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민준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차현이 다가와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차현은 바닥에 쓰러진 민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너 뭐야?”
민준이 윽박지르며 차현의 멱살을 잡으려는 찰나, 다시 민준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하, 씨X.”
혀 끝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민준이 씨근덕거리며 피가 흐른 입가를 손 등으로 훔쳤다.
갑자기 앞을 가로 막고 선 차 때문에 하마터면 정말 크게 사고가 날 뻔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아찔한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저 차 안에 여자 있지.”
차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여자?
난데없는 소리에 민준의 눈썹이 매섭게 휘었다.
“뭐?”
“그 여자 데리러 왔어.”
“너 뭐 하는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악에 받쳐 소리 지르는 민준의 모습을 보면서도 차현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같잖다는 듯 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차현이 재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민준에게 집어 던졌다. 명함 하나가 팔랑거리며 민준의 앞으로 떨어졌다.
민준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형 전자, 부사장. 이차현??”
명함을 읽던 민준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형 전자라면…….
민준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얼마 전, 이형 전자에 곧 새로운 부사장이 취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누군지 밝혀진 게 없어 추측만 난무할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양아치 짓 하고 다니느라 뵈는 게 없나 본데.”
차현이 화를 누르며 숨을 골랐다. 깊게 숨을 내쉬자 그의 입가에 하얀 김이 흩어졌다.
미간을 슬쩍 구긴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유명 아나운서 강제 스폰한 걸로 기사 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돌아가는 게 좋을 겁니다.”
“누가 스폰을 했다고 그래. 어디서 개수작이야!”
“저 여자, 끌고 가는 거 내가 다 봤거든. 그리고.”
차현이 반쯤 누워 있는 민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내 눈에 띄면 좋은 꼴 못 볼 거야.”
“너, 저 여자랑 무슨 사이야.”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어디서 감히 은재희를 건드려.”
살기 가득한 눈빛에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재희에게 손끝 하나 댔다면 정말 죽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민에게 민준의 차가 향하는 곳을 듣자마자 이성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부사장님.”
그때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차현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둘을 번갈아 보던 민준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아까부터 뒤를 밟고 있던 검은색 세단이 옆에 정차 중이었다.
기자인 줄 알았더니 이 자식이었던 모양이다.
난데없는 상황에 민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은재희가 남자가 있었네.”
자조 섞인 민준의 목소리에 차현이 씹어뱉듯 뇌까렸다.
“그 여자 이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차현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재킷을 탁탁 털어 냈다.
마치 오물이라도 묻은 듯.
“혹시 따라붙는 차는.”
“없었습니다.”
“후.”
차현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액셀을 밟아 민준의 차를 추적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재희 관련 기사, 하나라도 보이지 않게 처리해.”
“알겠습니다.”
차현이 곧장 민준의 차로 향했다. 조수석 문을 벌컥 열자 사색이 된 그녀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여기에 왜…….”
“안 내리고 뭐 해.”
“무, 무슨 일…….”
“안고 가기 전에 내려.”
그의 명령에 재희가 벨트를 풀었다. 차에서 내리자 어느새 일어난 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민준의 표정은 섬뜩할 정도였다. 재희는 애써 외면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현이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며 그의 차 조수석에 그녀를 태웠다.
△ ▼ △
‘호텔로 가는 것 같습니다.’
세민의 보고에 차현은 속도를 높였다. 혹시라도 후회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 했다.
질 나쁜 새끼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기에, 그는 서둘렀다.
“하.”
조금 전 일을 곱씹던 차현이 핸들을 꽉 그러쥐었다. 차 안에서 덜덜 떨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한숨이 절로 흘렀다.
조수석에 앉은 재희는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차현이 손을 뻗어 시트의 열선 온도를 높여 주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가.”
나라고 가고 싶었을까.
그의 책망 섞인 한 마디에 울컥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재희는 원피스 밑단을 움켜쥐며 눈물을 참아 냈다.
“호텔가서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꾹 참던 재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차 안에 흐느끼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차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뭘 잘했다고 울어, 울기를.”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한참이나 울었다.
화를 내는 목소리도 반갑고, 갑자기 나타나 모든 상황을 무마시켜 준 것도 고맙긴 했지만, 무척 비참하고 서러웠다.
도도하게 헤어지자고 해 놓고는, 결국 또 그의 도움을 받고 말았다.
5년 만에 나타난 그는 그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아직 아는 건 하나도 없었으나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흐흡.”
그때 무릎 위에 무언가가 놓였다. 슬쩍 시선을 내리자 잘 개어진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면서도 차마 잡을 수 없어 그녀는 옷소매로 얼굴을 닦아 냈다.
“고집은.”
쯧.
차현이 혀를 찼다. 그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에 제가 준 손수건은 못 쓰겠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자 역시 은재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거든?”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조금 나아?”
“이차현!!”
잠시 정차한 틈을 타, 그가 그녀를 직시했다. 얼굴은 새빨개진 채, 그녀는 아직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불렀으면 말을 해.”
“너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 왜 이러는 건데.”
“이제 은재희 같네.”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핸들을 쥐었다.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그녀였지만, 가끔 저렇게 이름을 부르며 화를 내곤 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차현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렸다.
순간 예전의 재희와 오버랩되었다. 예쁘고 발랄하던 20대의 은재희가.
“해 그럼.”
“뭐?”
“그 자식이랑 결혼, 하라고.”
그 말이 서러웠는지, 그녀는 끅끅 소리 내어 울었다. 정면을 보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흐흡.”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현은 표정을 지우고 운전에 집중했다.
그녀의 집으로 갈까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그녀는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그만 질질 짜고 내려.”
얼마나 지났을까.
차현의 목소리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경계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어제 왔던 그의 집이었다.
“여긴 왜 또 왔어?”
“왜, 그 새끼 따라 호텔도 가면서 나는 못 믿나 봐?”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이를 사리물었다.
이번에도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목적지가 호텔이긴 했으나 그가 상상하는 그런 이상한 것을 하기 위해 가는 건 아니었는데.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기 싫어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망설이던 재희가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그가 재희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 주었다.
“필요 없어.”
못된 말만 하는 그가 못마땅해 재희는 단숨에 거절했다. 그럼에도 차현은 다시 코트를 걸쳐 주었다.
그때 갑자기 커다란 손이 이마에 올라왔다.
“아직도 열나잖아.”
“…….”
“말은 더럽게 안 들으면서, 고집 그만 부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무척 화났다는 것을.
조금만 건드리면 정말 폭발할지도 모르기에, 재희는 꾹 참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집에 들어가자 익숙한 향기가 가득 풍겼다.
“아읏.”
긴장이 풀린 나머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하.”
먼저 걷던 차현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앞으로 안아 들었다.
“뭐, 뭐하는데. 내려 줘!”
“조용히 좀 하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현은 복도를 성큼성큼 들어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재희는 어깨에 걸쳐진 코트를 앞으로 여미며 경계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코트 벗어. 내가 벗기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