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결혼, 이요?”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그동안 농담이라도 한 것 같아?”
“잠깐, 만요.”
재희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잘랐다. 정말 결혼이라도 할 작정인지 그는 제법 단호해 보였다.
아버지는 뭐고, 이형 전자는 또 뭐지.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심각하게 고민하자 그는 픽 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통화하는 거 못 들었나 보네.”
“그럼…….”
“김민준이, 은태경 의원의 뒤를 봐 주는 조건으로 너와 결혼을 원했어.”
은태경의 성 추문을 알게 된 김 회장이 그걸 약점 삼아 태경과 거래를 했다.
그것을 함구해 주는 대가가 민준과의 결혼이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네가 너무 엇나가다 보니 방송국으로 성 추문 제보를 했더군.”
그래서 아침에 국장이 따로 부른 거였다.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기 위해, 민준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와서 빌기라도 하면 자기가 처리해 주겠다는 듯. 선심을 베푸는 척.
약점을 쥐고 흔드는 민준의 행태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그 관련 피해자는 내가 따로 숨겨 뒀고.”
그의 말에 재희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뒷조사를 하고, 피해자까지 숨겨 둔 걸 보니 차현은 제법 치밀하게 준비한 듯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재희가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말했잖아. 아버지가 결혼을 원하신다고.”
아버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미 자신과 연애를 할 때, 그의 아버지는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차현이 힘들어할 때 곁에 있었기에 재희는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형 전자 회장, 이형우.”
“……!”
“내 아버지야.”
차현이 그제야 사실을 말했다.
사실, 이형우 회장은 그의 입양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모든 게 완벽하게 정리되고 나면, 부사장 취임식에서 밝힐 계획이었다.
하여 방송국에서 일하는 그녀도 모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정리를 해 주고 직접 말해 줘도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파악조차 힘들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당황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은재희.”
“이형우 회장님이 저와 결혼을 희망하시는 건가요?”
“아니, 내가.”
차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미련이 남은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재희는 아닌 척 표정을 다잡았지만 당황스러운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널 아직도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차현이 바로 말을 덧붙였다.
“다만, 어차피 결혼을 해야 한다면. 모르는 여자와 한 침대에서 뒹굴고 싶진 않아서.”
“뭐라고요?”
노골적인 진심에 헛웃음이 터졌다. 그는 문제 있냐는 듯 거만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제법 잘 맞았잖아.”
그게 어떤 뜻인지, 재희는 단번에 이해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고작 잠자리 상대로 적합해서 지금 결혼을 하자는 건지.
민망함에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재희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요동쳤다.
“부사장 취임식, 다음 주야.”
“그래서요.”
“3년. 자리 잡을 때까지 옆에서 내조 좀 해 줘야겠어.”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은재희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치켜떴다.
지금 모든 상황을 정리해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듯, 황당해하는 그녀와 달리 차현은 여유로웠다.
“생각할 시간이 없을 텐데.”
“지금 저와 정략결혼이라도 하자는 건가요?”
“문제 있어? 3년 지나면 놓아 주면 되잖아. 아니, 버린다고 표현해야 맞지.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쁜 놈. 내가 왜 헤어졌는데.
그녀의 말아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당장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궁금한 건 나중에 물어보더라도, 지금은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거지 같은 망나니 새끼와 결혼하느니, 사랑했던 아니, 아직도 사랑하는 그와 결혼하는 게 자신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니었으므로.
“김민준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야. 너는 결혼에 대한 부분만 답하면 돼.”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죠.”
긍정의 답이 나오자 차현의 눈매가 매끄럽게 휘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재희는 시선을 피하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두 달 후. 결혼하지.”
“…….”
“어차피 헤어질 거니, 피임은 철저히.”
“……하.”
“애는 내가 원하지 않아서.”
오만한 표정에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재희야. 그만 속상해 해. 응?’
사소한 일 하나에도 그는 다정히 달래 주며 그녀의 기분을 살폈었다. 이렇게까지 막말하며 자신을 몰아세운 적도,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다.
아직도 나만, 나만 좋아하는 거네.
씁쓸했다. 재희는 겨우 눈물을 참아 냈다.
“벌써 열두 시인데. 하기 싫으면 말아. 나랑 결혼 원하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라.”
“……해요. 하면 되잖아요.”
결국 재희가 다급히 답했다. 차현은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도 해결해 주고, 쓰레기 같은 놈이랑 결혼도 막아 주고.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어. 잘 생각했네.”
그가 버튼을 눌러 시동을 켰다. 핸들을 그러쥐며 출발하기 전, 차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직시했다.
“부르면 재깍재깍 와. 오늘은 그 새끼 처리해야 하니, 좀 바쁘겠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재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러운 마음에 자꾸만 눈앞이 흐려진다.
하면 되지. 뭐 어렵나.
나락으로 떨어지기보다, 그의 손을 잡기로 했다.
△ ▼ △
똑똑.
완벽하게 치장을 한 재희는 국장실 문을 두드렸다.
“네.”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문고리를 비틀어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재희를 본 국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송국으로서도 다신 잡을 수 없는 기회였을 것이다. 국장은 특종이 엎어진 것이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한지 안 한지 모르겠네.”
국장은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썩은 표정을 짓는 그의 앞에서 재희는 여유롭게 미소를 그렸다.
“이제 제 후임 얘기는 안 들어도 되는 거죠.”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오늘 새벽, 김 국장에게 연락이 왔다.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과 함께.
제법 치밀하게 설명하는 메일을 보며 국장은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까지 말씀드려야 하나요? 아버지 일을 딸이 해결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요.”
“참…….”
“국장님 엄청 아쉬우신가 봐요.”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그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대화하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에 만족하실 만한 단독. 제가 들고 올게요.”
“이보다 더한 단독이 어디 있어. 물론 자네한테는 안 좋은 일이었겠지만, 방송국 입장으로는 잡기 힘든 특종이었어.”
“썩 기분이 좋진 않네요.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차피 사실도 아니었는데요. 아마 보도했으면 더 곤란해지셨을 거예요.”
그녀의 날 선 답에, 김 국장이 흠칫 당황했다. 아쉬움에 속마음이 노골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야당 대표의 딸에게 하지 못할 말을 한 것 같아 국장은 흘긋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은 아나, 나는 말이야.”
“가 볼게요. 준비해야 해서요. 그럼.”
재희는 고개를 까딱이고 국장실을 나섰다. 다들 자신의 입장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특종, 단독을 놓친 것을 아쉬워할 뿐.
최소율은 그녀의 자리를 넘보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 텐데.
위태로운 자리인 줄은 알았지만, 상상 그 이상으로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는 안도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젯밤에도 너무 신경 쓴 탓에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이마를 짚은 채, 복도를 걷던 그녀 앞으로 최소율이 다가왔다.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자 소율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 말 있어?”
“아쉽네요. 무척.”
소율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민낯을 드러냈다. 혹시나 소율이 알고 있는 걸까, 재희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뭐가 그렇게 아쉽지?”
“선배도 긴장 좀 하셔야겠어요. 언제 내려올지 아니, 제가 언제 끌어내릴지 모르잖아요.”
“건방지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재희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더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해서 되겠니?”
“저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근데 고작 메인 자리 하나 못 따내서, 뭐 마린 개처럼 내 앞에서 알짱거리나?”
그녀의 직언에 소율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렇게 늘 속을 드러내는 소율이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뒤에서 더러운 짓을 꾸미는 것들보다 나으니까.
“김민준 씨랑 결혼하세요?”
“아니. 안 해.”
“한다고 그러던데.”
“너 만나고 있었다며. 아쉬운가 보네. 그냥 너 가져. 그렇게 아까우면.”
정말인지 소율의 얼굴이 티 나게 동요했다.
이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해서야. 쯧.
재희가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누가 그래요. 제가 만나고 있었다고?”
“그러게, 누가 그랬을까.”
소율을 지나치며 재희는 픽 웃음을 흘렸다. 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대기실로 들어가자,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며칠 내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
생방송만 잘 끝내고, 집에 가서 얼른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긴장이 풀린 탓에 대본을 들고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때, 앞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가 경직된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차현, 그였다.
“네.”
-오늘 밤, 호텔에서 보지.
“……호텔은 왜.”
-토 달지 말고 와. 보고 싶을 때 봐야겠으니.
고압적인 목소리가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