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22/62)

22.

그가 단상에 올라 인사를 했다.

그러자 회사 홍보팀은 물론,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하지만 차현은 긴장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또렷한 눈매, 확신에 찬 목소리. 우아한 애티튜드까지.

태생부터 그랬던 듯, 차현은 그 자리가 참 잘 어울렸다.

“존경하는 임직원 여러분…….”

재희는 취임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이차현과의 관계에 대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재희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 ▼ △

취임식이 끝난 후, 연회가 시작되었다.

회장인 이형우와 그 옆에 선 이현.

처음 아들을 소개하는 자리였기에 형우는 다른 때보다 더 각별하게 신경 썼다. 하다못해 연회장의 조명 하나, 샴페인 종류까지도 깐깐히 지시했다.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아들이 죽고 난 후, 사라진 혼처 자리에 다들 조금은 소원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들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그 어느 때보다 자본주의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 왔다.

“어우 이 회장님 아주 든든하시겠습니다. 오늘 보니 아드님 눈빛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가요. 하긴, 제가 이 눈빛이 마음에 들어서 아들로 삼았습니다.”

다소 무례한 말에도 형우는 동요하지 않으며 받아쳤다.

벌써 몇 번째 인사인지.

혹시나 실수할까 싶어 차현은 정신을 단단히 잡아야 했다.

사전에 사진과 인물 설명을 보며 얼굴을 다 익혀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럼에도 사람이 너무 많이 헷갈릴 지경이었다. 차현은 머릿속에 입력된 인물을 떠올리며 인사를 해야 했다.

“차현아.”

“네, 회장님.”

대화를 나누던 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려 차현을 불렀다.

그러자 차현이 형우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히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비 목이 마른 데, 뭐 마실 거 없니.”

“아, 잠시만.”

그 뒤에서 듣고 있던 비서가 득달같이 물병을 들고 왔지만, 차현이 오른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직원의 쟁반에 있던 와인 잔 하나를 들어 형우에게 건넸다.

“회장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와인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들이 주는데 마셔야지.”

굳이 아들이라 칭하며 형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친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둘의 분위기는 매우 비슷했다. 외모뿐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너도 한잔하지 그러니.”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몹시 목이 말라 와인 한잔이 매우 간절했으나 벌컥벌컥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그는 비서의 손에 들린 물병을 가져가 한 모금 머금었다.

“아들 나이가 어찌 되나. 어떻게 나한테까지 아무 소리 안 할 수가 있어.”

“하하. 미안하게 됐네.”

그와 막역하게 지내는 ST 그룹 회장인 최홍수가 아쉬운 내색을 했다.

자식들을 결혼시켜 사돈을 맺자고 했으나, 형우의 아들이 명을 달리 하여 그 약속은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이후 홍수의 딸은 여러 번의 맞선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혼처가 없어 아직 고사 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술 사는 거로 안 되겠네.”

“섭섭해하지 말게나. 자네는 이해 좀 해 줘.”

“그럼 아들도 좀 데리고 나와서 같이 마시지. 라운딩도 같이 가고. 자네, 괜찮나?”

“물론입니다.”

차현이 옅은 미소를 그리며 화답했다.

“자리 좀 만들어 봐. 내 우리 딸도 데리고 나갈 테니.”

그때 홍수가 본마음을 드러냈다.

최홍수의 딸 최유영.

30대 초반인 그녀는 현재 아트센터의 관장을 맡고 있었다.

차현의 입매가 조금 딱딱해졌다.

밥이나 같이 먹자는 홍수의 한마디가 다른 뜻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차현이 넌 괜찮겠니.”

“아…….”

“자네가 아는지 모르지만, 우리 딸 미모가 어마어마해. 다행히 날 안 닮았거든.”

“그건 맞는 말이긴 하네.”

형우가 우습다며 맞받아쳤다.

이 자리에서 난감한 건 차현뿐인 듯했다.

취임식 이후 결혼 관련 자료가 곧 보도될 예정이라는 건 형우도 알고 있었다.

뭐라 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형우가 다 마신 잔을 차현에게 건네고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난 이 사람이랑 술 한잔하러 가야겠어. 자리 마무리 잘하거라.”

“알겠습니다.”

차현만 알아볼 수 있게 눈매를 꿈쩍한 형우는 홍수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후.”

아직 연회장 곳곳에 인사해야 할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형우가 자리를 비켜 주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차현이 숨을 고르며 물병을 모조리 비웠다.

그제야 연회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어딜 간 거야.”

분명히 이곳까지 온다고 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만나네요.”

그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민준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차현을 보고 있었다.

그날 밤, 도로 한복판에서 주먹을 휘두른 이후 오랜만이었다.

“아주 근사하네. 이 브랜드, 내 최애였는데. 바꿔야겠다. 기분이 나빠서.”

가까이 다가온 민준이 차현의 슈트 재킷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이곳에서까지 정색할 수 없기에 차현은 억지로 입꼬리를 당겼다.

“오랜만이네요.”

“나도 썩 오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아버지가 가야 한다고 어찌나 성화이시던지. 형들 대신해서 내가 왔어요.”

“귀. 한. 걸음 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차현이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유명한 정 재계 사람들이 참석한 만큼, 고개만 돌리면 인사해야 할 사람들이 천지였다.

민준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망나니로 살아 유명하긴 했지만, 배경인 수인 그룹을 무시할 수 없기에 최대한 예를 갖춰야 했다.

속은 뒤틀릴망정.

“은재희가 안 보이네.”

그때, 민준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차현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신경, 끄시죠.”

“그쪽 애인, 아아 곧 결혼할 사이라 애인은 아닌 건가.”

“김민준 씨.”

“그렇게 험한 눈으로 보지 말아요. 쫄리잖아.”

가까이 다가온 민준이 이를 사리물며 직시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위에서 흘긋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 민준의 도발에 동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을 노리고 이렇게 속을 긁어 대는 거였으므로.

차현이 잠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김민준 씨가 지금 만나고 있는 최소율 씨 말입니다.”

“뭐?”

갑자기 나온 소율의 이름에 민준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최소율은 재희의 방송국 후배 아나운서였다.

민준과 은밀히 만나고 있다는.

“그쪽 애인이라고 하던데.”

“뭔 개소리야, 지금.”

“오늘 연회 끝나고 오붓, 하게. 한잔하자고 하길래.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씹.”

“그러니까.”

차현이 민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며 빙긋 미소를 흘렸다.

“애인 단속, 잘하라고.”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어머, 재희야!”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재희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어릴 적부터 친구인 윤정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해 전, 그녀가 선을 보았던 남자인 동혁도 함께였다.

“아, 오랜만이네.”

“너 웬일이야? 이런 데를 다 오고?”

“뭐, 어쩌다 보니……”

재희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런 자리에 다니기 꺼렸던 이유.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그간 그녀가 봐 온 선 상대자들이 무수히 많았기에. 그리고 그 애프터가 썩 유쾌하게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네요, 은재희 씨.”

“안녕하세요.”

동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묘한 미소를 그리며 인사했다.

그와는 몇 번을 만났었더라. 태경의 강력한 추천으로 제법 만났던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는 사이 윤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모임도 안 나오고. 너 보고 싶으면 나 뉴스 켜서 본다니까?”

“뭘 그렇게까지.”

윤정은 무척 호들갑이었다. 저와 최동혁이 선을 봤었다는 걸 윤정도 알고 있을 텐데.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는 듯했다. 재희만 이 자리가 썩 불편했다.

“야, 은재희! 너 언제 왔어?”

그때 또 이름이 들려왔다. 어쩌다 보니 그녀의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용히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그 계획은 실패인 모양이다.

재희의 동그란 이마에 설핏 주름이 잡혔다.

“아, 가희야.”

“얘 진짜 오랜만이네. 몇 년 됐나 봐.”

“그치. 근데 여전하다 야. 예쁘고 우아하고. 누가 은재희 아니랄까 봐.”

윤정이 맞받아치며 눈을 흘겼다. 어릴 적부터 친했지만,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는 모두 적당한 가면 속에 살고 있었다.

앞에서는 웃고 있으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런 관계가 썩 달갑지 않아 재희는 점점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가희도 곧 결혼한대.”

“아 그래? 축하해.”

“응. 넌 언제 해?”

“나는 뭐. 아직 생각이 없네.”

“너도 빨리해야지. 의원님 대선 전에 하는 게 낫지 않나? 맞다! 근데…… 오늘 이차현 부사장 있잖아. 선본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라고.”

가희의 한마디에 와인 잔을 들고 있던 재희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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