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24/62)

24.

찰칵.

문을 연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 되어 있었다.

슬쩍 풀린 초점, 언뜻 스치는 알코올 냄새. 그리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

그녀의 붉은 입술만큼이나 붉어진 탐스러운 뺨까지.

“술 마셨어?”

“……네.”

뭐가 문제냐는 듯, 비딱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차현의 짙은 시선이 그녀를 샅샅이 훑었다.

아까 집에 도착한 이후 곧장 술을 마신 건지, 아니면 술을 마시고 들어온 건지.

그녀는 연회장에서 볼 때보다 조금 더 취해 보였다.

그리고 차현이 보낸 그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나 여기 계속 서 있으면 되나.”

문을 연 채 미동조차 없는 그녀에게 차현이 물었다.

그러자 재희가 슬쩍 몸을 비켜섰다. 차현은 그녀의 집 현관에 들어섰다.

느슨하게 당겼던 타이를 풀어 낸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 다다른 그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이걸, 혼자 다 마신 거야?”

벌써 두 병째인 모양이다.

차현이 빈 병 하나를 들어 보이며 그녀에게 물었지만, 재희는 대꾸조차 없었다.

뒤따라 들어 온 재희는 아무 말 없이 와인잔을 들었다. 그녀가 든 잔에는 붉은색 액체가 가득했다.

“허.”

어쩐지. 이 많은 걸 다 마셨으니.

차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희는 소파에 앉아 홀짝홀짝 와인만 마셔 댈 뿐이었다.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

“재희야.”

“그렇게 부르지 마.”

다정하게. 기대고 싶게. 기대하고 싶게.

앞이 어지러이 흔들려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린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던 이차현이 생각나서.

그래서 술은 입에 대지조차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많이 마시다 보니 감정이 넘실거린다.

그때 차현이 그녀의 앞으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고는 재희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셔츠 단추를 하나둘 끌렀다.

“왜.”

“…….”

“왜 그렇게 부르지 말래?”

다시 그녀가 알던 이차현이다.

걸치고 있는 값비싼 슈트는 그때와 달랐지만.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 그리고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아까 단상 위에서 카리스마 넘치게 말하던 부사장 이차현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

재희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와인을 모조리 들이켰다.

그러자 차현이 그녀의 손에 들린 빈 잔을 가져가 와인을 가득 따랐다. 그러고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차현의 굵은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오르내렸다.

“최동혁, 한지웅, 송원진.”

“…….”

“오늘 다 왔던데.”

재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녀가 선을 봤던 남자들 이름이었다. 차현은 자연스레 다시 잔에 와인을 따랐다.

“나머지는 바쁜지 안 왔더군.”

“그걸, 어떻게 다 알아?”

“말했잖아.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어?”

마치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냐는 듯, 정말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차현은 잔을 든 채 그녀를 응시했다.

헤어진 5년간 그녀가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났는지.

차현은 미국에 머무르면서도 그녀에 대한 소식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정말 선봐?”

“무슨 소리야.”

“황윤아랑…….”

아…….

말을 하던 재희가 여린 잇속을 씹으며 말끝을 흐렸다.

취기가 오르는 바람에 속마음이 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분명, 곧 결혼이 예정되어 있고 이 회장에게 허락도 받았으나 연회 자리에서 봤던 그들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누가 그래. 내가 황윤아랑 선을 본다고.”

“나 빼고 다 알더라.”

방송국에 있어 어지간한 소문은 빠른 편이었지만, 차현에 대해 아는 건 전혀 없었다.

그간 그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저 자리에 있게 된 건지조차 알지 못했으니.

차마 자존심에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긴 했나보네. 직접 물어보는 걸 보니.”

그가 예리하게 짚어 냈다.

그녀의 사소한 감정조차 읽어내던 그였기에, 차현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황 회장이 먼저 연락해 왔어. 사업적으로.”

기회에 능한 황 회장은 그가 부사장에 오르기 전부터 연락을 해 왔다.

어디서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그가 필요한 분야에 도움이 될 만한 조건을 내세우며 식사 자리까지 만들었다.

“물론 결혼도 포함이었고.”

역시.

눈이 높다고 소문난 황 회장이었기에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욕심 많은 황윤아라면 더더욱.

재희의 입술 새로 한숨이 흘렀다. 입술이 말라 와인 한 모금이 간절한데, 그녀가 들고 있던 잔은 차현의 손에 들려 있었다.

“…….”

“줘?”

그녀의 행간을 읽은 차현이 먼저 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정말…….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꼭 놀리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아보는 건지.

5년 전 그녀였다면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쫑알쫑알 다 물어봤을 텐데.

사뭇 달라진 관계에 목이 메어 왔다.

재희가 이를 꾹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행동을 따라 차현의 시선도 위로 들렸다.

“먼저 잘게. 피곤하네.”

탁.

그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 손목이 잡혔다.

“얘기 다 안 끝났는데.”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차현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후 그녀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고개 좀 들지.”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명치 끝이 아플 만큼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

“…….”

잠시 적막이 흘렀다.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질 만큼, 어색한 분위기가 몸을 휘감았다.

“하나만 물어보자.”

차현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며 먼저 입을 열었다.

“5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

“어떻게 할래.”

슬쩍 기운 그의 눈매, 진실을 말하라는 무언의 눈빛.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가만히 듣던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답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어?”

“진심.”

“…….”

“네 진짜 마음.”

단호한 어조였다.

정말 알고 있는 건가.

질려서 헤어지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는 전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묻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새로 한숨이 흩어졌다.

“똑같아.”

그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해도 그를 놓았을 것이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도, 변함없어.”

자신 때문에 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테니.

5년을 그리움에 지쳐 지옥 속에 살망정.

“……!”

그때 그의 고개가 슬쩍 기울었다. 갑자기 다가온 그 때문에 그녀의 눈이 배로 커졌다.

촉촉한 입술이 맞부딪친 탓이었다.

재희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답답하기도 하고.”

그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후, 하고 크게 숨을 몰아쉰 그가 말을 이었다.

“이해도 되는데.”

“…….”

“궁금하네. 언제쯤 말해 줄지.”

“할 말, 없는데.”

아무리 좋아한다고 한들, 그에게 제 아버지의 추한 민낯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버지 때문에 너와 헤어진 거라고. 그래서 난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사실이기도 했으나 변명이기도 했으니까.

“그냥, 좀 질리고 그래서 헤어진 거야.”

“그러면 이런 얼굴은 하지 말아야지, 재희야.”

“내가 무슨 얼굴을 했다고.”

“미련 뚝뚝 떨어지는, 그런 얼굴.”

“……!”

순식간이었다.

그의 입술이 겹쳐지기까지.

갑작스레 입술을 집어삼킨 그 때문에 숨이 막혀왔다.

놀란 재희가 그의 어깨를 밀어 봤지만 차현은 그럴수록 조금 더 거칠게 혀를 밀어 넣었다.

“읍!”

술 때문인가.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앞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익숙한 체향과 함께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배회했다.

단단하게 허리를 끌어안은 그 때문에 뜨거운 그의 몸과 맞닿았다.

고른 치열을 훑던 그가 능숙하게 혀를 휘감았다.

부드럽고 뜨거운 감각에 재희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숨을 삼키고 흐르는 타액을 머금었다.

“하아.”

잠시도 용납 못 한다는 듯,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가 다시금 입술을 부딪쳐 왔다.

그의 단단한 어깨를 밀어내던 그녀의 손이 이내 그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작은 행동에 그의 입꼬리가 호를 그렸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처럼, 뜨거운 두 몸이 바짝 붙어섰다. 어느새 뒤꿈치를 들고 그에게 매달린 그녀는 조금 절박해 보이기도 했다.

“읏.”

도톰한 아랫입술을 입 안에 넣고 혀로 굴리던 그가 슬쩍 이로 씹자, 여린 신음이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결국 차현은 그녀를 앞으로 안아 들고 곧장 침실로 향했다.

사그락- 소리와 함께 등에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느새 곧장 올라온 차현이 짙은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엄지로 붉은 입술을 지분거리며 이마를 찌푸렸다.

“더는 못 참겠다.”

차현이 상체를 내려 다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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