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진짜 이렇게 바빠질 줄 몰랐어.”
“아쉬워?”
“……응.”
재희는 입을 꼭 다문 채 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솔직한 답에 차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방금같이 솔직하게 말하는 건 참 드문 일이었다.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다.
“왜 웃어? 아니, 너무하잖아.”
“뭐가 너무해.”
“신혼인데, 평일도 그렇고 주말도 그렇고. 아무리 부사장이래도 그렇지.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냐?”
웃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결혼한 지 2주 차.
재희도 평일에는 뉴스 때문에 많이 바빴지만, 차현은 훨씬 심했다.
자정을 넘어야 퇴근할 만큼.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그가 출근하기 전 오전 시간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듯했다.
“알았어. 오늘은 시간 좀 내볼게.”
그의 말에 타이를 묶던 그녀가 슬쩍 시선을 들었다. 차현은 타이를 매어 주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일찍 올 건데?”
너무 바쁜 그에게 조금은 섭섭하던 참이었다. 슬쩍 눈을 흘기자 차현이 입을 열었다.
“저녁 같이 먹어.”
“정말이지.”
“응.”
차현은 머릿속으로 오늘 스케줄을 빠르게 계산했다. 처리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면 대략 5시쯤 될 것 같았다.
그쯤 퇴근하면 얼추 저녁 먹을 시간과 맞을 테니.
그제야 그녀의 구겨졌던 미간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러고는 다시 타이를 매듭짓기 시작했다.
촉.
“……뽀뽀 금지야.”
갑자기 입술을 부딪친 차현에게 재희가 볼멘소리를 냈다.
표정은 살짝 유해졌지만, 그녀는 단단히 삐진 채였다. 그래도 늦게 온다고 서운해하고, 감정 표현을 하는 그녀를 보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은재희로 돌아온 것 같아서.
“뽀뽀는 왜 금지래?”
“타이 다 됐어.”
“답 안 해 줄 거야?”
그의 어깨를 탁탁 털어 내며 답을 회피하자 차현이 재희의 허리를 가볍게 감아 당겼다. 몸이 순식간에 맞붙자 차현의 짙은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그걸로 나 삐진 거 달래는 기분이라. 별로거든.”
“맞는데.”
“거봐. 그래서 싫다는 거야.”
너무 솔직히 답하는 그에게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차현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스킨십을 하고 나면 기분이 풀린다는 것을.
재희가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쓱 밀자 그가 허리를 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설마, 이유가 그것만일까.”
“됐어. 이미 늦었다고.”
오랜만에 툴툴거리는 은재희를 보자 입꼬리가 눈치도 없이 자꾸 씰룩인다.
차현은 애써 꾹 누르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재희가 반대로 고개를 휙 돌렸다.
“금지래도?”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차현이 왼쪽 손목으로 시선을 내려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재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부사장님.
핸드폰 너머로 세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전 회의, 두 시간만 미루죠.”
-아, 음…… 저기 오늘 회의가…….
“알아요. 그러니 지금 전화한 겁니다. 미리 올 필요 없고, 홍 비서도 두 시간 후에 집 앞에 대기하고 있으면 됩니다.”
세민의 답을 듣지 않은 채 차현은 통화를 종료했다.
두 시간을 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궁금한 듯 물었다.
“오늘, 그럼 일찍 퇴근 못 해?”
“약속했잖아. 저녁 먹는다고.”
“그럼 회의는 왜 미뤘어?”
그가 핸드폰을 서랍장 위에 내려놓고는 그녀가 묶었던 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셔츠 단추도 하나씩 푸르기 시작했다.
다른 한쪽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은 상태였다.
그녀와 눈을 맞춘 채로.
“어제 너무 피곤해 보이길래. 배려한 건데.”
“…….”
“그러지 말걸 그랬어.”
차현의 한쪽 눈썹이 비딱하게 올라섰다. 그사이 그의 셔츠는 앞섶이 다 벌어져 있었다.
꼴깍.
재희가 입술을 감쳐 물며 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 봐야지?”
나긋하지만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재희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조금 더 밀었지만,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뭘 회의, 까지 미뤄. 밤, 오늘 밤에 하면 되지.”
당황한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뭘 할 건데.”
“……아으.”
차현이 곧장 그녀의 목에 입술을 내렸다. 뜨거운 숨이 훅 끼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희가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쥐며 입술을 짓이겼다.
“잠, 깐만.”
“오늘은 여기서 하자.”
그녀의 살갗에 입술을 댄 채 차현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하다니.
이곳은 햇살이 훤히 들어오는 드레스 룸이었다. 재희는 눈을 꾹 감고 주위에 무엇이 있나 떠올렸다.
뭐, 가 있었더라. 적당한 장소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
“읏!”
그때 그의 손이 치마 밑단 속으로 불쑥 밀려 들어왔다.
“오,빠!”
“응?”
되묻는 목소리엔 꿀을 바른 듯했다. 한껏 당황한 그녀와는 달리 그는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찔한 감각에 재희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그를 다급히 불렀다.
“침, 침대로 가…….”
차현이 피식 웃으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잔뜩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자 절로 침이 넘어간다. 훤한 아침이라 그런지 잘생긴 얼굴이 더 돋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여기도 좋은데 왜. 아직 여기서 한 번도 안 했잖아.”
“밝아서 싫어.”
평소에도 밝은 건 질색하던 그녀였다.
연애할 때나, 다시 재회한 후에나.
그래서 그녀의 취향을 존중하여 침실은 암막 커튼으로 모조리 교체한 상황이었다.
차현 역시 알고 있었다.
“난 환한 데가 좋은데.”
“왜?”
“예쁜 얼굴 좀 자세히 보고 싶어서.”
“허.”
너무 솔직한 답에 당황한 재희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차현이 씨익 미소를 그리며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읏!”
“오늘은 네가 양보해.”
그 한마디만 남긴 채, 차현은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햇살이 유독 눈부신, 주말의 아침이었다.
△ ▼ △
-10분 후 도착.
저녁은 꼭 같이 먹겠다던 그는 정말 6시 반쯤 전화를 했다.
바쁜 그에게 투덜거린 것 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올 수 있으니 왔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알았어.”
-뭐 하고 싶어?
“글쎄.”
딱히 생각해 보진 않았다.
그저 얼굴 보고 밥 먹고 싶다는 생각뿐.
평일엔 늦게 와도 이해하지만, 주말까지 귀가가 늦으니 조금은, 아니 많이 섭섭하던 참이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생각해 봐.
“응.”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 내려오고.
“알았어.”
재희는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더 매무새를 확인했다.
이런 데이트는 참 오랜만이었다.
“꼭 연애하는 것 같다.”
재희가 거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5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데이트 전, 한껏 꾸미고 차현을 기다렸던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오른다.
가방을 든 그녀는 빠르게 현관으로 향했다.
“편한 신발로 신어야지.”
그와 손잡고 산책도 하고 싶어 재희는 신발장에서 일부러 편한 신발로 골라 신었다.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얼추 도착할 시간이 된 듯했다.
재희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타.”
차현이 조수석 쪽 창을 내리며 옅게 웃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건지, 그의 차는 주차장 입구 쪽에 잠시 정차 중이었다. 재희가 조수석에 냉큼 올라타며 벨트를 맸다.
“언제 왔어?”
“지금 막.”
그가 답을 하며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심장이 말랑거리는 기분이다. 빌라 주차장 밖으로 나오자 벌써 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꿈 같아.”
재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앞이 안 보이는 터널 속에 서서 혼자 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야 빛이 보이는 밖으로 나오는 기분이었다.
이차현의 따듯한 손을 잡고.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솔직해?”
“은재희는 솔직한 게 매력이지.”
“치이.”
그 말이 듣기 좋아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그때 무릎 위에 있는 그녀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더해졌다.
차현이 그녀의 손을 잡은 탓이었다. 재희는 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좀 불안해.”
“뭐가?”
마치 이 꿈이 깰 것만 같아서.
마냥 행복하기만 한 현실이 금세 깨질 것만 같아서.
행복한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한 마음이 공존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차현이 재희의 손을 깍지 끼워 단단히 잡았다.
“불안해할 거 없어.”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