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32/62)

32.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석에 앉은 세민은 룸미러로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차현은 눈을 감은 채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였다.

“은재희 집으로.”

“알겠습니다.”

그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세민은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앞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평소 술자리에서는 조절하는 편인데 이 회장과의 자리라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셨더니, 주량을 훨씬 넘기고 말았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기분이다.

“후.”

크게 한숨을 내쉬자 차 안 가득 알코올 향이 진동했다.

차현이 이토록 취한 모습은 세민 역시 처음이었다.

술이 약하지도 않았으나 자제력이 강한 그는 이렇게 흐트러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기사는.”

탁한 목소리가 뒷자리에서 넘어왔다.

“예정된 시간에 올라왔습니다.”

다행히 그녀와의 결혼 기사는 예정된 시간에 올라간 듯했다.

그제야 긴장감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집 앞과 회사 앞에 기자들이 많이 몰린 것 같습니다. 다행히 보안이 철저한 편이라 귀찮은 일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 이후 재희에게서는 어떠한 연락조차 없었다. 아니, 조금 전 부재중 전화 두 통을 제외하고 어제까진 문자 한 통 없던 그녀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차현이 한숨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냥 집으로 가지.”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많이 취하기도 했지만, 혹시나 술김에 실수를 할까 봐. 아쉬운 말을 할까 봐서.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은 안 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목을 죄는 갑갑함에 차현은 타이를 완전히 풀어내고는 단추마저 끌렀다. 그럼에도 이 답답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차현이 눈을 뜨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지.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평생을 형우의 아래에서 일하며 결국 이 회장을 구하다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자 목구멍에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었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저 사고였지만, 속상한 건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이거라도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잠시 정차한 틈을 타 세민이 팔을 뻗어 차현에게 불쑥 병 하나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뭐야?”

“숙취 해소제입니다.”

“괜찮은데.”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혹시나 몰라 몇 개 구비해 두었던 게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세민은 최대한 조심히 운전하며 룸미러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세민아.”

“……말씀, 하십시오.”

조금 전, 형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정하던 제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이미 자존심은 다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자꾸 생각나는 걸 보니 아직 먼 모양이다.

터놓고 속마음 하나 말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더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입술을 달싹이던 차현이 뚜껑을 열며 픽 웃었다.

“잘 마신다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한 모금 마시자 음료 특유의 향이 훅 끼쳤다.

미간을 구기며 단숨에 마신 그가 다시 시트에 몸을 묻었다.

△ ▼ △

“부사장님, 도착했습니다.”

그새 잠이 든 모양이다.

흔들어 깨우는 세민의 손에 차현이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하아.”

잠시 자고 났더니 세상이 뒤집힐 만큼 어지럽던 기운은 조금 가신 듯했다.

“근데, 저기 은재희 씨 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민의 말에 차현이 시선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하얀색 세단.

차 번호판을 확인하니 그녀의 차가 맞았다.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미간을 구기며 차 문을 열었다. 빠르게 내리려는 세민을 제지하며 차현은 문을 잡고 선 채 입을 열었다.

“내일 보죠.”

“내일 시간 맞춰 모시러 오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고.”

차현이 문을 닫고는 재희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면에서 보자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몇 날 며칠 전화 한 통 없더니.

결국 오늘은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한 듯했다.

물론 형우와 함께 있어 받을 수는 없었지만.

똑똑.

차현이 운전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반응조차 없었다.

자는 건가.

잠시 후 그가 다시 창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제야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재희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차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눈을 도르륵 굴리며 눈치를 보던 재희가 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섰다.

“…….”

“…….”

차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직시했다.

결혼 기사는 그녀의 생방송이 끝난 후, 한 시간 뒤로 잡았다.

방송을 끝낸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세심한 배려를 은재희가 알까.

알아 달라고 구구절절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전화는 왜 안 받아?”

결국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차현은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재희가 급하게 다가와 그의 옆을 나란히 걸었다.

“정말 이럴 거야?”

“…….”

“저기 이차현 씨!!”

팔을 덥석 잡은 그녀 때문에 그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잡힌 팔로 시선을 내리자 재희가 흠칫 어깨를 떨며 손을 다급히 거두었다.

“말해.”

“뭐를.”

“여기 왜 온 건지.”

서늘한 목소리에 순간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간 전화 하나 안 했으면서 왜 온 건지 말하라니.

할 말이 정말 많았는데, 그의 태도를 보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술, 마셨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진동한다.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차현의 잔뜩 취한 눈동자가.

“은재희.”

“얼마나 마신 거야?”

“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현이 손끝으로 눈썹 끝을 매만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할 말이 그게 다야?”

“…….”

“고작 술 취한 거 물어보려고 온 거냐고.”

“그게…….”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재희가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차현이 다시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재희가 그의 뒤를 따랐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도, 그의 옆을 걸어도. 뒤를 따라가도.

차현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현관문 앞에 다다르자, 재희가 그의 두 걸음 뒤에 멈춰 섰다.

“…….”

띠리릭.

현관문이 열리고 차현이 문을 잡아당겼다.

들어가려는 찰나, 등에 그녀의 음성이 닿았다.

“안 만났어.”

이차현이 이렇게 화가 난 이유. 그날 유찬과의 약속 때문인 듯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부터 풀어야 했기에 재희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당신 말이 맞아. 그 선배, 나한테 마음 있어.”

차현의 몸이 그녀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그래서.”

“2년 전에 고백받았는데 거절했고.”

“그 얘기, 지금 왜 해.”

“당신 화 난 거 이것 때문이잖아.”

억울한 마음에 말끝이 갈라졌다. 이렇게 냉랭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결혼까지 하기로 한 마당에.

오늘 기사도 났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뒤엉킨다.

“천하의 은재희가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직접 찾아와서 이런 소릴 하는 거 보면.”

잔뜩 비딱한 음성이 건너왔다. 재희의 이마가 슬쩍 일그러졌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도 차현은 개의치 않았다.

“안 궁금하다고 했잖아. 네 사생활.”

“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시원해?”

“관심 끈다고.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어.”

차현이 시선을 거두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기에 재희는 곧장 문을 잡고 그의 뒤로 따라 들어갔다.

쿵.

뒤에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멈춰선 그의 너른 등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실, 이야?”

“뭐가.”

“이지혜랑 스캔들 난 거 봤어.”

“아아.”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비아냥거리는 그를 볼 때마다 명치 끝이 저릿하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마치 잘못 끼운 첫 단추처럼 자꾸만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다시 풀어야 할지도 모를 만큼.

희뿌연 안개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게 궁금해서 온 거였네.”

차현이 뒤로 돌아 그녀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제법 가까운 거리였다.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난 또. 왜 여기까지 왔나 했지.”

그녀의 커다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자존심이 잔뜩 구겨졌다.

여기서 울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아서 재희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물을 참아 냈다.

“말할 이유, 없는 것 같은데.”

“…….”

“왜, 상황을 바꿔 놓고 보니 이제야 좀 이해가 돼?”

“오빠.”

그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결국 빤히 바라보던 재희의 뺨에 눈물이 떨어졌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결국 입가에 맴돌던 말을 꺼내놓았다.

“이만큼, 이 정도로. 내가 싫으면.”

“…….”

“그냥 하지 마, 결혼.”

그 말을 들은 차현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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