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7/62)

17.

“마실게요.”

긍정의 답에 차현은 와인 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재희는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았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 그녀는 이를 사리물며 참아 냈다.

챙챙-

커다란 와인 잔 두 개를 한 손에 든 탓에,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주방을 울렸다.

“…….”

와인을 따르던 그가 잠시 행동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재희.”

“…….”

“……고개 들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잘게 떨렸다. 재희는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왜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 건지, 차현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식겠네.”

다정한 그의 말투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속이 안 좋거나 아플 때면 차현은 늘 누룽지를 끓여 주곤 했었다. 별거 아닌데도 자신이 끓이면 그 맛이 나지 않아 먹지도 못했던.

아프거나 힘들 때마다 먹고 싶었던 음식이었는데, 차현과 이별 후엔 단 한 번도 먹을 수 없었다.

살갑게 챙겨 주던 그가 생각나서.

그런데 이걸 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흐흡.”

구수한 누룽지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어차피 헤어질 거면서, 잘해 주지나 말지.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

차현은 와인을 다 따른 후, 그녀의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한 모금 마시자 혀끝에 알싸한 알코올의 맛이 느껴진다.

뭐가 그리 서러운 건지. 재희는 한참이나 울었다.

재회 후, 이렇게 울 때마다 그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고개를 슬쩍 든 그녀가 각티슈를 여러 장 뽑아 얼굴을 닦아 냈다.

말갛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번져 있었다.

“후우.”

그녀는 숨을 몰아쉰 후,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한 숟가락 크게 떠 입 안에 넣었다.

식긴 했으나 고소한 누룽지는 술술 넘어갔다.

참.

몇 년이 지났어도 그가 해 준 맛은 그대로였다.

열심히 숟가락질하던 재희는 금세 한 그릇을 비워 냈다.

제법 양이 많았음에도 바닥까지 드러내며 먹는 모습에 차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말도 잘 듣고, 착하네.”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흘겼다.

그러자 차현이 픽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직시했다. 재희는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사실 더 먹고 싶었지만, 차마 자존심이 상해 더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먹고 싶으면 더 먹어. 네 양을 내가 아는데.”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그가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정말 재밌어 보이네요, 이차현 씨는.”

“재밌다고 했잖아.”

“나 앞에 데려다 놓으니 이제 속이 시원해?”

“아니. 아직 멀었어.”

그가 곧장 답했다.

“어림없지. 설마 앞에 데려다 놓는 걸로 끝일까.”

그가 와인을 쭉 마시자 큰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잘해 주는 것 같다가도, 아닌 것도 같고.

무슨 일이 생길 때면,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까 한숙과 있던 일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오늘은 내 옆에서 자.”

“……!”

옆에서 자라는 말에 재희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새삼 처음 듣는 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심장이 내려앉는 건지.

재희는 급하게 와인 잔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 더 놀리고 싶게.”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급하게 술을 마셔서인지, 아니면…….

민망함에 술을 들이켜자 그가 픽 웃음을 흘리며 병을 들었다.

“이것만 마시고 들어가자.”

△ ▼ △

짝! 짝!

먼저 방에 들어간 그녀는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뺨을 때렸다.

근래 잠도 자지 못해 너무 피곤했던 탓에 술을 마시자 잠이 쏟아진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재희는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얼른 침대 위로 올라가 눈을 감았다.

쿵.

조용한 방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꼴깍.

재희는 몰래 침을 삼켰다.

분명 졸렸었는데. 차현이 들어오고 잠이 확 깬 기분이었다.

“벌써 잘 리가 없을 텐데.”

차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평소 잠이 들기까지 최소 10분 이상 뒤척이던 그녀였다.

지금 재희는 일부러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드등만 켜 놓은 탓에 침실은 무척 어두웠다. 차현이 리모컨을 들어 조도를 높였다. 그제야 이불을 꼭 쥔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불 끝을 걷고 옆에 앉자 재희가 움찔 놀라며 조금 더 눈을 꾹 감았다.

“연기나 잘하든가.”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들고 온 약상자를 펼쳤다.

“눈 떠 봐.”

“…….”

“약 발라 줄 테니까, 눈 떠 보라고.”

약?

갑자기 무슨 약을…….

재희는 눈을 감은 채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눈 떠. 키스하기 전에.”

결국 재희는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지척에서 시선이 뒤엉켰다. 한심하다는 듯 웃는 그를 보자 민망함은 배가되었다.

“키스하는 건 또 싫은가 봐?”

빈정거리기는.

그녀가 입술을 뾰족이 내민 채 눈을 도르르 굴렸다.

차현이 알코올 솜을 들어 그녀의 쇄골 쪽 상처에 톡톡 두드렸다.

“으읏.”

아릿한 고통에 입술 새로 신음이 절로 흘렀다.

목에 무슨 상처가 난 걸까. 재희의 얼굴이 단숨에 이지러졌다.

“아프다고!”

“성질은. 좀 참아.”

쓰라린 감각에 저도 모르는 사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재희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원망 가득한 눈빛을 했다.

“아…….”

결국 그녀가 그의 손목을 쥐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안 할래.”

“손 치워.”

“아프다니까?”

“거의 다 했어.”

“……으.”

차현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제압한 채 소독했다. 그러고는 그 위로 연고를 조심히 발라 주었다.

뉴스를 진행하는 내내 거슬리던 상처였다.

실제로 코앞에서 보니 제법 깊게 패여 있었다.

손톱자국이었기에 그대로 두면 흉터가 생길 만큼.

“…….”

그녀의 목에 있던 그의 시선이 턱 쪽으로 옮겨졌다. 화장에 가려 있을 땐 몰랐는데 턱 라인 쪽에도 흉터가 나 있었다.

차현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재희가 그에게 물었다.

차현은 아무런 말 없이 새 알코올 솜을 들어 상처를 소독했다.

“아…….”

“뭘 하고 다녔길래 얼굴이 이 모양이야.”

그의 타박에 재희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까 한숙과 한바탕할 때,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씻을 때 아팠구나…….

아무 생각 없이 샤워를 했는데, 제법 상처가 깊은 듯했다.

“그만해. 괜찮으니까.”

그만하라는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 차현은 연고까지 바르고 나서야 약상자를 닫았다.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은 그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이 민망해 재희가 옆에 있던 이불을 슬그머니 끌어와 목 끝까지 덮었다.

그러고는 그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현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그녀의 옆쪽으로 몸을 뉘었다.

“가까이 와.”

그의 말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고개를 휙 돌리자 재희는 몸을 웅크린 채 침대 끝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어이가 없어서.

쯧. 차현이 혀를 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무슨 짓이라도 하기 전에, 말 듣지.”

“그냥 자면 되지 왜 계속 가까이 오래?”

“그러다 너 떨어져.”

“괜찮대도.”

은재희 고집은 여전했다. 차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으앗!”

그때였다. 불쑥 들어온 단단한 팔이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갑자기 몸이 확 당겨진 탓에 놀란 그녀의 눈이 배로 커졌다. 재희는 입술을 작게 벌린 채 눈만 깜빡였다.

“그러게. 내가 가까이 오라고 했잖아.”

“……속이 너무 안 좋아서. 그, 그냥 자죠.”

재희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부터 다리까지. 맞닿은 등에서 그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 보고 누워.”

“오빠.”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고압적인 목소리에, 결국 재희는 입술을 말아 물며 천천히 뒤로 돌았다.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차현이 그녀를 조금 더 품으로 끌어안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의 짙은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몸을 물리려 해 봐도 단단히 잡은 그의 팔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긴장감에 호흡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졌다. 갈 곳 잃고 방황하던 그녀의 손이 그의 티셔츠를 꾹 움켜쥐었다.

“재희야.”

나긋한 어조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코앞에서 보고 있는 탓에 그녀의 뽀얀 얼굴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짙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차현의 입꼬리가 길게 말렸다.

“……!”

그때, 그가 슬쩍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