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녀와 달리 차현은 이 상황이 퍽 즐거운 눈치였다.
마치 버리고 간 자신에게 복수라도 하듯.
꼭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놀리는 기분이었다.
재희는 여린 잇속을 씹으며 눈을 흘겼다.
“내가 뭘 했다고, 놀린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가 잠시 숨을 고르며 와인을 반쯤 비웠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의 입꼬리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재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 싫다고 버리고 간 여자, 그냥 쓰레기 자식이랑 결혼하든 말든 둘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 말을 들은 재희가 와인 잔을 꽉 그러쥐었다.
차현은 아직도 억울한 모양이다.
내가 왜 헤어졌는데.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하나도 모르면서.
그의 오해에 속이 상한다.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재희는 그 일을 온전히 묻기로 마음먹었다.
“일도 해결해 주고, 내가 결혼까지 해 주겠다는데.”
“……”
“최소한 고마운 기색이라도 보여야지.”
그의 말이 맞다.
지금 누구보다 아쉬운 건 자신이었으므로.
그런데 왜 이렇게 서운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차현의 손에 그녀의 턱 슬쩍 들렸다. 지척에서 시선이 얽혔다.
“은재희, 아직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되나?”
날 선 목소리에 명치끝이 저릿하다.
“내가 주제를 몰랐나 보네요.”
“알긴 해?”
재희가 입술을 꾹 씹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묻어난다. 어쩜 이렇게 가시 돋친 말만 할 수 있는걸까.
원망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도 그는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이차현 씨는 이 상황이 정말 재미있나 봐요.”
“응. 재밌어.”
잡고 있던 그녀의 턱을 놓으며 그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 싫다고 떠난 여자가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잔뜩 꼬리 내리고 있는데.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
“뭐, 라구요?”
“나 정도면 젠틀하지. 도도한 은재희 마음 상할까 봐 배려도 해 주고.”
배려.
늘 배려가 몸에 배어 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기분보다 그녀의 기분이 먼저였던.
정말 많이 변했구나. 재희는 자조 섞인 한숨을 흘렸다.
5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사이 참 많이 변해 있었다.
“정말 고맙네요.”
단 하나도 고맙지 않은 말투였다.
그녀의 뼈 있는 답에 차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만큼, 재희는 지금 화를 꾹 참고 있었다.
“은재희.”
차현은 앙칼진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재희의 성격을 차현도 모르지 않는다.
한없이 다정하고 애교도 많던 그녀였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그에게 이별을 말했다.
잔뜩 무너지는 얼굴을 하면서도.
‘그만해, 제발.’
매달리는 그에게 단호하게 말하던 재희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차현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드레스는 혼자 보러 가.”
“…….”
“뭘 입든지 난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잔을 들던 그녀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언제까지 놀려 줘야 하나.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 아직 좋아해서 데리고 산다는 거 아니니까.”
“착각 안 해요, 저도.”
공복에 마신 탓인지 재희의 양 뺨이 탐스럽게 물들어 있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차현의 시선이 깊어졌다.
“내일 오전에는 회장님 뵈러 갈 거야.”
“저 내일 오전에 일이 있…….”
“모든 일정은 나한테 맞춰. 어차피 그만두려던 일이었잖아.”
“오빠 너 진짜……!”
듣다 못한 그녀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겨우 다잡고 있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진 모양이다. 차현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말해.”
“대체 나랑 왜 결혼해?”
“궁금해?”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 많을 거 아냐. 게다가 부사장이라며? 근데 왜 굳이 나랑 결혼하겠다는 거냐고. 혹시 아직도 나 못 잊은 거 아니고?”
결국 취기에 속에 있던 말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씩씩거리며 열을 내는 그녀와는 달리 차현은 여유롭게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그럴 리가. 날 못 잊어서 결혼 못 한 건 너잖아, 재희야.”
“못 잊었다고 누가 그래, 대체!”
재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차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엄지로 손등을 뭉근히 매만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많이 취했네.”
“이거 놔.”
잡힌 손을 흔들었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씩씩 숨을 몰아쉬던 재희는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말리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흥분하고 싶지 않았는데, 살살 속을 긁는 그가 원망스럽다.
아니, 무척 못마땅하다.
진짜 서러워서, 내가.
“어디 가려고.”
“화장실 가요, 화장실!”
버럭 소리 지르자 차현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놓아주었다.
나쁜 놈.
그녀가 몸을 돌리자 차현이 검지로 방향을 가리켰다.
“욕실은 저쪽. 들어간 김에 샤워도 하고 나와.”
재희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욕실로 향했다.
△ ▼ △
“여기서…….”
그녀를 발견한 차현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들어간 지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욕실에서 자고 있을 줄은.
기다란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재희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쯧.
차현이 혀를 차며 그녀를 앞으로 안아 들었다. 빈속에 술만 쏟아붓더니 결국 완전 취한 모양이다.
이렇게 안아도 세상모르고 자는 걸 보면.
그녀를 안고 차현은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
침대에 눕히자 재희가 옆으로 몸을 웅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차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세수를 했는지, 곱게 했던 화장이 반쯤 지워진 상태였다. 한껏 달아오른 얼굴은 조금 열기가 식어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하얀 피부, 기다란 속눈썹. 동글동글 오뚝한 콧방울. 그리고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입술에 한참 머물렀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을 알기에 순간 얼굴로 열이 확 올랐다.
“내가 미친놈이지.”
그가 자조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엉망으로 화장을 지우고 있어도 예쁜 걸 보면, 자신도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하다.
“후.”
크게 숨을 몰아쉬며 차현은 정신을 다잡았다.
결혼까지는 딱 두 달.
몇 년을 기다려 놓고 그 두 달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건지.
이렇게 옆에 있을 때마다 무척 곤혹스러웠다.
고롱고롱 잠든 그녀를 한참 동안 보던 차현은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도장 찍듯 입술을 꾹 눌렀다.
“으음.”
잠시 뒤척이던 그녀는 이내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차현은 그녀의 곁에서 한참이나 머물렀다.
△ ▼ △
“잘 어울리네.”
차현이 재희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굳이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도 차현은 이른 아침 비서에게 옷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단아하고 청순한 네이비 컬러의 원피스였다.
하얀색의 힐 또한 우아함을 배가시켰다.
슈트로 갈아입은 그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시계를 골라 들었다.
“궁금한 거 있어요.”
“말해.”
그의 옆에 선 재희는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무슨 얘기이기에 저러는 건지.
거울을 보던 차현이 의아한 낯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회장님이 어떻게 아버지가 되신 거예요. 정말 아버지예요?”
“응. 호적상 아버지.”
차현에게 직접 확인했지만,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호적상 아버지는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가지.”
“…….”
가자는 말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차현이 재희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목에 두른 스카프를 정리해 주었다.
“물어봐. 뭐가 또 궁금한데.”
“…….”
“궁금한 얼굴이잖아.”
검지로 볼을 톡톡 치자 재희는 눈을 흘기며 입술을 뾰족이 내밀었다.
나긋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이러는 건 아닐까. 그래서 저와 결혼하자고 한 건 아닐지.
슬쩍 바라보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왜 웃어요?”
“웃지도 못하나?”
“내가 웃겨요?”
“응. 모르나 보네.”
“허.”
곧장 답을 하는 그의 모습에 재희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너 무표정으로 뉴스 진행하는 게 제일 웃겨.”
참나.
완벽하다고 모두 칭찬 일색인데, 그의 눈엔 웃겼던 모양이다.
재희가 그를 휙 지나쳐 코트를 들었다. 입으려고 하자 차현이 코트를 가로채고는 들어 보였다. 입으라는 뜻이었다.
“주세요. 저 애 아니에요.”
“알아. 와서 입어.”
손을 뻗어 가져가려 해도 그는 코트를 옆으로 움직이며 주지 않았다.
“뭐 하는 거예요.”
그가 코트로 턱짓했다.
굳이 왜 이렇게까지.
재희는 머뭇거리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쩔 수 없이 팔을 한쪽 끼우자, 그가 나머지 팔도 입혀 주었다.
“이제 가자.”
차현이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재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