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8/62)

08.

“코, 코트는 왜. 조금 전엔 입으라면서.”

재희는 코트를 꽉 움켜쥔 채 입을 열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차현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잠시 후, 거실로 나온 그가 그녀에게 얇은 긴소매 티셔츠 하나를 던지듯 건넸다.

“열나잖아. 집에 들어왔으니 좀 벗고 있어야 열이 내리지. 갈아입어.”

“괜찮아요.”

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도 재희는 고집을 부렸다. 결국 보다 못한 차현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벗겨 주길 바라는 거면.”

“……아, 알았어요.”

가까이 다가온 그 때문에 재희는 코트를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실내가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열이 나고 있었다.

한심하게 바라보던 차현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

그러고는 입안으로 약 하나를 불쑥 밀어 넣고 작은 손에 물컵을 쥐여 주었다.

재희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마셔. 병원 실려 가고 싶지 않으면.”

재희는 눈을 흘기며 물을 들이켰다.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린다. 오한이 심해 이불이라도 덮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냉정했다.

그녀가 먹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긴장한 탓에 차현 역시 편두통이 상당했다.

“…….”

“…….”

적막이 흘렀다.

막상 이렇게 마주 보고 있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눈을 굴리던 재희는 시선을 내리고 몸을 웅크렸다. 몸이 너무 무거워 당장이라도 소파에 눕고 싶었다.

열 때문인지 속도 울렁거린다.

그때 차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네.”

그는 전화를 받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됐어.”

-김민준은 지금 한 남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신원을 파악해 보니 기자인 것 같습니다.

“기자?”

차현의 얼굴이 퍼석 깨졌다. 눈매를 가늘게 뜬 채,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투데이 일보 기자 중 한 명 같은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데. 말해.”

-김민준이 기자를 만난 지 아직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은재희 씨 관련 기사가 몇 개 떠서 조치를…….

벌써 기사가 난 모양이다.

김민준이랑 그렇게 대놓고 손을 잡고 차에 탔으니.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사진을 찍은 듯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내리세요. 피해 가는 일 없도록.”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차현은 다시 거실로 향했다.

“…….”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소파에 기대 잠이 든 상태였다.

동그란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 앞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던 차현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뜨끈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그가 방에서 얇은 이불을 하나 가져와 그녀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긴장해서인지 갈증이 일었다. 차현은 위스키 한 병과 글라스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잔에 가득 따라 들이켜자 짙은 알코올 향이 코끝을 스쳤다.

“후.”

차현은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오던 날을 떠올렸다.

△ ▼ △

“저기 차현 씨, 누가 찾아왔는데.”

“누구요?”

“글쎄. 누군진 모르겠어요. 남자예요.”

차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하는 회사로 찾아올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가족은 없었고, 얼마 전 재희와도 헤어졌기에.

남자라는 동료의 말에 머리를 굴려 보아도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동료가 말한 카페로 가 보자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저 사람은…….

누군지 알아본 차현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앉지.”

태경이 그를 쳐다보며 앞자리로 눈짓을 했다. 차현은 꾸벅 인사하고 태경의 앞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왜 왔는지 알 텐데.”

태경의 서늘한 눈빛에 차현은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헤어지자는 그녀의 통보에 차현은 며칠째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어르고 달래고, 화를 내 보아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답답할 지경이었다.

“재희가 내 딸이네만.”

차현은 떨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겨우 입을 열었다.

“헤어지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태경이 직접 찾아온 이유.

권력을 쥐고 흔드는 태경이 하찮은 차현에게 바랄 건 그것 하나뿐일 것이다.

“바로 알아들으니 대화하기는 수월하겠네.”

그제야 태경의 구겨졌던 미간이 조금은 풀어졌다.

설마 했던 일이었다.

대단한 집 딸인 그녀가 갑자기 이별을 말한 데엔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던데.”

“…….”

“부모도 없어, 가진 것도 없어. 그렇다고 능력이 있기를 해. 뭐 하나 볼 것도 없는 놈이 어딜 감히.”

듣고 있던 차현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태경은 화가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진 것도 없는 네가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중이야. 이쯤 해서 그만하는 게 좋을 거다.”

“…….”

“아니, 재희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 그걸 원하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태경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 오래 만났으면, 그 아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게 뭔지 알 텐데. 잘 생각해 보렴.”

“못 헤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돌한 그의 물음에 태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경은 입을 열었다.

“아마 헤어지게 될 거다.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면 계속 만나 봐도 좋고.”

태경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 ▼ △

“약점…….”

차현이 그 단어를 혀끝에 굴렸다.

그녀의 약점은 엄마였다.

재희는 어릴 때 떠난 엄마를 매일 그리워하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차현이 보기에 그녀의 엄마는 재희에 대한 애정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전화해 아쉬운 소리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못 헤어져, 재희야.’

‘제발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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