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비단 지금의 일만이 아니었다.
그와 연애를 하던 시절에도 엄마와 연락하면 이보다 더 우울해하던 그녀였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식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자 사실 화가 나기도 했다.
“사모님, 아니……어머님 되게 좋아 보이시더라.”
재희가 그를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가슴으로 품은 아들이지만, 차현에 대한 은미의 마음은 진심 같아 보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너희만 행복하게 살면 된다는 말에서 은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응. 좋은 분이셔.”
“참 다행이다.”
그래도 그녀가 곁에 없던 시간 동안 그를 진심으로 위해 주는 은미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그 허전함이 채워지기를.
“재희야.”
“하암. 너무 피곤하네. 오빠, 나 잘게. 고마워.”
재희는 말을 하고는 곧장 눈을 감았다.
차라리 빨리 잠에 들었으면.
조금 더 대화하면 이 속상한 마음을 그에게 하소연하고 싶을 것 같아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안 그래도 지금 저와 태경 때문에 그 역시 심란할 텐데 더 보태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 잘 자.”
그녀의 답에 차현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외롭지 않다.
옆에서 다독여 주는 그가 있어서.
다행히 금세 잠이 들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차현이 턱시도를 입고 나오자 직원이 빠르게 다가가 그의 목에 보타이를 매 주었다.
“턱시도가 블랙이라 보타이는 조금 다르게 포인트를 줄까 하다가, 너무 화려한 것 같아서 같은 컬러로 맞춰 보았어요.”
평소 형우의 슈트를 만들어 주는 슈트 장인이 그의 턱시도를 제작했다.
그에게 의사를 물어보자 차현이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사실 뭐든 잘 어울리시긴 하는데……. 그래도 블랙이 조금 더 깔끔한 것 같네요.”
모든 마무리를 한 후 장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요.”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온 재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일이 바빠서일까. 그의 턱선은 조금 더 날렵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운동은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몸은 더 좋아진 상태였다.
슈트핏이 모델보다도 좋은 것 같은데.
방송국에서 일하는 그녀였기에 연예인도 자주 보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차현의 피지컬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침 닦아.”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차현이 재희의 앞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재희가 민망해하며 입술을 빠르게 감쳐 물었다. 그러자 그가 픽 웃으며 재킷에 팔을 껴입었다.
“약 20분 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호텔까지 예상 시간은 30분 정도. 그리고 도착하시면 곧장 사진을 찍은 후, 로비로 이동하여 하객을 맞으시면 됩니다.”
일에 대해서는 워낙 예민한 그였기에 세민은 분 단위로 그에게 보고를 하는 편이었다.
오늘도 그의 곁에서 일정을 읊으며 스케줄을 관리 중이었다.
“회장님이랑 어머니는?”
“곧장 호텔로 가신다고 윤 비서님께 연락받았습니다.”
차현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 조금만 더 해야 해서요. 이쪽에 잠시 앉아 주세요.”
직원이 미소를 그리며 차현을 데리고 갔다.
새벽에 드레스숍과 메이크업숍의 직원들이 차현의 집에 도착했다. 숍으로 이동하는 번거로움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느새 모든 세팅을 마친 재희의 머리 위에 반짝이는 티아라가 얹어졌다.
“진짜 너무 예뻐요.”
직원이 재희를 보며 감탄했다.
티아라는 차현이 직접 디자이너에게 의뢰한 것이라고 했다. 반짝이는 레이스의 베일이 우아함을 배가시켰다.
“헤어도 찰떡이고. 정말…….”
보통 올림머리를 하는 신부들과는 달리 재희는 긴 머리를 늘어트린 채였다.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던 재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내가 드레스를 잘 골랐네.”
재희를 바라보는 차현의 눈동자에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그녀의 예쁜 라인을 잘 부각시켜 줄 수 있는 머메이드 드레스로 픽했는데, 역시나 예상은 적중했다.
“내가 예쁜 거야.”
재희가 눈을 흘기며 받아치자 차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하시겠어.”
“진심인데.”
이걸 아무나 소화하는 줄 아나.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재희는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이제 제법 많이 편해진 모습이었다.
“맞아. 네가 예뻐서 그래.”
“치.”
옜다 칭찬. 뭐 이런 건가.
재희가 코를 찡긋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8cm의 웨딩 슈즈를 신었음에도 고개를 젖혀야 차현을 볼 수 있을 만큼 키 차이가 상당하다.
차현이 그녀의 작은 손을 그러쥐었다.
“가자. 결혼하러.”
고개를 끄덕이며 재희가 미소를 그렸다.
△ ▼ △
결혼식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됐다.
정, 재계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호화로운 결혼식이었다.
게다가 이형우 회장의 양아들과 현존하는 톱 아나운서 은재희가 결혼한다는 점에서 이목이 집중되었다.
“상견례 때 이후 두 번째 뵙습니다.”
태경이 형우에게 다가가 거들먹거리며 인사를 했다. 차기 유력 대선 주자라고 하지만 이렇게 겸손 따위 모르는 얼굴이라니.
형우가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앞으로도 뵐 일 있겠습니까.”
날이 선 한마디였다.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객에게 인사하기 위해 옆에 서 있던 차현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상견례 자리도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아 무척 불편했는데.
결국 오늘도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뭐 청와대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뵙지 싶은데요.”
“저는 괜한 오해 사는 행동은 안 하는 편이어서요. 사양하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이런 사람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말하는 것만 봐도 경솔한 성격임은 분명했다. 엮이고 싶지 않아 형우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후.”
차현이 주먹을 말아쥐며 한숨을 쉬었다.
형우는 정말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어느 것 하나 책잡히지 않게, 깨끗한 경영을 우선시하는. 더불어 차현에게도 그렇게 일하라 가르치기도 했다.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문제 될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런 형우와 정반대의 사람이 태경이었다.
눈앞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물불 가리지 않는.
“여보. 좋은 날인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은미가 차현의 안색을 살피며 작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형우가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차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너의 뜻이라 결혼시킨다는 뜻 같아 심장에 돌을 얹은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인물 참 훤하네.”
은미가 차현의 매무새를 다시 정리해 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정갈하게 정리한 올림머리, 단아한 한복. 손에 끼운 가락지. 그리고 작은 백까지.
은미는 오늘도 무척 단아한 모습이었다.
“마음 쓰지 마. 응?”
차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은 무척 많았다.
끝도 없이 늘어진 화환, 그리고 얼굴을 비추기 위해 일부러 자리한 사람들까지.
북적이는 로비만 봐도 두 집안의 결합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신없는 한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다 되자 모두 홀에 들어가 대기했다.
그의 혼주석은 형우와 은미가, 그리고 재희의 혼주석은 태경과 새엄마인 경린이 자리했다.
차현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웨딩 로드 끝에 서서 대기했다.
이내 그에게 눈부신 조명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차현에게 집중되었다.
“신랑 입장!! 큰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차현이 미소를 머금은 채, 웨딩 로드를 걸었다. 하객들의 박수 소리가 웅장한 홀을 가득 채웠다.
단상 앞에서 주례에게 인사한 그는 뒤로 돌아 정면을 향해 섰다.
그 웨딩 로드 끝에는 차현이 여전히 사랑하는, 재희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서로를 향한 눈빛만큼은 진심이었다.
몇 년을 기다린 결과 다시 이렇게 마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 한구석이 저릿하다.
“오늘의 주인공,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 입장!”
사회자의 외침에 재희가 크게 숨을 골랐다.
그녀는 태경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점점 차현이 가까워져 온다.
시공간이 멈춘 듯, 오로지 시야에는 차현만이 가득했다.
계단에서 내려와 앞까지 마중 나온 그가 그녀를 향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하네.”
태경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현에게 인사했다.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그가 재희의 손을 조심히 그러쥐었다. 그의 손을 마주 잡자 그간의 일들이 눈앞을 스쳤다.
“천천히 걸어.”
워낙 드레스가 긴 탓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단단히 잡은 차현의 손이 이토록 든든할 줄은.
재희가 그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짓자 차현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의 손을 잡고 걷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그토록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