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1/62)

11.

“두 달 후에 결혼, 하겠습니다.”

형우의 앞에 선 차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오전 결재 서류를 보던 형우가 책상 위에 그것을 내려놓고 돋보기를 벗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결한 거니.”

“은태경 의원의 피해자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김민준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고요.”

“그래서, 은재희가 결혼한다고 하든?”

“네.”

차현은 평소보다 다소 긴장한 얼굴이었다.

입양한 아들이었지만 형우는 그에게 늘 호의적이고 인자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형우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였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면…….”

형우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결국 차현이 말끝을 흐리며 이 회장의 안색을 살폈다. 눈을 감고 있던 형우가 천천히 눈을 뜨고 차현을 직시했다.

“네가 많이 조급해 보이는구나.”

“죄송합니다.”

“워낙 뒤가 구린 사람이라……”

차현이 처음 원한 일이었다. 그간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던 그였기에 형우는 흔쾌히 차현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형우도 그 일에 대해 따로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알게 될수록 더욱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김 회장은 물론 은태경도.

닳고 닳은 정치인이었기에 그간 해 먹은 것들만 해도 셀 수 없을 지경이다.

은태경과 사돈을 맺는다면 자신도 같이 진창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차현아.”

“네, 회장님.”

잠시 말이 없던 형우가 입을 열자, 차현이 곧장 답했다.

“내년 상반기에 나오는 플래그십 모델. 신경 많이 써야 할 거다.”

“실망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지난번에 YN에 밀리는 바람에…….”

“실패 원인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형우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으니, 보상도 필요하겠지.”

“…….”

“자리 만들어 보아라.”

“감사합니다.”

허락이었다.

차현은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했다. 극도의 긴장감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났다.

“이만 가 봐도 좋다.”

차현은 다시금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하아.”

문밖으로 나온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우는 은태경의 일을 해결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나, 사실 장담할 수 없었다.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더러운 짓을 하는 김민준의 뒤를 캐내느라, 그리고 은태경이 벌인 일을 수습하느라.

잠도 못 잘 만큼, 몇 날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로 들어간 차현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후.”

큰 산을 넘은 것 같다는 생각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다.

타이를 느슨히 당기던 그가 핸드폰을 들어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오늘 밤, 호텔에서 보지.”

-호텔은 왜…….

호텔에서 보자는 말에 당황했는지, 재희가 말끝을 흐렸다. 차현은 작게 미소를 그리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토 달지 말고 와. 보고 싶을 때 봐야겠으니.”

한마디만 남기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답도 듣지 않은 채.

차현은 안다. 도도한 은재희가 괜찮은 척하느라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그는 책상 위로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 ▼ △

재희는 뉴스를 끝낸 후 곧장 호텔로 향했다.

“후…….”

그가 말한 룸 앞에 선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목을 죄는 갑갑함에 스카프를 벗어 손에 들었다.

곧 결혼도 할 텐데 호텔이 뭐 대수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민망한지 모를 일이었다.

그와 한 침대에 누워 사랑을 속삭이던 때가 있었다. 마치 얼마 전의 일인 듯 선연하다. 당장 오늘 무엇을 하자고 만나는 건 아니겠으나 괜스레 긴장되었다.

지이잉.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핸드폰 진동음이 들려왔다. 마치 잘못하다 들킨 듯 재희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차현이었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가 슬쩍 일그러졌다.

“네.”

-10분 지각인데, 은재희 씨.

“가고 있어요, 지금.”

그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새를 못 참고 전화한 그에게 울컥하고 말았다.

-5분 안에…….

딩동.

벨을 누르자 전화가 끊겼다. 곧장 문이 열리고 차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자마자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들어와.”

그가 설핏 미소를 흘렸다. 그 작은 미소에도 감정이 일렁인다. 재희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객실 한가운데에 선 채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외투도 안 벗고 뭐 해.”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재희는 당장이라도 다시 나갈 기세였다. 가방을 꽉 쥔 그녀의 손이 하얗게 도드라져 있었다.

차현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살피며 여유롭게 미소를 그렸다.

“우리가 할 말이 있어야 보는 사인가. 이제 곧 결혼도 할 텐데.”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바디샴푸 향이 훅 끼쳤다.

샤워를 하고 나온 건지 그의 머리카락은 젖은 채였다. 저와는 달리 여유로운 모습에 괜스레 입이 쓰다.

나만 이렇게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앞으로 늦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뉴스 끝나고 회의가 있었어요.”

“좋은 핑계네. 코트 벗고 앉지.”

차현은 한마디를 남기고 와인셀러로 걸어갔다. 재희는 하릴없이 허리에 묶인 끈을 풀어 코트를 벗었다. 대충 소파에 걸친 후, 바 스툴에 조심히 앉았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의지했던 사람이 그였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아릿할 만큼, 그녀에게는 여전히 애틋한 사람이기도 했다.

테이블 아래에 있는 양손을 맞잡으며 재희는 일부러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원님, 먼저 봬야겠어.”

와인셀러에서 와인을 한 병 가져온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세요.”

“한잔해.”

“아뇨. 차를 가지고 와서.”

“자고 갈 건데, 차는 무슨.”

그가 픽 웃으며 와인을 따라 주었다.

와인 잔에 붉은색 액체가 넘실거린다. 재희는 잔을 들어 단숨에 반쯤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찌르르한 감각이 느껴졌다.

“저녁은.”

“먹었어요.”

“거짓말하면, 티 나는 거 모르나 보네.”

딩동.

그때 벨이 울렸다.

차현이 문을 열자, 직원이 들어와 음식을 세팅해 주었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 룸서비스를 시킨 모양이다.

갑자기 얼굴을 숨기기도 뭐해 재희는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알아본 건지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재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다잡았다.

“하.”

길바닥에서는 김민준의 손을 잡고 가질 않나, 호텔 객실에서는 이차현과 함께…….

정말 엉망진창이다.

그간 잘 만들어 온 이미지가 산산이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며칠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지 말고 먹어.”

“괜찮아요.”

괜찮다고 답했으나, 사실 배가 고프긴 했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던 그녀였기에 공복 상태였다.

그때 재희의 시선이 테이블에 잘 차려진 음식에 고정되었다.

“…….”

그녀가 즐겨 먹던, 아니 가장 좋아하던 슈림프 파스타였다. 차현 역시 그녀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잊지도 않은 모양이다.

고작 파스타를 보고 울컥하는 꼴이라니.

재희는 여린 잇속을 씹으며 와인 잔을 모조리 비웠다.

“아……”

도수가 높은 건가.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재희가 미간을 구기며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게,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차현이 타박하며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창밖 야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5년이 걸렸다.

은재희와 이렇게 나란히 앉기까지.

그간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차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자 재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신혼집, 원하는 곳 있어?”

“아뇨. 어디든 괜찮아요.”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다정한 목소리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와의 결혼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다정하고 자상한 남자라면 평생 함께해도 좋을 것 같았던.

돌고 돌아 다시 그의 옆이다. 그때와는 달라진 사이였지만.

왜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그의 커다란 손이 뭉친 어깨를 뭉근히 주물렀다. 작은 스킨십에도 야릇한 생각이 들어찬다.

한심해, 정말.

재희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그의 앞에 잔을 밀었다.

“안 본 사이에 주량이 늘었나.”

차현이 픽 웃으며 와인을 따라 주었다. 맥주 두 캔만 마셔도 취하던 그녀였다.

이런 속도로 마신다면 분명 취할 텐데.

“취하면 들어가서 자면 되겠네.”

“저 놀리는 거, 재밌어요?”

그때 재희가 원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차현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놀리는 걸로 보여?”

“네. 저 지금 놀리고 있잖아요.”

억울한지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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