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형 전자?”
차현을 살피는 태경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무려 5년 만이었으나 태경은 차현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지금 제 눈앞에 앉아있는 차현을 보며 태경은 실소를 터트렸다.
멀끔한 슈트 차림, 조금은 매서워진 눈매. 날렵한 턱선. 그리고 저 위풍당당한 태도까지.
조금 전 차현이 건넨 명함을 보며 다소 놀란 것도 사실이다.
재희가 결혼을 엎었다고 하기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었는데, 전화위복이 될 줄은.
“재희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차현은 부연 설명 없이 곧장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 이곳에 온 이유.
옆에 앉아 있는 재희를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은재희를.
가진 게 없어 헤어져야 했던 5년 전의 이차현이 아닌 이형 전자 부사장으로서.
“참 오랜만이네.”
태경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그러게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뼈 있는 차현의 한마디에도 태경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즐겁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엎었어, 재희 네가. 하하.”
태경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만 들어도 재희는 알 수 있었다.
지금 태경은 무척 흡족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밌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태경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죽일 듯이 난리 치던 5년 전 태경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혹시 차현에게 해가 될까 봐,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그의 손을 놓아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명치 끝이 저릿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아무리 사리사욕이 강한 아비였다고는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자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회장님께서 상견례 날짜를 잡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눈빛이 보통은 아니더니. 이형우 회장이랑 어떻게 엮인 사이인 거지?”
“제가 그것까지 말씀드려야 하나요.”
차현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재희를 데려가기 위해 그 고된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저토록 좋아하는 태경을 보니 사실 속이 뒤틀린다.
어차피 결혼으로 엮인다고 한들 태경에게는 단 하나의 이로움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태경이 얻을 수 있는 부분은 어쩔 수 없겠지만.
오로지 재희를 위해 버텨 온 5년이었다.
“패기 좋네. 이렇게 악에 받쳐서 돌아온 게 내 덕도 있는 것 같은데.”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차현의 잇새로 조소가 흘렀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은 의원님 덕분입니다.”
“그래. 좋은데 시집가서 살아. 그간 네가 모든 선 자리 마다해도 아비가 참은 보람이 있구나.”
“기대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결국 듣다 못 한 재희가 입을 열었다.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모습에 찬물이라도 끼얹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다고 흔들릴 것 같지도 않았으나 그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듯싶었다.
“그래도 사돈이 이형인데 마침 대선 앞두고 참 잘되었네.”
“그럼 날짜 잡아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차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희의 손목을 잡은 채.
태경은 소파에 기대고 앉아 시선을 들어 그를 직시했다.
“아아, 이 부사장.”
이렇게 거만한 모습이라니.
아무리 차기 대선 유력 후보라고 하나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자네도 잘 알겠지만, 우리 재희가 좀 아깝긴 해. 인물도 좋지, 능력도 있지. 게다가 아비도 곧 청와대로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
가만히 듣던 차현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꽉 말아 쥔 주먹은 하얗게 도드라진 채였다.
“이형의 지원, 기대하겠네.”
“뭘 착각하시나 봅니다.”
차현이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옆에서 듣던 재희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제 아버지의 행태에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은태경 의원님 성 추문 문제를 제가 해결했고, 그 대가로 재희와 결혼하는 것뿐이라서요.”
“뭐 그렇긴 하지만 자네도 어차피 재희 좋아서 하는 결혼이니 서로 윈윈 아닌가?”
“아버지!!”
결국 재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이라도 울 듯, 그녀는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차현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너도 좋은 거 아니냐. 저 자식, 아니 이 부사장 좋아서 결혼도 안 하고 있었던 걸 아비가 모를 줄 알아?”
대화를 하면 할수록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밑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는 건지.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 재희는 이를 사리물며 눈물을 참아야 했다.
“3년.”
“뭐?”
“재희와 결혼 말입니다. 계약 결혼이라서요.”
“계약, 결혼?”
예상치 못한 말인지 태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차현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도 은재희 좋아서 결혼하는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필요해서 하는 겁니다. 이용하는 것뿐이니.”
“저, 저놈이?”
“그러니, 그 어떤 기대도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원해 드릴 생각 없지만, 회장님께서도 제 생각과 같으실 겁니다. 상견례 때 뵙죠.”
차현은 그녀의 손목을 그러쥔 채 집을 나섰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오면서도 재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 ▼ △
‘들어가.’
방송국으로 데려다준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다시 버리기 위해 결혼하는 걸 텐데.
예전처럼 다정했던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 보면.
“하아.”
재희가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게 야욕이 많은 아비를 둔, 제 탓.
이번 주, 취임식이 끝나고 나면 그와의 결혼 소식이 보도될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생각을 하자 머릿속이 지끈거린다.
똑똑.
“네.”
그때 문이 열리고 직속 후배인 민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치를 보며 들어온 민경은 재희의 앞에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국장님께서 가져다주라고 하셔서요.”
“국장님이? 뭔데?”
“저도 모르겠어요.”
재희가 그것을 들어 안에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타이틀을 본 재희의 눈동자가 배로 커졌다.
“이게…….”
“그거 확인하시면 국장실로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뭐 지금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만 전달하셨어요. 근데 이게 뭐예요? 부사장?”
그 안에 든 대본의 내용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녀가 진행하는 뉴스 중 화제의 인물을 초대하는 코너가 있는데 그 코너의 인물에 대한 정보였다.
[베일에 감춰진 이형 전자 부사장에 대하여…….]
그것을 쭉 살펴보던 재희는 헛웃음을 흘렸다.
모든 내용이 차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아까 그 소율 선배가 이번 주에 저기 간다고 하더라고요.”
“어딜 가는데?”
“그 취임식이요.”
재희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리고 너희 방송국 아나운서도 한 명 온다던데.’
‘누구요?’
‘이름이 누구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