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9/62)

09.

“……네.”

-일어났나 보네.

차현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거세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점차 잦아들었다.

재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디 갔어요?”

-일이 있어서 나왔어.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재희는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일에만 뉴스를 진행하기에 다행히 오늘은 집에서 푹 쉬면 될 것 같았다.

-할 말이 있으니, 집에서 쉬고 있어.

“어디…….”

-어디긴, 내 집이지.

너무 자연스러운 그의 답에 재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인데요. 지금 하세요.”

-가서 해. 그럼 끊지.

“잠깐, 만요!”

그녀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언제 올 건데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

가만히 생각하는 사이, 전화가 들어왔다. 재희가 액정을 보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국장이었다.

“알겠어요.”

그녀가 답하자, 전화는 바로 끊겼다.

그리고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희가 녹색 버튼을 터치하고 귓가로 가져갔다.

“네. 은재희입니다.”

-문제가 생겼어. 방송국으로 좀 나와야겠는데…….

국장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은 의원님 이야기야. 네 일이기도 하고. 지금 바로 나오지.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몸을 휘감았다.

△ ▼ △

“어 왔어?”

“안녕하세요.”

전화를 끊은 재희는 곧장 방송국으로 향했다.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배인 소율이 미묘한 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묵례했다.

재희는 소율을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국장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연락하지.”

소율은 국장에게 해사한 미소로 인사하고는 그곳을 빠져나갔다.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그녀가 국장을 직시했다.

“은 아나, 결혼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은 아나랑 수인 그룹 김민준 씨랑 찍힌 사진이 나한테 들어왔어.”

결국 일이 터진 모양이다.

어제 그렇게 대놓고 손을 잡고 다녔으니.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입이 썼다.

재희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뇨. 안 하는데요.”

“그럼 그냥 사귀는 사이인가 보네.”

그것도 아닌데. 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사귀지도 않는데 남자 손을 잡고 차에 타 봐야, 파트너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답이 없자 국장이 비릿한 미소를 그리며 그녀의 앞으로 종이를 내려놓았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내일 은 아나가 보도할 메인이야.”

설마……. 재희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은태경 의원, 성 추문 파문.]

메인 타이틀을 본 재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분명 어제 식사 자리에서 해결했다고 들었는데.

그 순간, 어젯밤 차현과 한바탕했던 민준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할 수 있겠어?”

“확실한 기사인가요.”

그녀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김 국장은 다리를 꼬며 느긋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사실 맞던데.”

“어디서 아신 거죠?”

“우리 단독이야. 제보자는 익명이고.”

“단독이면…….”

“익명의 누군가가 어제 제보를 했어. 다른 곳 말고 우릴 단독으로 지정했거든.”

하. 그녀는 입안 여린 살을 씹었다.

어제 김민준에게 엿을 먹였으니, 열 받은 그가 당장 제보했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했다.

“그래서 부른 거야. 네가 보도하기 힘들 것 같아서.”

“최소율에게 넘기시려고요.”

그녀의 입매가 삐딱하게 올라섰다.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후배였다.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넘기겠다. 이건가.

그녀는 무릎 위에 있던 손을 말아 쥐었다.

“아버지의 성 추문 보도라. 은 아나 멘탈 좋은 건 알지만, 아무래도 좀 힘들지 않겠어?”

“해결할 시간, 주세요.”

“이미 보도하기로 합의된 사안이야.”

“내일 오전까지, 해결해 보겠습니다.”

재희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장은 못 미더운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해결 못 하면, 최소율한테 넘기게 될지도 몰라.”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재희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국장실에서 나왔다.

“하.”

그녀는 비상계단에 서서 핸드폰을 들었다.

급하게 앱을 켜 포털 사이트에 은태경의 이름을 검색했다.

아직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은 거 보니 정말 내일 단독으로 보도될 모양인 듯했다.

어떡하지.

대통령이라도 된 듯, 권력을 쥐고 흔들던 아비였기에 언젠간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다.

고민하던 그녀가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예요. 우리 좀 만나죠.”

△ ▼ △

‘내 집 앞에서 기다려.’

재희는 그의 집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벌써 두 시간 째.

하지만 민준의 머리털 하나 보기 힘들었다.

“진짜…….”

내일 오전 일곱시까지 답을 달라던 국장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이대로 밤이 지나고 나면 메인 뉴스 자리를 내려오는 것은 물론, 얼굴도 못 들고 다닐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구정물을 다 뒤집어쓴 채 계속 일을 할 수도 없으니.

“미치겠네.”

저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도 많은데, 얼마나 고소해할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동안 자신이 쌓았던 탑은 저 때문이 아닌, 아버지 때문에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차현과 헤어지고 얼마나 악착같이 살았는데.

그동안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

고개를 떨어트리며 한숨을 쉬는 사이, 그녀의 앞으로 구둣발이 멈춰 섰다.

“뭐 해 여기서.”

“……!”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여길 대체 어떻게.

굳어 버린 그녀의 목에 온기 가득한 머플러가 둘러졌다.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의 따뜻한 손이 뺨에 닿았다.

“고개 들어.”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졌다. 차현은 미간을 구기며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질질 짜고 있을 거면서.”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손을 잡고 끌어당기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놔요.”

“아직도 자존심을 부리네.”

“그럼 어떡해. 오빠가 해결해 줄 수 있어? 당장 내일…… 나 이거 못 막으면.”

한 번 터진 눈물은 쉼 없이 흘렀다. 그를 잊기 위해 죽을 만큼 일에 매달렸다.

잠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면, 차현 생각에 견딜 수 없었으므로.

사무치게 그리웠지만 재희는 이를 악물며 버텨 냈다. 혹시나 그에게 해가 될까 봐.

“그러게, 내가 결혼하자는 소리는 귓등으로 듣지.”

“뭐?”

“타. 타서 얘기해.”

그녀를 조수석에 앉힌 후, 차현은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 ▼ △

한강 앞에 주차한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울던 그녀는 진정이 되었는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사이 핸드폰은 계속 울려 댔다. 결국 재희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김민준이었다.

집 앞에 없는 걸 확인하고 전화한 게 분명했다. 망설이던 재희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은재희 간이 크네.

“…….”

재희는 이를 사리물며 가만히 귀 기울였다.

술에 취한 건지. 민준의 혀는 잔뜩 꼬여 있었다.

-어차피 결혼도 못 할 것 같은데, 이렇게라도 갚아 줘야지 내가 덜 억울하지 않겠어?

“김민준 씨.”

-이제 뉴스가 재미없겠네. 은재희 안 나와서.

그녀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끝까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기회 줄게. 와서 성심성의껏 빌어 봐. 응?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차현이 그녀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차현은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재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김민준 씨. 나예요, 이차현.”

-뭐야 이 새끼는. 너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건데. 태연하시네?

독기 오른 목소리에도 차현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피해자를 불구가 될 정도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뻔뻔하네.”

-뭐?

“송현미 씨.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만.”

쏘아붙이던 민준이 말이 없다. 재희는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마주 잡았다.

“당신들이 송현미에게 한 짓들, 모두 공개할 예정입니다.”

-누가 그래. 그걸 우리가 했다고!

부정하는 민준의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재희에게도 들릴 만큼.

“더러운 습성 못 버린 거지. 비열한 짓 다 하면서 회사 세웠으니.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보세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니 억울한 것도 없지 않나.”

-너, 너 뭐 하는 새끼야.

“어제 방송국으로 보낸 말도 안 되는 보도들 죄다 정정해. 그러면 생각해 보고.”

-이 새끼가.

“내일 오전 여섯시까지 시간 줄게요. 그때까지 정리 안 되면 대로 갚아 드릴 테니 기대해도 좋고.”

뭐라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현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재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잔뜩 굳은 얼굴로 떨고 있는 그녀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결혼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결, 혼이요?”

“내가 생각해 보라고 했을 텐데.”

“…….”

정말 자신과 결혼을 하기 위해 이러고 있는 걸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재희는 눈을 굴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가 결혼을 원하셔.”

“아, 버지라면.”

차현의 아버지는 그녀와 만나던 시기에 돌아가셨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어제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형 전자 부사장 이차현입니다.’

이형 전자?

너무 정신이 없어 흘려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형 전자라면, 차현의 아버지가 일하던 회사였다.

왜 갑자기 차현이 부사장이 된 건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은재희, 나랑 결혼해 줘야겠어.”

그때,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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