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13/62)

13.

“손은…… 놓고 가요.”

놓아달라는 말이 무색하게 차현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얽어 더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잡은 손을 슬쩍 당기자 가녀린 몸이 그의 너른 품에 풀썩 안겨들었다.

“앗.”

재희가 머쓱해하며 몸을 물리려는 순간, 차현이 한 팔로 재희의 허리를 감았다. 지척에서 시선이 뒤엉켰다.

“은재희.”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맞닿은 몸을 타고 흘러들었다.

재희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여전히 그를 보면 심장이 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와 달리, 저만 이러고 있다는 생각에 재희는 애써 아닌 척 표정을 다잡았다.

“고분고분하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나긋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너무 가까운 탓에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짙은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순간 훅 열이 올라 재희는 다른 손등으로 뺨을 찍어 눌렀다.

꼬르르륵.

“…….”

그때, 그녀의 배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못, 들었겠지. 왜 하필 지금…….

민망한 상황에 재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 보면 어제 저녁도, 아침도 먹지 않아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

“배고픈가 보네.”

“…….”

다 들은 모양이다. 재희는 미간을 좁히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침 먹고 가자.”

“아뇨. 괜찮아요.”

아닌 척했지만 민망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이차현 앞에만 서면 왜 자꾸 이런 일들만 생기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너 아침 꼭 먹는 습관 있잖아.”

“안 먹어요, 이제.”

사과 반쪽, 커피 한잔. 혹은 샐러드 등.

재희는 간단하게나마 아침을 챙겨 먹곤 했다. 그녀의 작은 습관 하나까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든지. 아, 그리고.”

알았다고 답을 한 그가 다시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두 번씩 안 물어볼 거야.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

차현은 그녀와 함께 호텔을 나섰다.

여전히 손을 잡은 채.

△ ▼ △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그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적막이 어색했던 것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재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형우 회장이라면…….

재희는 이 회장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도 여러 번 보도한 적 있는 사람이었다.

아들이 한 명 있던 것 같은데.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걸로 알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가 흘긋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차현은 무표정으로 핸들을 꼭 쥔 채였다.

서늘해진 인상 때문일까. 그에게서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풍긴다.

“왜.”

“네?”

“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렇게 훔쳐보지 말고.”

정곡을 찌른 한마디에 재희는 창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차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도착했어.”

그제야 높은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가 눈을 굴리며 밖을 살펴보았다. 그의 차는 천천히 차고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 회장님 어려우신 분이야.”

“알았어요.”

차현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형우가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절대 유하지 않다는 것을.

그런 형우가 그를 아들로 삼았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차현의 아버지가 형우를 대신하여 사고를 당했으나 사실 보상만 해 주면 끝날 문제였다.

이 회장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차현은 아직도 파악할 수 없었다.

“내려.”

한마디만 남긴 후 차현이 차에서 내렸다. 재희는 숨을 고르며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갑자기 그를 만난 것도 모자라, 그의 양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받으러 오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랄까.

너무 갑자기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태경에게는 아직 그 어떤 것도 설명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열을 내고 있을지.

가까이 다가온 차현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재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와 나란히 걸었다.

잘 가꾼 정원을 가로질러 돌길을 따라 걷자 멀리서 현관문이 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 여자가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차현과 재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재희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은미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며 해사하게 눈매를 접어 웃는다.

“뉴스 잘 보고 있어요.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예쁘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감사합니다.”

제법 친근하게 맞이해 주는 은미 덕에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다. 옆에 서 있던 차현이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왔습니다.”

“얼굴이 왜 이렇게 까칠해.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야?”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자주 와. 아니면 내가 가서 밥이라도 챙겨 줘야겠다.”

“번거로우실텐데 괜찮습니다.”

은미는 정말 친아들 대하듯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곱게 넘긴 헤어스타일. 단아한 원피스. 행동 하나, 그리고 나긋한 어조에서도 우아함이 묻어난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서재에. 아침은 아직이지?”

“인사드리고 곧장 갈 거라,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래도. 인사 왔는데 어떻게 밥도 안 먹고 가. 준비 다 됐어.”

“그럼 먹고 가겠습니다.”

그의 답에 은미의 얼굴이 환해졌다.

차현은 어릴 적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버지 손에 자랐다고.

그의 아버지가 형우의 운전 비서로 오래도록 일을 하셨기에 은미와도 어릴 적부터 봐 온 사이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위화감이 없다니.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릎은 좀 어떠세요.”

“그냥 별로 안 좋아.”

“다음 진료에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바쁜데 괜찮아. 회장님 나오신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고 형우가 걸어 나왔다. 은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형우에게 다가갔다.

“애들 왔어요.”

“같이 먹지.”

그들을 한 번 쓱 훑어본 형우는 먼저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 ▼ △

“갑자기 온다고 연락을 받아서, 차린 게 마땅치가 않아요. 어서 먹어요. 우리 현이가 드디어 사람을 데리고 왔네.”

“잘 먹겠습니다.”

은미는 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반면 은미의 옆에 앉은 형우는 아무런 말 없이 수저를 들었다.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인사를 온다고 해서 일부러 준비한 건가.

평소 이렇게 먹는다고 하기에는 조금 과한 느낌이긴 했다.

어려운 자리였기에 음식을 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재희는 억지로 젓가락을 들었다.

“취임식 끝나면 식 올리겠습니다.”

“은태경 의원은. 만나 본 거야.”

“아직, 입니다.”

형우의 목소리는 제법 날이 서 있었다. 차현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늘 믿었던 형우였으나 이번 일은 분명히 마뜩잖아 하고 있었다.

형우의 행간을 읽은 차현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재희는 눈치를 보며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회장이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재희 씨.”

“……네. 회, 장님.”

갑자기 부른 그 때문에 재희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 떨렸다. 형우는 여전히 젓가락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애랑 만났었다고 들었어요.”

“네. 말씀 낮추세요.”

형우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가를 정리한 그는 재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차현이 아들이 되고 싶다고 찾아오던 날.

형우는 사람을 시켜 차현에 대해 알아 오라 지시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차현을 봐 왔지만, 가족으로 들인다는 건 그런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그때, 재희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은태경의 장녀.

차현과 제법 오래 만났던 그녀는 갑자기 이별을 고했다고 한다. 형우는 그 배경에 은태경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자리가 썩 달갑지 않았다.

왜 아직도 잊지 못하고 굳이 은재희여야 하는 건지.

“내조, 잘해야 할 거다.”

“…….”

“어차피 임신하면 일은 못 할 테니 그전까지는 해도 좋고.”

임신…….

고개를 슬쩍 돌려 차현을 바라봐도 그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상견례는 언제가 좋겠니.”

“조만간 날짜 잡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커피 한 잔만 가져다줘요.”

“네.”

“먹고들 가거라.”

형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차현과 재희가 나란히 일어났다. 괜찮다는 듯 손짓을 한 후 형우는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먹고 있어. 아버지 커피 좀 드리고 나올게.”

은미는 직접 주방으로 들어갔다.

별안간 식탁에 둘만 남게 되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재희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더 먹어.”

“아뇨. 괜찮아요.”

그 역시 음식에는 거의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같이 뵈러 가지. 언제가 좋겠어?”

“글쎄요.”

지금 그의 위치가 달라졌다고 하나 차현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태경이었기에 덜컥 겁이 난다.

게다가 민준과 멋대로 파혼하고 설명도 하지 않아 태경은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와 같이 가기 전, 자신이 먼저 만나 대충 설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께는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뭐를.”

“더 먹지. 음식이 그대로네.”

그때 은미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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