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36/62)

36.

설마.

이정표를 본 재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번졌다.

뭘 먹고 싶은지 알겠다며 웃는 그의 모습에 그저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차현은 정말 알고 그곳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내가 뭐 먹고 싶은지 알아?”

“응.”

그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확신에 찬 답에 재희의 잇새로 헛웃음이 흘렀다.

“어떻게 알아?”

“말했잖아.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아니, 농담하지 말고.”

“그거 먹으러 가면, 회사 다시 못 들어간다며.”

조금 전에 그러긴 했다.

서울에서는 거리가 꽤 됐으니까.

다녀오면 새벽이 될 테고, 그러면 그가 일 하기는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 말은 거리가 좀 있다는 거고. 너랑 여행 갔던 곳 중, 대충 추려 보면 뭐.”

“…….”

“비빔밥도 먹고, 무침도 먹고, 전도 먹고.”

차현은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 냈다. 메뉴까지 말하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놀란 재희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 일을 온종일 하더니 그는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조금은 까칠해진 얼굴, 피곤해 보이는 눈매. 그리고 흐트러진 헤어스타일.

그런데도 먹고 싶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그는 군말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다시 돌아가. 그러지 말고.”

저렇게 피곤해 보이는데, 굳이 그걸 먹겠다고 강릉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서울에도 분점 있다고 했어.”

강릉이 본점이었으나 워낙 장사가 잘되는 터라 전국 여러 곳에 분점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 가게 말고도 다른 맛집들이 많기도 했고, 서울에 같은 음식을 파는 곳 또한 여러 군데 있었다.

“우리가 처음 여행 갔던 곳이 강릉이잖아.”

가만히 듣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갑자기 여행을 떠났었다. 데이트를 하고 헤어지는 게 아쉬워 계속 서로의 집을 오가다가 떠났던.

근사한 호텔도 아닌, 후줄근한 펜션에 묵어도 그저 좋았었던 때였다.

“…….”

재희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일처럼 여전히 생생했으니까.

그게 벌써 수년 전이었다.

“결혼하고 나면 많이 바쁠 거야.”

“…….”

“신혼여행도 곧장 못 가는데, 바람도 쐴 겸 잠시 다녀오자.”

평일 뉴스를 진행하는 그녀 때문이기도 했으나 차현도 너무 바빠 신혼여행은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언제 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재희는 더는 대꾸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부신 야경을 보며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 △

“정말 많이 바뀌었네.”

차현이 실내를 쓰윽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땐 작은 가게였는데. 장사가 잘된 건지 으리으리한 건물까지 세운 상태였다.

하긴 분점까지 냈다고 하니.

다행히 영업시간이 새벽 두 시까지였기에 마감 전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근데 갑자기 이게 왜 먹고 싶었어?”

차현이 시선을 돌려 그녀를 직시했다. 앞에 앉은 재희는 수저와 물을 세팅 중이었다.

“갑자기 아니고 그냥…….”

문득문득 떠올랐다.

음식이 맛있기도 했지만, 그와의 추억이 좋았던 탓이 아닐지.

첫 여행이었기에 그녀에게도 상징적인 곳이 강릉이었다.

“재희야.”

“…….”

그가 나긋이 그녀를 불렀다. 이렇게 부를 때면 심장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다.

재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그…….”

“어머 이게 누구야.”

그때 음식을 가지고 나온 이모님이 말허리를 뚝 자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보다 화장도 옅게 하고, 헤어스타일도 다른데 단박에 알아본 모양이다.

재희가 대외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차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실물이 훨씬 예쁘네. 얼굴도 조막만 하고.”

“감사합니다.”

“여길 다 오고. 내가 오늘 운이 좋았네. 너무 반가워요. 뉴스 잘 보고 있어요. 내가 우리 예쁜 아나운서 나오는 뉴스만 보잖아. 팬이라!”

테이블 위로 음식을 놓아주며 직원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그들을 흘긋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 적당히 좀 해 줬으면.

일부러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구석으로 앉았는데, 직원의 반응에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이짝 총각은 결혼한다던 그 사람인가 보네.”

“잘 먹겠습니다.”

차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직원은 부리나케 흰 종이와 펜을 가져와 재희에게 불쑥 건넸다.

“사인 하나만 해 줘요.”

“네.”

재희가 서둘러 사인을 하고 건네자 직원이 고맙다며 눈매를 휘며 웃는다.

“많이들 들어요.”

어머, 너무 잘 어울리네. 선남선녀야.

다 들릴 만큼 큰소리로 중얼거리며 직원이 멀어져 갔다.

“후.”

“배고플 텐데 어서 먹어.”

차현이 잘 익은 꼬막전 하나를 그녀의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그리고 막걸리 병을 들어 흔든 후, 두 개의 잔에 각각 나눠 따랐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꼬막 무침, 비빔밥, 전. 그리고 막걸리까지.

근데 술을…….

가만히 보던 재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운전은?”

“자고 갈 건데.”

“……뭐?”

“뭘 그렇게 놀라. 너 어차피 내일 쉬잖아.”

그렇긴 한데…….

곧장 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차현은 정말 자고 갈 생각인 듯했다.

아무것도 안 가져왔는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벌어진 입술 새로 전이 불쑥 밀려 들어왔다.

“뭐, 야.”

“무슨 생각해. 음식 다 식는데.”

“아니…….”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이 황당했지만 따끈하고 바삭한 꼬막 전은 맛이 정말 좋았다.

줄줄 흐르는 기름이 혀끝에 닿자 입 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재희가 얼른 젓가락을 들었다.

“짠?”

차현이 잔을 들자 재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제법 유해진 관계가 좋기도 하고 조금은 설레기도 한다. 못이기는 척 잔을 들자 차현이 곧장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하…….”

한 모금 마시자 시원한 알밤 막걸리가 술술 넘어간다.

진짜 맛있다.

단숨에 다 비운 그녀는 전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근데 회사는? 안 가 봐도 돼?”

“말했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내일 가면 되지. 그리고, 설마 또 바로 운전하라는 거야?”

“내가 해도 되잖아.”

“은재희.”

그가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를 불렀다. 재희가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하룻밤 자고 가.”

“…….”

“미안한데, 안 잡아먹을 거라는 말은 못 하겠네.”

그 말을 들은 재희의 젓가락질이 일순 멈췄다.

“뭐?”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노골적인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그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다.

“근처에 회사 호텔도 있고, 별장도 있고.”

“……성격이 원래 이랬어?”

“성격이 어때서 그런 소릴 하는 거지?”

뭐랄까.

좀 거침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전에는 되게 젠틀하고 매너 있던 것 같은데. 툭툭 말을 내뱉을 때마다 몹시 당황스럽기도 했다.

“많이 먹어 둬.”

“왜?”

“오늘 야근은 다른 데서 해야겠으니까.”

“……허.”

재희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차현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그렸다.

△ ▼ △

막걸리를 제법 많이 먹었다.

음식이 너무 맛있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마신 알밤 막걸리는 정말 술술 넘어갈 정도였다.

결국 그들은 세 병을 비우고 나서야 가게를 나섰다.

“……!”

찬물을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고 있을 때였다.

등에 닿은 뜨거운 열기에 재희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 떨렸다.

샤워하고 나온 그가 그녀를 뒤에서 안은 탓이었다.

“야근 좀 해 볼까.”

야릇한 그 말이 뜨거운 숨과 함께 귓가에 훅 끼쳤다.

긴장감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 잠깐.”

차현이 재희의 바스로브 허리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재희가 그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탓에 샤워를 하고 바스로브 하나만 걸친 채였다.

이게 풀어지면…….

그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단단히 끌어안은 그 때문에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왜.”

“으.”

차현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멋대로 터져 나온 야릇한 소리에 재희가 입술을 짓이기며 참았다.

“접견실에서부터 참은 거야.”

차현은 무방비의 상태로 곤히 잠든 그녀를 애써 외면했다.

꾹 누르며 참았는데 바스로브만 입은 그녀를 보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결국 끈이 풀리고 가운의 앞섶이 벌어졌다.

촉, 촉. 촉.

목선부터 어깨 라인까지.

그의 입술이 지난 자리마다 붉은 흔적이 남는다.

재희는 어깨를 움츠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흣.”

벌어진 바스로브 사이로 그의 손이 들어갔다. 매끈한 살결 위에 뜨거운 손이 닿았다.

쿵.

아찔한 감각에 재희는 들고 있던 물병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물병이 뒹굴어도 차현은 개의치 않았다.

잔뜩 움츠린 그녀의 어깨를 감싸 뒤로 돌리자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재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야.”

“…….”

“눈 좀 떠 봐.”

눈은 꾹 감은 채, 상기 된 뺨이 무척 귀엽다.

차현이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어서.”

어서 눈을 떠 보라고 재촉하자 재희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법한 가까운 거리였다.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차현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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