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6/62)

06.

“살펴 가십시오.”

민준은 태경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선을 볼 때 싸가지 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뒤에 서 있던 재희는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사위, 딸 잘 챙겨 주게나.”

“물론입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민준이 답했다.

태경은 그녀를 흘긋 바라보고는 옆에 서 있던 김 회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 사돈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허허, 그런가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술 한 잔 더 하시죠.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녁 식사 한 번에 자신과 김민준은 결혼하는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재희는 이를 사리물며 참아 냈다.

김 회장까지 가고 나자 김민준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앞에 섰다.

“술 마시러 가죠.”

술 같은 소리 하네.

오늘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숙과도 등지기로 한 마당에 결혼 따윈 하지 않기로 재희는 마음먹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녀가 대꾸도 없자 재미있다는 듯 민준이 중얼거렸다.

태경과 같은 차를 타고 왔기에 따로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몸을 돌리자, 단숨에 손목이 잡혔다.

아릿한 감각에 그녀의 얼굴이 단숨에 이지러졌다.

“이거 놔요.”

재희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옷깃이 스치는 것조차 역겨운 기분이었다.

“이 손, 치우라고.”

결국 말이 험하게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민준은 손목을 조금 더 꽉 그러쥐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은재희 씨.”

“술 마실 생각 없어요.”

“제법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한 번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봐요.”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잡힌 손을 비틀수록 그는 더 꽉 움켜쥐었다.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

“당신이 하는 일,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녀의 동그란 이마가 구겨졌다.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그녀의 손목을 뭉근히 매만졌다.

마치 벌레가 기어 다니듯 소름이 끼쳤다.

“그쪽 집과 내 집에 아무 일도 없어야. 계속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차현에게 들어 대충은 알고 있었으나 재희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모른 체했다.

“내가 그 키를 쥐고 있단 소리라고.”

정말 은태경의 약점이라도 알고 있는 듯,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매서운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

“그쪽, 유명한 간판 아나운서잖아. 집안에 아무 일도 없어야, 그 일 계속할 텐데. 아버지의 난잡한 사생활을 직접, 보도할 수는 없을 테니까.”

“…….”

“고분고분하게 따라오란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태경의 그늘에서 편하게 살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프라이드는 진심이었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한량 같은 저 자식이 알 리 없었다.

지금 민준은 그녀가 제일 끔찍이 아끼고 있는 그 일을 건드리고 있는 거였다.

“협박이라도 하시는 건가 보네요.”

“아니지. 협박이 아니라, 적당히 타협하는 법을 알려 주는 거라고.”

“정말 결혼이라도 하길 바라시나 봐요.”

“뭐 결혼은 물론, 당장 오늘 호텔로 가도 좋고. 술이라도 마셔도 좋고. 솔직히 나는 전자가 더 끌리긴 합니다.”

그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을 살폈다. 그녀의 몸에 딱 맞는 원피스는 여린 몸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무례하시네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런 말 듣긴 좀 억울하지 않나 싶은데.”

민준이 그녀의 손목을 지분거렸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매우 티 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민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픽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덜덜 떨고 있는 것도 예쁘네요.”

“미친놈.”

“사실 욕하는 것도 무척 꼴리거든. 보는 눈이 많은데, 얌전히 타지?”

결국 그가 민낯을 드러냈다.

띠릭.

옆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라이트가 번쩍였다. 조수석 문을 열고 그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타. 오늘은 정말 술이라도 한잔해야겠으니. 소리라도 질러 보든가. 감당할 수 있겠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소란이라도 피웠다가는 당장 저녁 뉴스 자리부터 내려와야 했다. 워낙 개차반으로 소문난 그였기에 정말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재희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차에 올라탔다.

△ ▼ △

“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차현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비서에게 연락이 오고 혹시 운전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결국, 태경은 김창국 회장을 만났다. 재희와 함께.

그 만남에서 태경의 명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결혼을 시키겠다는, 그런 얄팍한 마음이.

“후.”

차현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신경을 썼더니 두통이 상당했다.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그가 앞에 놓인 커피를 들이켰다.

물을 마셔도, 커피를 들이부어도 갈증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차현은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바로 귀에 가져갔다.

“응.”

-지금 동궁에서 나와 김민준 부사장과 함께 이동하고 계십니다.

“……어디로.”

-뒤를 밟고 있습니다. 어딘지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의 미간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도도한 그녀가 그를 따라갔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래서, 오늘 자리에서는 무슨 얘기가 오갔습니까.”

비서는 침착히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부터 곁을 지킨 세민은 차현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차현은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타고난 사람처럼, 평소에는 동요 한 번 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그녀에 관한 일들을 지시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잔뜩 묻어나왔다.

“사실이었네.”

성 추문 관련 일을 함구해 주는 대신, 태경은 결혼을 약속한 듯했다.

직접적으로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돌려 하는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세민은 세세한 대화 내용까지 모두 전달했다. 가만히 보고를 듣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와 차 키를 챙겼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놓치지 말고 보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차현은 급하게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민이 향하고 있는 곳으로 무작정 출발했다.

‘그 자식, 좀 더럽게 논다고 소문이 자자해.’

이 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 주는 유일한 친구 한 놈이 있었다. 유학을 가 있는 동안 미국에서 만나 알게 된.

지금 그 녀석도 한국에 나와 본가로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핸들을 잡은 그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번졌다.

‘애도 있대. 만나는 여자애 한 명이 애 낳고 매달려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돈만 던져 준다더라고.’

“건방진 새끼.”

누굴 넘봐.

차현은 미간을 구기며 액셀을 깊게 눌러 밟았다.

△ ▼ △

차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다.

재희는 양손을 꾹 잡은 채 초조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은재희 씨는 취미가 뭡니까?”

“…….”

“답 좀 해 주지. 섭섭하네.”

민준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가 괘씸해 속이 뒤틀린다.

민준이 조금 더 속력을 냈다. 늦은 밤이라 도로는 무척 한산했다.

차는 빠르게 도로를 내달렸다.

“어디 가는 거예요.”

“호텔. 바 야경이 죽이거든.”

재희는 고개를 돌려 그를 직시했다. 심기가 단단히 뒤틀렸는지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저기요, 김민준 씨.”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해요. 듣고 있으니까.”

어디 한번 들어 줄게. 그는 마치 그리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거만한 말투에 재희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고민하던 그녀가 벨트를 풀자 민준이 고개를 까딱였다.

룸미러로 뒤를 확인한 민준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지금 뒤에 차 한 대 따라붙고 있던데. 아나운서 애정 행각. 타이틀로 기사 1면 올라가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가죠.”

“하.”

“나 건드리지 말라고. 지금도 참고 있으니까.”

아까부터 따라붙는 검은색 세단이 자꾸만 신경을 긁는다.

기자인가.

그러기엔 무척 고가의 차량이었다. 수상쩍은 차의 미행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늘 근사한 곳에서 술 한잔 살게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지내야 할지에 대해 심도 있게 얘기도 나누고.”

픽.

웃음을 흘리며 그는 다시 핸들을 그러쥐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자 차 안 가득 그의 역겨운 체향이 가득 풍겼다.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자신만 손해였다. 정말 민준의 말대로 시끄러운 소란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는 건 저였으니까.

“김민준 씨.”

“정 없게 그렇게 부르지 말고 성 떼고 불러요.”

끼이이익.

그때, 차가 갑자기 급하게 정차했다. 민준이 팔을 뻗어 그녀를 단단히 잡았다.

시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의 팔이 아니었다면 유리에 얼굴을 부딪쳤을 위험한 상황이었다.

“진짜 미쳤어요? 대체 왜 이래요!”

“저 자식이.”

그가 미간을 구기며 씨근덕거렸다. 그 표정이 미치도록 소름 돋아 재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민준이 벨트를 풀고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재희가 정면을 응시했다.

“……!”

바로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차를 보며 재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금만 더 늦게 멈췄다면 크게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

그리고 잠시 후, 차에서 내린 민준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놀란 재희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당신이 왜!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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