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은재희, 내려.”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차 안으로 흘러들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듣기만 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대체 왜 여기…… .
모른 체 가 줬으면.
분명 이곳까지 따라왔다면 조금 전에 있던 일을 다 봤을 것이다.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재희는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똑똑.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불러서 차 문 열기 전에 나오지.”
차현은 꾹 참고 말을 내뱉었다.
조금 전, 방송국 정문에서 그녀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재희의 어머니를 보았다.
오랜만에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 재희를 괴롭히던 사람이었다.
차현은 급하게 차를 몰고 떠나는 그녀의 뒤를 밟았다.
한숙과 한바탕하고 차에 탄 재희는 운전하는 것조차 매우 불안해 보였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센 그녀였으니 어지간해서는 문도 열지 않을 것이다.
“후.”
그가 크게 숨을 고르며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야. 문, 열어.”
차현이 씹어뱉듯 낮게 읊조렸다.
고개를 든 그녀가 얼굴을 벅벅 닦고는 비상등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핸들을 움켜쥐자 차현이 걸어가 차 앞을 가로 막고 섰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 뒤엉켰다.
지금 상태로 운전을 한다면 분명 사고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차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를 빤히 보던 재희가 결국 체념한 듯 버튼을 눌렀다.
딸깍.
문이 열리자 차현이 운전석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내려. 운전은 내가 할 테니.”
그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고집 피워 봐야 결국 이차현이 원하는 대로 될 테니.
재희는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향했다. 크게 숨을 몰아쉬자 입술 새로 하얀 숨이 흩어졌다.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르던 그녀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적막이 흘렀다. 재희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지잉. 지이잉.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에서 자꾸만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재희는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꺼 버렸다.
보나 마나 한숙일 테니.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결국 참다못한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봤으면서.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더 비참하다.
“뭘 물어봐야 하는데.”
차현이 곧장 답했다.
재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레 보듯 떼어 냈던 한숙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터진 입술, 멍든 얼굴. 산발한 머리.
자신의 기억 속, 무척 고왔던 엄마는 정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전혀 없던.
무관심하고 매정한 태경에게 지쳐 사랑을 찾아 떠난 엄마가 아주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그 사랑 하나 때문에 아직도 차현을 잊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호구처럼 맞고는 살지 말았어야지.
“집에 데려다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내 집으로 가.”
“이차현 씨.”
“그러려고 데리러 온 거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잔뜩 젖어 있다.
신호를 받아 잠시 정차한 틈을 타, 차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잔뜩 짓무른 그녀의 눈가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야.”
“이렇게 매일 보는 거면, 다를 바 없지 않나요?”
“그럼 옮기든가. 사람 부를 테니.”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재희가 그를 직시했다.
“원래 이렇게 고집이 셌어요?”
갑자기 버럭 하는 그녀의 모습에 차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 그게 또 억울한 모양이었다.
평소에 아닌 것은 단호했던 그였지만, 그녀와 연애를 할 때는 대부분 은재희에게 맞춰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러는 제 모습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 듯했다.
“응. 네가 몰랐던 거고.”
어차피 곧 결혼할 텐데. 그전까지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차현과 재회하고 적응도 하기 전, 많은 일이 터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시도 때도 찾아오는 그 때문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집으로 갈 거예요. 내일 출근하려면 옷도 필요하고, 또…….”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고 있는 건가?”
“핑계 아니고 사실이잖아요.”
“네 취향대로 싹 사 오라고 할 테니까, 그만 조용히 가지.”
고압적인 말투에 재희는 결국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하루라도 좀 편히 잤으면 했는데. 게다가 악몽에 시달려 근래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도 틀린 모양이다.
“……하.”
재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 ▼ △
샤워를 마친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소파에 앉았다.
그 사이, 차현도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바스로브 차림이었다.
재희는 그를 흘긋거리며 애꿎은 머리카락만 만질 뿐이었다.
“말리고 나오지.”
“알잖아요. 원래 안 말리는 거.”
“나보고 말려 달라는 거야?”
“…….”
아차, 싶어 재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에 머리를 말리지 않는 그녀의 습관 때문에, 드라이기를 들고 따라다니는 건 늘 차현의 몫이었다.
한 번씩 감기에 걸리면 호되게 앓고 지나가던 그녀였으니까.
차현은 다정히 머리카락을 말려 주곤 했었다.
“아니거든?”
톡 쏘는 그녀를 보며 그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입어.”
그때 차현이 들고 있던 옷 한 벌을 그녀에게 던지듯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것도 입고.”
얼떨결에 받아 든 그녀의 눈매가 와락 일그러졌다.
조금 전에 준 것은 옷이더니, 이번에는 속옷이다. 그것도 무척 빨간색의 레이스 속옷.
“이게 무슨…….”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자 차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왜. 문제 있어?”
“이것도 샀어?”
“자꾸만 까먹나 본데.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어?”
“…….”
“옷 사이즈, 속옷 사이즈. 하다못해 네 반지 사이즈도, 내 아래에서 어떤 표정인지도 아는데.”
그 말을 들은 재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실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야한 속옷을.
그것을 들어서 살피던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소파에 내려놓았다.
“싫으면 계속 그러고 있든가. 사실 난 아무것도 안 걸치…….”
“변태.”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 재희가 말허리를 뚝 자르며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바스로브의 앞섶을 여미며 슬쩍 몸을 돌렸다.
“변태는 무슨. 입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그리고. ”
“……”
“집 되도록 빨리 정리해. 결혼 전에 집부터 합칠 거니까.”
아까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재희는 그가 준 옷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차현은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온종일 정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전에는 차현의 집에서, 점심에는 그 레스토랑에서. 그리고 생방송 전에는 빈속이 편할 것 같아 물만 마시다 보니 이 시간이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뭘 먹는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거실까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리도 제법 하는 그였기에 뭘 만들고 있는 듯했다.
재희는 그가 나오기 전 얼른 옷을 걸쳤다. 차현의 것인지 커다란 티셔츠를 입자 그녀의 허벅지의 반을 가릴 정도로 옷이 흘러 내려왔다.
“들어와.”
그때 차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없이 곧장 일어나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가기 뭐해 재희는 아닌 척 허리만 꼿꼿이 세우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계속 그렇게 앉아 있을 건가?”
계속 들어가지 않자 결국 차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고 들어오기 전에 들어와.”
“참나.”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재희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주방에서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뭐 해, 앉지 않고.”
재희는 결국 식탁 의자에 조심히 엉덩이를 가져다 댔다.
기다란 대리석 식탁은 족히 열 명도 앉을 만큼 큰 편이었다. 샹들리에도 과할 만큼 화려한 편이었다.
으리으리한 주방을 둘러보는 사이 그녀의 앞에 그릇 하나가 놓였다.
커다란 그릇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거는…….”
음식을 본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당황한 그녀와는 달리 차현은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와인, 한잔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