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23/62)

23.

혹시 저와 결혼하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선, 이라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재희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어머, 누군데?”

윤정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황윤아랑 선본다던데? 아까 선우가 그러더라.”

그 말을 들은 재희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황윤아. H그룹 황 회장의 하나뿐인 손녀딸.

재희와도 친구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유독 열등감을 드러낸 탓에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시기 질투는 물론 뒷담화까지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재희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황윤아 성격이야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그런데 왜 윤아와 선본다는 소문이 나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대박이네. 근데 이 부사장 진짜 근사해. 그치.”

“그러게.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기다려서 선이나 봐 볼걸.”

예비 남편인 동혁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윤정은 가희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재희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비웠다.

“야, 저기 황윤아잖아. 부사장이랑 같이 있는데? 언제 온 거야?”

“…….”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의 앞에서 수줍은 듯 미소 짓는 윤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취임식이 끝난 후, 차현은 연회장에서 내내 무척 바쁜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 이 회장과 함께 있더니 지금은 홀로 인사를 다니는 모양이다.

“정말인가 보네.”

“뭐, 선본다고 다 결혼하니? 황윤아가 아무리 저렇게 들이대 봐라. 결혼하나. 쟨 인성부터 글러 먹었어.”

“그건 모르는 거지. 솔직히 황윤아 정도면 뭐 배경도 좋고 얼굴도 예쁘잖아.”

“먼저 가 볼게.”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윤정과 가희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벌써?”

“응. 좀 피곤하네.”

“조금 더 있다가 가. 너 부사장이랑 인사는 했어?”

인사는 무슨. 어색하게 마주치기도 싫어 일부러 피해 다녔는데.

불편한 자리 때문인지, 아니면 새 옷과 신발 때문인지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야, 저기 오잖아. 인사하고 가.”

“…….”

그때, 윤정의 시선이 재희의 뒤로 향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기 때문이다. 재희는 들고 있던 클러치를 조금 더 꼭 그러쥐었다.

“안녕하세요, 이차현입니다.”

“송가희예요. 반갑습니다.”

“임윤정이예요.”

윤정과 가희의 시선이 허공에 교차했다.

묘한 미소를 띠며 둘이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사이 차현이 재희의 앞에 와인 잔 하나를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재희 씨가 진행하시는 뉴스, 잘 보고 있습니다.”

“……아.”

흠칫 놀란 그녀가 얼떨결에 잔을 받아들었다.

행사 내내 멀리 서 있던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견딜 수 없을 만큼,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차현과 눈이 마주쳤다.

“…….”

꼴깍.

재희가 침을 삼키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바라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만간 뵐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네?”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어머, 재희야 무슨 일이야?”

윤정이 빠르게 다가와 재희에게 팔짱을 꼈다.

뉴스 인터뷰를 말하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가십에 관심 많은 친구들 앞에서 왜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미안. 말하기가 좀 그러네.”

뉴스 단독이기에 먼저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윤정이 서운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뭔데에. 말도 안 해 주고. 혹시 부사장님이랑 선이라도 봐?”

“선, 이라.”

그때 차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발 그냥 조용히 좀 해 줬으면.

눈빛으로 애타게 말해 봐야 차현은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제가 재희 씨 팬이라. 그런 자리 있으면 영광입니다.”

“재희 팬이셨구나. 너 좋겠다, 야.”

“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뉴스를 봤었거든요.”

하루도.

일부러 강조하는 듯한 말투에 재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긴장이 되어 갈증이 일었다.

재희는 차현이 건넨 와인을 모조리 마셔 버렸다.

“와인 좋아하시나 봐요. 다음에 기회 되면 한 번 더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차현이 자리를 옮겼다.

그녀만 알아볼 수 있게 슬쩍 눈을 찡그리며.

“후.”

와인 때문인지, 이차현 때문인지.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라 재희가 손부채질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도 더 늦지 않게 결혼해. 기회 되면 부사장이랑 선도 좀 보고.”

“맞아. 너한테 관심 엄청 많은 거 같은데.”

가희가 한마디 하자 윤정이 호응하며 거들었다. 재희는 잔을 내려놓으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찍어 눌렀다.

“다음에 봐. 먼저 갈게.”

△ ▼ △

“아…….”

현관에 들어선 재희의 입술 새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찔한 킬힐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자 퉁퉁 부은 발이 그제야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새 구두라 그런지 뒤꿈치도 다 까진 채였다.

“예쁘긴 한데, 불편하네.”

보기엔 무척 매혹적인 구두였으나 착화감에는 신경을 안 쓴 모양이다.

아니면 저와는 안 맞는 거겠지.

“후.”

재희가 지친 몸을 이끌고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곧장 주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와인 한 병을 꺼내 잔에 가득 따랐다. 연회장에서 몇 잔 마시긴 했으나 조금은 부족하던 참이었다.

잔을 들던 그녀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클러치 안에서 들려온 진동 소리 때문이었다.

“…….”

보나 마나 이차현일 것이다.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더 머무를 생각도 없었지만, 자꾸만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럴 땐 얼굴이 알려졌다는 게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어차피 그 자리에 아는 얼굴이 많기도 했고.

사실 재희 역시 빠지는 집안은 아니었으나, 굳이 나서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런 거엔 딱 질색을 하던 그녀였기에.

재희는 붉은 액체가 넘실거리는 잔을 든 채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소파에 털썩 앉자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 모금 들이켠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온종일 바빴던 이차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취임식이 끝나고 진행된 연회 자리에서는 더 바빠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쩜 그렇게 자연스러운지.

태생부터 이형우의 자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오늘 그의 모습은 근사하기까지 했다.

그의 근처를 맴돌던 수많은 여자들.

눈도장을 찍기 위해, 혹은 사심을 채우기 위해.

모두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차현은 매너 좋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은근히 씁쓸하기도 했다.

“와인 때문인가.”

재희가 픽 웃음을 흘리며 다시 와인을 머금었다.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술을 마셔서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찍어 누르며 재희는 클러치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와 문자 몇 통이 들어와 있었다.

[가지 말고 기다려.]

[금방 끝날 건데, 힘들면 잠시 룸에 가 있든가. 키 줄 테니까.]

[와인 한 잔 더하자.]

“…….”

재희는 그가 보낸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뉴스를 봤었거든요.’

순간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차현의 눈빛, 확신에 찬 말투.

진심이었다.

“하루도…….”

원래의 꿈이 아나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별 후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이차현이 어디서든 볼 수 있겠구나.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볼 줄은 몰랐지만.

그는 무슨 마음으로 뉴스를 봤을까.

재희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 ▼ △

“그래서, 그냥 갔다.”

“죄송합니다.”

세민이 차현을 향해 사죄했다.

그녀의 곁을 지키라고 그렇게 몇 번이고 강조하며 지시했는데 결국 놓치고 만 모양이다.

바빠서 챙기지 못했던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지만 그런 그를 대신해 챙기라고 비서까지 붙여 준 건데.

작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비서에게 화가 나던 참이었다.

“옆에 내내 붙어 있으라고 한 것 같은데.”

“잠시 화장실 간다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세민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목소리가 서늘한 걸 보니 차현은 무척 화가 난 듯했다.

“대기해요. 곧 나갈 테니.”

다시 한번 더 묵례한 세민은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새벽에 재희의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눈코 뜰 새 없이.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모든 행사는 종료되었다.

분주히 정리 중인 연회장을 보던 차현은 한숨을 내쉬며 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온종일 목을 죄는 듯 갑갑했는데,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후.”

술을 마셔서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곤이 상당했다.

다행히 내일은 편히 쉬고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형우의 지시가 있었다.

회사 내부의 임원들은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정식 출근은 월요일부터 시작이었다.

“전화는 대체 왜…….”

차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겼다.

또 받지 못한다는 안내 멘트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벌써 몇 통째인지.

이 정도면 일부러 안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끝나고 같이 와인이나 한잔하려고 했더니만.

쯧.

차현이 혀를 차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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