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차현과의 관계도, 일도.
그래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재희야!”
갑자기 들려온 이름에 재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 결국 다시 또 찾아온 듯했다. 시선도 주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한숙이 득달같이 달려와 재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허.”
오랜만에 본 한숙의 꼴은 참담했다.
그때는 맞고 와서 얼굴이 퉁퉁 부어 있더니. 오늘은 입고 있는 옷조차도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여전히 입술은 다 터진 채였다.
“엄마 좀 도와줘. 제발.”
한숙이 눈물을 글썽이며 재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 한숙은 끊임없이 돈을 요구해 왔다.
대학생 딸이 가진 게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겨우 독립할 정도의 돈만 갖고 있던 그녀였지만 제 엄마의 꼴이 너무 안쓰러워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도와주곤 했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걸 보니.
“그만 찾아와요.”
“너 결혼한다며. 엄마는 혼주석에 앉지도 못하는데. 어쩜 이렇게 매정해.”
“혼주석? 엄마가 나한테 뭘 해 줬는데. 낳아 놓고 버리고 나간 주제에!”
“독한 건 지 애비 닮아서 말하는 본새 좀 봐. 너 정말 이럴 거야?”
악에 받친 듯 부들부들 떠는 한숙을 보자 눈앞이 하얘졌다.
집 주소를 알려 주지 않았기에 방송국으로 찾아오는 게 문제였다. 그때의 난동 이후로 로비조차 출입하지 못하는지 한숙은 지상 주차장에서 내내 기다린 듯했다.
재희를 알아본 사람들이 흘긋거리며 지나갔다.
그녀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한테 줄 돈 없어요. 이제.”
“결혼식장으로 찾아가도 되니?”
“협박하러 오셨나 보네요.”
“그만큼 절박한 건 안 보이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참 서글퍼졌다. 독기에 가득 찬 눈빛을 보자 은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우아하고 기품 있던.
제 엄마와는 정말 다른 모습이었다.
“그 남자랑 헤어져요. 계속 이딴 식으로 살고 싶지 않으면.”
“너도 남자 못 잊은 주제에, 누구더러 헤어지래? 결혼할 그 남자, 전에 만났던 사이였다며.”
“…….”
역시나 기사를 다 본 듯했다.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아 재희는 한숙을 지나쳐 걸었다. 그러자 한숙이 다급히 재희의 팔을 잡아챘다.
“5천. 더는 안 바래.”
“단 5백도 줄 생각 없으니 포기해요.”
“4, 4천만 줘 그럼.”
“당신이 최소한 엄마라면……. 딸 결혼하는데 반지라도, 아니 한복이라도 한 벌 해 줘야지.”
재희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사실 바라지도 않는다. 한복은커녕 제발 찾아오지나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한복은 돈 많고 잘난 네 아버지한테 해 달라고 해.”
그럼 그렇지. 한복은 무슨.
제가 아직도 큰 착각에 빠져 있던 모양이다. 재희의 입술 새로 헛웃음이 흘렀다.
“그럼 그 필요한 돈도 아버지한테 가서 말해요. 나한테 이러지 말고.”
“마지막이라잖아. 엄마 정말 급해. 딱 정말 마지막으로…….”
“내가 엄마한테 준 돈만 해도 벌써 수억이에요.”
그 많은 돈 다 날리고 대체 뭘 한 건지.
한숙만 생각하면 누가 입을 틀어막은 듯,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재희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딸한테까지 험한 꼴 보이고 싶지 않으면 그만 와요. 내 마지막, 경고야.”
더는 한숙에게 휘둘릴 수 없었다.
단호하게 내뱉은 그녀는 팔을 비틀어 빼며 방송국 본관으로 향했다.
△ ▼ △
“하아.”
재희는 생방송을 끝낸 후, 곧장 차현의 집으로 왔다.
벌써 열한 시가 넘었는데 집이 비어 있는 걸 보니 아직 그는 퇴근도 안 한 모양이다.
그녀는 오늘 출근 전, 1차로 짐을 옮겨 놓은 후 정리를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거였다.
“…….”
재희가 핸드백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한숙만 만나고 나면 늘 기분이 바닥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생방을 했는지.
이럴 때면 창을 열고 온종일 집을 치우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짐 정리나 해야겠다며, 재희는 입고 있던 재킷을 옆으로 벗어 놓은 후 캐리어를 펼쳤다.
“밤새 해도 못 하겠네.”
짐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적당히 추려 온 건데도 상당히 많다. 방송하는 그녀였기에 협찬도 많이 들어오지만, 옷 대부분은 직접 사서 입는 편이었다.
“후.”
한숙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오른다. 애써 지우려고 해도 독기 어린 그 눈빛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태경은 그녀의 결혼을 빌미로 이용하기 위해 머리만 굴리고, 엄마는 저 지경이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드레스 룸에 옷을 차곡차곡 정리할 때쯤, 월패드에서 차량 도착 소리가 들려왔다.
차현이 도착한 모양이다.
“큼. 큼.”
재희가 목을 가다듬으며 굳은 표정을 펴기 위해 얼굴을 움직였다. 잠시 후, 보안 해제 소리가 집을 울렸다.
“재희야.”
멀리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걸어 나갔다.
“많이 늦었네?”
“응. 저녁은.”
“……먹었지. 시간이 몇 시인데.”
차현의 예리한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지만, 곧 차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씻고 나올게. 같이 먹자.”
안 먹은 걸 대번에 눈치챈 그가, 다시 묻지도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다시 거실로 나온 차현이 그녀의 옷을 살피며 물었다.
“오늘 방송한 옷 그대로네.”
“봤어?”
“응. 말했잖아. 매일 본다고.”
“회의 있다더니.”
“회의 끝나고, 집무실에서. 씻고 나온다.”
그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에 있던 재희는 한숨을 쉬고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다시 드레스 룸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맛있어. 어디서 산 거야?”
“…….”
“한우가 엄청 부드럽다.”
알록달록 예쁜 초밥을 보며 재희가 중얼거렸다. 그 앞에 앉은 차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열심히 먹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말해.”
“응?”
“너 무슨 일 있잖아, 지금.”
“아닌데?”
한층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 톤이 무척 어색하다. 차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재희가 성게알 초밥을 들며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거 너무 고소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은재희.”
“오빠는 왜 안 먹고.”
입안에 쏙 넣고 오물거리며 재희가 차현의 앞에 있는 초밥으로 눈짓했다.
지금 재희는 억지로 밝은 척을 하고 있었다. 평소 먹는 양보다 더 많이 먹고, 과한 리액션도 함께.
어쩐지 아까 방송할 때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니. 지금 행동을 보니 확신이 되었다.
“혹시 회장님 연락 왔었어?”
“아니야. 그런 거.”
“의원님 연락 온 건가?”
“오빠.”
“그것도 아니면, 혹시 엄마 연락받았어?”
젓가락질을 하던 그녀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재희가 빠르게 초밥을 들었지만, 차현은 재희의 어색한 행동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뭐라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기에 차현은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젓가락이 맞부딪치는 소리만 귓가를 울렸다.
“하.”
한참을 먹던 그녀가 명치를 주먹으로 콩콩 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차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주방을 빠져나갔다.
탄산수를 먹어야 하나.
너무 많이 먹다 보니 얹힌 모양이다. 게워 내면 좀 나을지.
정말 미련하다, 은재희.
재희가 자책하며 물컵을 들었다.
“먹어.”
그녀의 앞에 알약 두 알이 놓였다. 재희가 그것과 차현을 번갈아 보자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내뱉었다.
“소화제야. 그리고 음식은 그만 먹어.”
재희가 그것을 들어 단숨에 입 안에 넣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그녀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나 씻고 올게.”
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짐 정리는 다 하지도 못한 채,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차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묻지도 않고, 위로도 하지 않고. 잠자코 그녀를 기다려 주고 있는 듯했다.
잠도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던 그녀가 차현의 허리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오빠.”
“응.”
“그냥 안고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아.”
차현은 알까.
지금처럼 힘들 때 그가 옆에 있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가 없을 땐, 잠도 오지 않고 가슴도 답답하고. 너무 우울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셀 수도 없다.
“다행이네.”
차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는 뺨을 어루만졌다. 재희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회상하듯 입을 열었다.
“매몰차게 거절했는데…….”
마음이 너무 안 좋다.
정말 한 번만 더 들어줬어야 했나.
하지만 벌써 그 마지막이 몇 번째인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 참 답답하다.
이런 고민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그 정도면 할 만큼 했어.”
“…….”
“그러니 마음 쓰지 마.”
차현이 위로하며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