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오늘 화제의 인물 초대석에는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재희가 한껏 미소를 머금은 채 운을 띄웠다. 그 앞에 앉은 차현은 그런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녀가 저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홀로 외롭게 견뎌 냈을지. 보지 않아도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차현이 은재희 곁에 없던 시간이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 취임식을 통해 경영자의 자리에 오른 이형 전자 부사장, 이차현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재희와 차현의 시선이 허공에 교차했다.
벌써 몇 년째, 이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생방송을 한 그녀였기에 사실 평소에는 긴장을 안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걸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녀가 여유로운 척하며 입을 열었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참 많으실 텐데,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형 전자 부사장 이차현입니다.”
대본에 있는 내용이기도 했으나, 다 외운 건지 차현은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실수조차 하지 않았다.
재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준비해 온 소개를 마쳤다.
“취임식 때도 뵀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미남이시네요.”
“하하, 그런가요. 과찬이십니다.”
차현이 픽 웃으며 능글맞게 받아쳤다.
작가가 써준 대본은 참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잘생긴 게 사실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결혼 이야기가 알려지면 흑역사로 치부될지도 모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런 낯간지러운 대사는 좀 뺄까 잠시 고민하던 재희는 그대로 인터뷰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희 뉴스에서 단독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은재희 아나운서님 팬이어서 일부러 이곳에서 인터뷰하길 희망했습니다. 제가 영광이죠.”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며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뻔했다.
재희는 웃음을 꾹 참으며 대본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척 바쁘시다고 들었는데요. 귀한 시간 내어 주셔서 시청자분들도 좋아해 주실 것 같습니다.”
분위기는 참 화기애애했다.
묘한 긴장감 속에서 그와 줄다리기를 하듯, 대본 그대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이미 취임식 전부터 일하고 있던 터라 사실 비슷하긴 합니다만, 많이 바쁜 건 사실이기도 합니다. 실수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실적을 내기 위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겠으나, 이형우 회장님과의 관계도 궁금한 부분이 많습니다. 언급 가능한 부분만이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
“곧 에세이가 한 권 나올 예정입니다.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가 왜 이형우 회장의 아들이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적어 두었으니 읽어 보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세이…….
사실 재희가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차현과 결혼할 수 있는 거겠지만, 곁에 없던 차현의 지난 시간이 참 궁금하다.
그리고 그가 홀로 견뎌 냈을, 외로웠을 그 시간을 생각하자 명치 끝이 저릿하다.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약 15분간의 인터뷰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 ▼ △
“은 아나 고생했어.”
생방송을 마치고 대기실로 들어오자 김 국장이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저리 좋을까.
이렇게 버선발로 마중 나와 웃고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지간히 만족하는 모양이다.
재희는 대충 고개만 까딱이고는 거울 앞에 놓아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생방송에서 먼저 내려간 차현은 김 국장과 이미 인사를 한 건지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 은 아나 능력 있는 거야 뭐 아주 유명합니다.”
“국장님.”
“응. 그래요 그래.”
무엇을 말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표정이다. 재희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재킷을 팔에 걸쳤다.
“그만 띄워 주세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진심인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국장 때문에 머리까지 지끈거릴 지경이다.
앞에서는 이렇게 살랑살랑 비위를 맞추면서 뒤에서는 결혼 단독 기사를 낼 궁리만 한 주제에.
재희의 입술이 비틀렸다.
“어련하실까요.”
“부사장님이랑도 이렇게 잘 어울리고.”
“국장님?”
“알아 알아. 나도 다 들었어.”
다 안다는 듯, 국장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꿈쩍거린다.
하.
재희가 짜증 섞인 얼굴로 가방을 마저 들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생 많았어. 어서 들어가서 쉬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겠습니다.”
국장이 폴더처럼 허리를 접으며 차현에게 인사했다. 차현 역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와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뒤에서 걸어오던 그가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선배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수고해.”
재희에게 인사하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의 곁에 선 차현에게 닿아 있었다.
사람들의 과한 관심이 참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일 데려다줄 테니까, 내 차로 가.”
“굳이 안 그래도 돼요. 내일도 바쁘잖아요.”
“그럼 은재희 씨 차 타야겠네. 오전에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니.”
둘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화를 이어갔다.
굳이 살갑게 대화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으나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차현은 이미 같이 타고 갈 생각인 듯했다.
재희는 그냥 입을 다문 채 걸음을 옮겼다.
“재희야.”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 순간이었다.
“아, 선배.”
“지금 퇴근해?”
끄덕끄덕.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찬이 그녀의 앞으로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야?”
“또 공복일 거 아냐. 퇴근길에 먹으라고.”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차현의 빤한 시선에도 유찬의 눈동자는 오로지 재희를 향해 있었다.
분명 오늘 뉴스를 봤다면, 아니 이미 보도국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으니 차현이 누군지 모르지도 않을 텐데.
유찬은 관심조차 없었다.
“아……. 괜찮은데.”
“요새 얼굴이 왜 이렇게 까칠해? 모니터링 하는데 안색이 영 안 좋던데.”
유찬이 재희의 손목을 잡아 쇼핑백의 손잡이를 쥐여 주며 걱정 섞인 목소리를 냈다.
차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유찬의 손에 닿았다.
“너 자주 먹는 거로 샀어.”
“잘 먹을게요.”
“내일 일찍 나오면 점심이나 같이 먹자.”
띵.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차현이 먼저 오르고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
“내일 연락할게.”
“운전 조심히 하고.”
“응. 선배도 어서 들어가요. 왜 아직도 퇴근 안 했…….”
“은재희 씨.”
그때, 차현이 그녀의 말허리를 뚝 자르고 끼어들었다.
둘의 시선이 차현에게로 옮겨졌다.
“안 탑니까.”
“들어가. 전화할 테니까.”
유찬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그렸다.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힐 때까지, 유찬은 재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재희는 시선을 들어 내려가는 숫자에만 집중했다.
“뭐 이렇게 다정해?”
“뭐가.”
어서 주차장에 도착했으면.
적막이 못 견딜 만큼 어색할 때쯤, 비딱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무슨 사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냥 선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저렇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저녁을 챙길 리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차현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응.”
“결혼할 사람한테는 전화도 안 하면서. 참 다정하네, 은재희.”
그의 목소리는 한껏 비뚤어진 채였다.
김유찬. 입사할 때부터 그녀를 다정히 챙겼던 고마운 선배였다. 사실 그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긴 했다.
‘그냥 후배 말고, 좀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은데.’
유찬이 했던 고백.
누구를 좋아할 마음도, 그리고 신경 쓸 마음도 없었기에 재희는 고민 없이 고백을 거절했었다.
‘미안해요, 선배. 나 못 잊는 사람 있어.’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