희가 입술을 달싹이다 눈매를 가늘게 떴다.
“거짓말. 저 건물,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거야. 내가 지난번에 지나가다 봤거든.”
“응. 회장님이 선물로 지어 주셨어.”
“허.”
“건물 이름이 CH.Lee인데. 가서 볼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한창 공사 중이던 건물은 얼마 전 완공이 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차현의 것이었다니.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자, 차현이 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직접 가서 봐. 저녁도 저기서 먹자.”
차현이 해사하게 미소를 그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세상에…….”
차현과 재희는 2층에 있는 철판요리 전문점 테판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차현의 방문에 지배인은 몹시 놀란 눈치였다.
재희가 여기저기 구경하는 사이 차현은 관리자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장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이 깍듯이 인사했다.
예약 없이는 오기 힘든 곳이라고 언뜻 들은 것 같은데.
자신의 허무맹랑한 말 한마디에 이곳으로 단숨에 온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재희가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나도 한번 와 보고 싶긴 했어. 시간이 없어서 못 왔거든.”
그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이형 그룹에서 새롭게 뛰어든 사업 중 하나였다. 외식에도 손을 뻗고 싶어 하는 형우의 뜻에 따라 차현이 직접 맡아 진행 중인 프로젝트였다.
“이것도 이형 거였구나.”
“응. 오픈 전엔 시식도 많이 했었는데, 오픈하고는 한 번도 못 와서.”
“…….”
가만히 둘러보던 재희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잔뜩 지친 그의 얼굴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차현에게 맡긴 일들만 봐도 이 회장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신뢰에 보답하고 싶어 차현은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중인 듯했다.
“미안해.”
갑작스러운 그녀의 사과에 차현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뭐가.”
“바쁘다고 투정 부려서.”
그런 줄도 모르고, 늦게 끝난다고 심술부린 제 모습이 참 한심할 지경이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복합적인 감정에 울컥 목이 메어 왔다.
차현 혼자 감당했을 그 시간이 너무 미안해서.
“못 챙긴 거 사실인데 뭐.”
“아니, 나는…….”
“괜찮아.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차현이 옆에 앉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말대로 사실 물 한 모금 마실 시간 없이 바쁘긴 했다.
한국에 들어온 이상 눈에 보일 만한 성과를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제 능력을, 아니 제 능력보다 더한 결과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이벤트면 충분해.”
“이벤트?”
“응. 드레스룸, 이벤트.”
“……정말.”
무슨 말인지 눈치챈 재희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다른 때보다 더 격정적이었던 그의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드레스룸의 전신 거울을 그렇게 쓸 줄은.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를 만큼 민망한 일이었다.
“애피타이저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셰프가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차현이 눈짓하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재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뭐 했어?”
“음, 오전 내내 잤어. 누구 덕분에.”
아침에 그에게 시달린 탓에 침대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재희는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정신없이 자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곤 얼마나 놀랐는지.
오전이 그대로 날아가고 말았다.
“뭘 얼마나 했다고.”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그의 태도에 재희는 울컥하고 말았다.
“오전에 예약해 둔 피부숍도 못 갔다니까? 정말……”
“그래서 딱 대답해.”
“뭐를?”
그가 묘한 미소를 그리며 그녀를 직시했다. 그 빤한 시선에 불안한 예감이 몸을 휘감았다.
“좋았어, 안 좋았어?”
“안…….”
“대답 잘해야 할 텐데.”
셰프가 그녀와 차현의 앞에 음식을 놓아주었다.
재희가 빠르게 입꼬리를 당기며 눈매를 접어 웃었다.
“감사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전부터 은 아나운서님 오랜 팬이었거든요.”
“어머, 감사해요.”
난처한 상황을 피하며 재희가 득달같이 답했다. 조금 과한 리액션에 차현이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이따 사진 한 장 찍어 주실 수 있으신지…….”
“물론이에요!”
평소 재희는 조금은 과하다 싶을 만큼 냉랭한 편이었다.
그런데 차현과 관련된 곳이라 그런지 친절하게 답해 주고 있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십시오.”
애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음식이 줄지어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물론 화려한 철판요리 스킬에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재희의 얼굴이 오랜만에 밝다.
“그래서 조금 전에 물은 거 대답이나 해.”
“뭐를?”
“좋았어, 안 좋았어?”
뭘 자꾸 묻고. 딱 보면 모르나.
굳이 듣고야 말겠다는 그의 태도에 민망함은 그녀의 몫이었다.
“알면서, 뭘 물어?”
입술을 댓 발 내민 채 재희가 툴툴거린다. 사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민망해 하는 걸 알면서도 꼭 좋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다.
“듣고 싶으니까.”
“맛있다. 여기. 오빠, 엄청 맛있네?”
창피한지 그녀의 뺨이 또 붉게 물들었다. 숨기지 못하고 잔뜩 티 내는 그녀가 무척 귀여워 차현은 웃음을 꾹 참았다.
“누가 말려, 너를. 많이 먹어. 점심은 먹은 거야?”
“응.”
“뭐 먹었는데?”
“베이글.”
쯧.
메뉴를 들은 차현이 낮게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마른 그녀는 요새 무척 더 마른 상태였다. 손목이 너무 가늘어 부러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어제 내가 크림치즈 새로 샀는데 너무 맛있더라고. 오빠 무화과 좋아하지?”
“응.”
“무화과 하나랑 호두 크림치즈 샀어. 무화과 진짜 맛있더라.”
쫑알쫑알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차현이 작게 웃었다.
“와인 한잔할래?”
“응. 마시자.”
맛있겠다.
재희가 중얼거리며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다음 메뉴를 기다렸다. 그래도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차현 역시 기분이 좋다.
메인 메뉴인 스테이크가 나오고 잠시 셰프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다음 주 주말에, 아버님 생신이시던데…….”
내내 고민하던 차현이 결국 그 말을 입에 올렸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던 재희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스무 살이 되고 독립한 후, 1년 중 본가에 가는 날은 딱 한 번이었다.
태경의 생일.
명절에도 들르지 않던 본가였으나 태경의 생일에는 꼭 와야 한다는 경린의 닦달 때문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식의 화기애애한 가족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재희는 알고 있었다.
“안 갈 거야.”
“재희야.”
“그러니까 오빠도 신경 쓰지 마.”
단호한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