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재희는 잠시 집에 들러 휴식을 취했다.
스트레스가 상당했기에 조금이라도 쉬고 나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몸이 좋지 않아 회의는 불참한다고 미리 연락해 두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하.”
머리가 깨질 듯한 차가운 물을 마시자 그제야 정신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다.
생방송까지는 단 세 시간.
리허설도 하려면 서둘러서 준비해야 얼추 시간이 맞을 듯했다. 빠르게 옷을 입고 화장을 한 그녀는 현관 앞에서 매무새를 점검했다.
“엉망이네, 정말.”
여전히 눈은 퉁퉁 부은 채였다. 아이스팩을 올려 두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복잡한 마음도, 일상도. 어느 것 하나 정리된 것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재희는 크게 숨을 몰아쉬며 집을 나섰다.
“눈이 오네.”
핸들을 쥐고 잠시 정차한 사이, 전면 유리에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눈이 온다고 했던가.
조금은 어두운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희가 작게 미소 지었다. 운전할 때 눈이 오는 건 무척 싫긴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하얀 눈은 보기엔 예쁘긴 했으니까.
지이잉.
버튼을 눌러 창을 조금 열자,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겨울 냄새가 좋아 재희는 창을 조금 더 내렸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문자의 내용을 확인한 재희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끝나는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차현이었다.
그의 문자만 봐도 가슴이 먹먹하다.
표정 관리 하나 하지 못하고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아까 그러고 헤어졌기에 다시 또 데리러 오려는 모양이다.
앞으로 어떻게 같이 살아야 할지.
다른 사람이 아닌, 차현이었기에 좋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의 차는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새 많이 왔네.”
주차장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9cm의 힐을 신었기에 그녀는 최대한 조심히 발을 디뎠다.
방송국 로비에 들어선 그녀는 옷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정리했다.
그런데 조금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자, 사람들이 로비 한가운데에 몰려 있었다.
재희는 대수롭지 않게 그곳을 지나쳐 걸었다.
“내가 급해서 그래요. 얼굴만 한 번 본다잖아요.”
“직접 연락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내 딸이 여기 간판 아나운서라니까요? 내가 딸 얼굴 한 번 보겠다는데 왜 이렇게 막는 거야? 내가 은재희 엄마라고!”
로비를 걷던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재희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고개를 돌리자 복잡한 인파 속 얼굴이 엉망인 여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이사를 하고 집 주소를 알려 주지 않아 방송국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며칠간 울리는 전화를 내내 무시했더니…….
모른 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어머! 재희야!!”
그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앞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빠르게 다가온 한숙이 재희의 팔을 덥석 잡았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대체!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재희는 입술을 짓이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흘긋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은태경의 아내로 곱게 살던 한숙은 삼류 인생을 살고 있었다.
마치 작부의 모습이었다.
낡은 옷, 터진 입술. 산발인 머리하며…….
너무 황당한 모습에 재희의 잇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 그럼.”
“너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가 있어!”
돌아서는 그녀를 잡으며 한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재희는 떨리는 손을 말아 쥐며 숨을 골랐다.
“여기, 사람 좀 불러 주세요. 이상한 사람이 자꾸만 붙잡는다고.”
“재희야!”
재희는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한숙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한숙이 다급하게 다시 재희의 가방을 잡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작은 몸싸움이 이어졌다.
딸의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손을 휘두르는 한숙 때문에 재희의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럴 거야, 정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진짜 미치셨나 보네요. 그만 좀 하시죠.”
재희는 이를 꽉 깨문 채 씹어뱉듯 속삭였다.
그사이 보안 직원 둘이 다가와 한숙의 양쪽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안 놔? 은재희 너! 꼭 네 애비 닮아서 이렇게 독하지이!”
한숙은 끌려 나가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재희는 숨을 골랐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오후에 시작된 회의는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 마무리되었다.
취임식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지만, 귀국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업무 파악이 덜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차현은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 했다.
사실 그녀와의 일이 아니었다면 퇴근도 사치일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이만 퇴근하세요.”
“들어가십시오.”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물리고 차현은 키를 받아 들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본사에서 방송국까지는 20분 남짓.
그는 천천히 액셀을 눌러 밟았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차는 도로를 빠르게 내달려 방송국에 도착했다.
“하아.”
주차를 한 그는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뱉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자 아직 그녀가 뉴스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차현이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태블릿을 들었다. 앱을 켜자 그녀의 얼굴이 화면 가득 찼다.
그는 운전석 시트에 몸을 묻은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 소식입니다. 사흥 기업이 칠준을 인수 합병하기로 하면서……]
반듯하게 정리한 머리, 옅은 화장. 단정한 의상.
“오늘도 여전히 예쁘네.”
그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렸다.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재희의 하얀 목에 그어진 붉은 스크래치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
눈에 띌 만큼, 상처는 제법 심한 편이었다.
낯빛도 안 좋은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때보다 그녀의 목소리 톤이 조금은 불안정해 보이는 듯했다.
톡, 톡.
그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태블릿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티를 내는지.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사이 어느덧 뉴스는 끝나 있었다.
탁.
태블릿을 옆으로 내려 둔 그가 로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요새 왜 이래?”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방송 실수를 할 뻔했다.
아니,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방송 사고를 내고 말았다.
멘트를 하지 않아 몇 초간 오디오가 비자, 그녀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인이어를 타고 고막을 울렸다.
로비에서 한숙을 만난 이후, 재희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
돈이 떨어질 때면 이렇게 찾아오던 엄마였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하필 방송국이라는 장소가 문제였다.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아 연락을 받지 않았더니.
결국 이런 일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시말서 써서 제출해. 자꾸만 이런 구설수 만들기만 해!”
재희는 허리를 숙여 국장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나가라는 국장의 손짓에 그녀는 뒤로 돌아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뉴스를 진행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겨 그녀는 대기실로 들어왔다.
“하.”
재희는 소파에 앉은 채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인생이 안쓰러워 외면하지 못한 대가가 이렇다니.
김민준의 일을 해결하자 이번에는 엄마가 문제였다.
목을 죄는 갑갑함에 그녀는 서둘러 가방을 들고 대기실을 나섰다.
어서 방송국이라도 벗어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빠르게 주차장을 걷는 찰나였다.
탁.
별안간 손목이 잡히자 재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한숙이었다.
독기 어린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자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린다.
“뭐? 이상한 사람? 어떻게 네가 엄마 뒤통수를 칠 수가 있어, 어떻게!”
한숙은 악에 받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실외였음에도 주차장에 한숙의 목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그만해요, 제발.”
“너 돈도 많으면서 엄마 도와주는 게 그리 힘들어?”
온종일 긴장했는데, 또다시 원점이다.
싸울 기력조차 없어 재희는 사정하듯 입을 열었다.
“엄마란 소리도 하지 말아요.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엄마 소리를 해. 뻔뻔하게.”
“낳아 준 게 어딘데. 네 반반한 낯짝이 다 날 닮아서 그런 거 몰라? 고마운 줄 알아야지.”
“누가 낳아 달라고 했어? 대체 왜 이래, 나한테!”
재희가 소리를 지르자 한숙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대든 적 없던 딸인데.
“재희야.”
“더는 연락하지 말아요. 당신, 나한테 엄마 아니야. 나한테서 그만큼 돈 뜯어 갔으면 이제 그만하라고요. 더 줄 생각 없으니까.”
그녀는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한숙이 놀라며 재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재희는 무시한 채 차에 올라탔다.
쾅쾅! 쾅!
한숙이 다급하게 창을 두드렸다.
“미안해, 재희야. 엄마가 미안해. 응?”
그녀는 못 들은 척, 시동을 켜고 액셀을 밟았다. 눈물이 차오른 탓에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바들거리는 입술을 씹으며 재희는 핸들을 더 꽉 움켜쥐었다.
재희의 하얀 뺨에 눈물이 떨어졌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 건지.
방송국을 벗어나 한참을 달리던 그녀가 한쪽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흐흡.”
똑똑.
그때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재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은재희, 내려.”
익숙한 목소리가 차 밖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