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25/62)

25.

꿈인가. 이런 꿈도 꿨던 것 같은데.

비현실적인 이 상황이 꿈처럼 아득히 느껴졌다.

이렇게 쉽게 곁을 내어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성과 달리 길들여진 몸은 이미 그를 원하고 있었다.

“아…….”

술에 취한 탓에, 그리고 그의 체향에 취한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입술 새로 연신 밭은 숨이 터졌다. 자존심도 없이 안기는 제 모습이 영 민망했다.

재희가 손등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곧 차현에게 제지되고 말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침대에 고정했다.

지척에서 시선이 뒤엉켰다.

“참지 마.”

잔뜩 흐트러진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새 그의 셔츠는 앞섶이 다 풀어 헤쳐진 상태였다.

뇌쇄적인 눈빛에 심장이 내려앉은 기분이다. 뜨거운 그의 엄지가 그녀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읏.”

잠시 내려다보던 그가 그녀의 쇄골로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차현의 커다란 손이 닿을 때마다 몸에 걸쳐진 것들이 하나둘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흐읏.”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익숙했다.

무려 5년이나 지났음에도.

이렇게 흔들릴까 봐 피했던 건데.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견고히 쌓았던 마음은 단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차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표정을 다잡아 봐도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아.”

그의 입술이 지난 자리마다 붉은 울혈이 졌다.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낙인을 찍듯,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익숙하고 또 너무 그리웠던.

재희가 그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눈물을 삼켰다.

“흐읍.”

뜨겁게 파고드는 그 때문에 결국 그녀의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이 몰아쳤다.

차마 그만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애써 꾸역꾸역 삼키며 재희는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차현은 개의치 않았다.

“아……, 오빠 잠, 깐.”

차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마치 어제 안았던 것처럼, 은재희는 여전했다.

예민한 곳곳을 건드리며 차현은 그녀를 절벽 끝까지 몰아세웠다. 마치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침대 또한 거칠게 출렁였다.

“읏!”

“도망가지 마.”

참을 수 없는 쾌락에 몸을 물리자 차현이 얄따란 그녀의 허리를 단숨에 팔로 감았다. 맞붙은 몸을 타고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 말 한마디에 다시금 울컥하고 말았다.

마치 지금 하는 말이 아닌, 5년 전 그때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착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재희가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

그러자 차현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자 차현이 상체를 낮춰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말해.”

“…….”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차현이 다정하게 내뱉었다.

입가에 맴도는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한 채, 재희는 입술을 짓이겼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더해지는 온기만큼, 시린 마음마저 따뜻해지는 밤이었다.

△ ▼ △

차현은 품에 안긴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전보다 조금 더 마른, 그녀를 밤새 안고 또 안았다.

애초에 적당히 할 마음도 없었으나 한 번 터진 마음은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으음.”

미동조차 없이 자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자 재희가 뒤척이며 동그란 이마를 찌푸렸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것처럼.

이 순간이 꿈처럼 아득하다. 차현은 가느다란 그녀의 등을 쓸어 내리며 조금 더 바짝 끌어안았다.

‘제발 그만해.’

잡아 달라는 얼굴을 하면서도 모질게 말을 내뱉던.

그 시절의 은재희가 눈에 선하다.

‘더, 더 안아 줘.’

잔뜩 울어 빨개진 눈으로 재희는 어젯밤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술 때문인가.

사귀던 때에도 좀처럼 마음을 표현하지 않던 그녀였기에, 어젯밤 그녀의 모습이 조금 생소하기도 했다.

“후.”

잠에서 깨면 어떤 반응일지.

과하다 싶을 만큼 그녀를 괴롭혔는데, 재희는 어떠한 말도 없이 안겨 왔다.

이제야 다시 겨우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

다시 마주 보고 예전처럼 웃으려면 난 얼마나 너를 흔들어야 할까.

재희를 안은 그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 ▼ △

“아…….”

깨질 듯한 두통에 절로 신음이 흘렀다.

재희가 미간을 구긴 채 뒤척였다. 그러다 이내 살갗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

설마…….

잠시 행동을 멈춘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하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어디 간 건지 옆자리는 비워진 상태였다.

어젯밤 일을 곱씹던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특별히 무슨 말을 한 건 아니었으나 그녀의 행동이 문제였다.

“미쳤어, 진짜.”

재희가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게 다 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정히 불러 주는 이차현 때문에. 결국 그리웠던 그의 품에 제 스스로 파고든 탓이었다.

‘괜찮아.’

마치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차현은 우는 그녀를 달래며 입술로 몸을 물들였다.

그 뜨거웠던 감각이 다시 떠올라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심하다. 다시 곱씹어 봐도 한심해서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한심하다, 은재희.”

“한심하긴 뭐가.”

움찔.

갑자기 들린 그의 목소리에 재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다.

“일어났으면 나와.”

그가 방에 들어오기 직전, 재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일어난 거 다 아는데. 눈 뜨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건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크게 귓가를 울렸다. 계속 이렇게 버틸 수도 없기에 재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민망함에 입술을 감쳐 물며 재희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피식.

그는 빤히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왜, 왜 웃어?”

“반응 보니 다 기억하는 것 같아서.”

“…….”

아…….

그의 말이 맞다. 차라리 그냥 기억 못 하는 척, 뻔뻔하게 반응할걸.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지만, 몹시 후회가 되었다.

왜 이차현 앞에만 서면 꼭 바보가 되는 기분일까.

어젯밤 일을 후회하며 재희는 시선을 피했다.

그때 침대의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옆에 걸터앉은 차현 때문이었다.

휙.

“……!”

갑자기 잡혀 내려간 이불 탓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이 드러나고 말았다.

민망한 상황에 재희가 사색이 되어 다시 이불을 끌어와 덮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이미 다 봤는데. 새삼스럽게.”

“…….”

“보기만 했을까.”

노골적인 언사에 재희가 눈을 흘기며 원망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은 쉬는 날인지 그의 옷차림이 평소와는 달리 조금 편한 모습이었다.

이마를 덮은, 헤어스타일을 보자 정말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그만 얘기……”

차현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재희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끔뻑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집부터 합쳐.”

“뭐?”

“뭘 그렇게 놀라.”

“결, 흔하면 그때, 그때 할 거야.”

그의 말대로 지금 합쳐도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지만, 제 마지막 남은 하찮은 자존심이었다.

어차피 결혼이 얼마 안 남기도 했고, 그리고…….

이렇게 선이 무너진 이상 매일 밤은커녕 언제든 어제와 같은 일이 안 생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를 못 믿는 게 아닌,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어제처럼 속도 없이 안길까 봐.”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차현이 툭 내뱉었다. 재희가 눈을 치켜뜨며 뺨을 만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술, 이 너무 취해서…….”

“그래. 많이 취하긴 했더라. 평소 하지도 않던 말을 하는 걸 보니.”

하지도 않던 말?

그 말을 들은 재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다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차마 묻지 못한 채 차현의 눈만 빤히 볼 뿐이었다.

“궁금하면 말 해 주고.”

“아니. 안 궁금해.”

“그러든지. 씻고 나와. 밥 먹고 갈 데 있으니.”

차현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 작은 미소가 좋다고 호들갑인 시절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얄미워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어디, 가는데?”

방을 나서던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뒤로 돌아 그녀를 직시했다.

“드레스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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