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5/62)

05.

태경이 말했던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나가지 않으면 당장 한숙에게 달려갈 아비였기에 재희는 어쩔 수 없이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태경의 밑에서 일하는 윤 비서가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윤 비서는 그녀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제 차로 이동할게요.”

“의원님께서 반드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윤 비서가 그 단어를 강조했다. 혹시나 자신이 오지 않을까 봐 비서까지 보냈다는 것을 재희도 알고 있었다.

지이잉-

그때 차의 뒷좌석 창이 내려가고 태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타.”

“허.”

재희의 얼굴엔 황당한 기색이 번졌다. 딸이 사는 집은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아비였다.

비서만 보내는 것도 못 미더웠는지 직접 오기까지 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엄청 급하셨나 보네요. 이곳까지 직접 오시고.”

“가는 길에 같이 가자고 들렀을 뿐이다. 시간이 이르지 않아. 어서 타거라.”

손목에 있는 시계를 확인하며 태경이 그녀를 채근했다. 재희는 입술을 씹으며 그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처음이었다. 그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차를 탄 건.

아주 어릴 적, 한숙이 집을 나가기 전 기억들뿐이었다. 그마저도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하게 잘 기억나지 않았다.

“결혼 날짜는 내가 잡았다.”

“결혼은 의원님께서 하시나 보네요. 저도 모르는 결혼식을.”

재희가 비꼬며 답했다. 늘 이런 식이었으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을 이렇게 통보받게 될 줄은 몰랐다.

태경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김 부사장이 너를 참 마음에 들어 하던데.”

“저는 생각 없다고 분명 그쪽에 전달했는데요.”

“그럴 리가. 만나고 오더니 더 좋았다고 나한테 직접 김 부사장이 전화까지 했다.”

물을 뿌리자 욕을 내뱉던 민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연히 결혼은 없던 일로 할 줄 알았더니 오산이었다.

“김 회장은 네가 아나운서라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야.”

“김민준 그 사람, 아이까지 있다면서요. 알고 계시는 거죠?”

“서류상으로는 깨끗하다던데, 문제 있냐.”

어떻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지.

재희의 고개가 태경 쪽으로 돌아갔다. 태경의 얼굴은 미동조차 없었다.

문제 될 거 있냐는 듯, 그는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안 하고 싶어요. 그냥 저 좀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버린 자식 취급하시면서.”

“이용 가치가 있는 자식은 얼마든지 이용할 생각이다.”

“왜요. 소희 시키시죠. 그렇게 아까운 자리면.”

소희는 그녀의 배다른 여동생이었다.

재희가 네 살 되던 해에 한숙은 집에서 나갔다. 태경의 외도를 못 견딘 탓이었다.

한숙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경은 정 여사와 재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소희는 아직 어리잖니. 그리고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더구나.”

“저도 만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과 결혼 허락해 주실 건가요?”

“또 어디서 시답잖은 새끼 데리고 오려고. 쯧쯧.”

시답지 않은 새끼…….

차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말아 쥐며 재희는 숨을 골랐다.

“잔말 말고 시집가서 얌전히 살아. 아마 하고 있는 일은 그냥 해도 좋다고 하실 거다, 김 회장이.”

“도착했습니다.”

“가지.”

비서가 문을 열자 태경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구겼다.

△ ▼ △

러닝머신 위를 뛰는 차현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벌써 한 시간 반째.

그는 빠른 속도로 달리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평소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하며 몸을 관리했다.

“네.”

블루투스 이어폰을 누른 그가 전화를 받았다.

차현은 잠시 옆으로 내려와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청담동에 있는 동궁에 도착하셨습니다. 수인 그룹 김 회장과 김민준 부사장을 만나는 자리라고 합니다. 은태경 의원도 함께 동석하셨습니다.

“후.”

그가 전원을 눌러 러닝머신의 작동을 중단시켰다. 그러고는 옆에 올려놓았던 물병을 들어 뚜껑을 돌려 땄다.

물을 반쯤 비운 그는 주방으로 걸어가며 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모조리 알아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그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끝나고 어디로 가는지도.”

-네. 연락, 드리겠습니다.

차현이 이어폰을 빼며 맥주가 아닌 이온 음료를 들어 들이켰다.

“후.”

그가 숨을 몰아쉬며 욕실로 향했다.

△ ▼ △

“이게 얼마 만입니까.”

“하하. 진짜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원님.”

수인 그룹 회장인 김창국은 호탕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대기업 수장인 창국이 태경에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실감 났다.

태경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음지에서 양지로 사업을 확장한 김 회장은 철저히 신분 세탁을 하며 지금의 회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손에 피를 묻히는 더러운 일을 서슴없이 하며 정치인 뒤에서 일을 봐주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삼류 쓰레기 집안.

재희는 입매를 비틀며 태경의 옆에서 꼿꼿이 서 있었다.

“또 만나네요, 은재희 씨.”

뭐가 그리 좋은지 민준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까지 다가온 그의 손을 보면서도 재희는 답 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실제로 보니 더 예쁘네요. 내가 은재희 씨 나오는 뉴스만 봅니다.”

“허허, 과찬이십니다. 말씀 낮추시지요.”

태경이 재희 대신 대꾸하며 창국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서로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식적인 말만 쏟아 내기 바빴다.

그간 자신에게 선을 보라고 종용했어도 이렇게까지 동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결혼을 시킬 작정인지 태경은 단호한 얼굴로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행동, 똑바로 하거라.”

그 한마디에 협박이 담겨 있었다. 자리에 앉은 재희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답답한 마음을 진정하려 애썼다.

“그날, 잘 들어가셨는지. 저는 재희 씨 덕분에 자알 들어갔습니다.”

바로 앞에 앉은 민준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단아한 연핑크의 트위드 원피스는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어깨에 찰랑이는 웨이브 머리카락도 우아함을 배가시켰다.

똑똑하고 지적인 이미지는 물론, 단아한 옷을 입어도 관능적인 몸매는 다 가려지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여자였다.

가녀린 쇄골을 바라보며 민준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여전히 예쁘네요. 은재희 씨는.”

그의 칭찬에 창국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얘가 이제껏 결혼 얘기는 꺼내지도 않던데, 재희 씨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혼기가 꽉 찬 여식이라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제라도 좋은 짝 만나 시집가야지요.”

태경은 가식적인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 결혼, 내가 하지.’

갑자기 차현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정말 차현과 결혼할 수 있을까.

예전보다 그의 처지가 나아졌다고는 한들, 태경을 설득하기는 무리였다.

차현을 따라 짐이라도 싸서 떠나야 하는지.

그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재희의 고개가 떨어졌다.

“재희야.”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태경은 험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재차 불렀다.

“김 회장님 말씀하시잖니.”

그제야 그녀는 창국을 바라보았다. 김 회장이 그녀를 보며 걱정 섞인 눈빛을 했다.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아닙니다.”

“결혼하면 일은 계속할 거니.”

“…….”

결혼을…….

재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모두 이 결혼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자신만 이렇게 지옥 같은 거겠지.

답을 하지 않자 김 회장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일하면 그룹 이미지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의원님께도 도움 될 겁니다. 홍보 효과도 있고요.”

“그렇게 좋게 봐주시면 저야 감사합니다.”

다들 가식적이다.

각자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위선을 떨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이 결혼은 진행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가슴을 죄는 듯, 답답함이 밀려왔다.

숨을 쉬는 게 불편하다고 느껴질 만큼.

“이번 일 잘 해결해 주셔서, 저도 감사합니다.”

“뭐 큰일이라고요. 나랏일 하실 분이 그런 추문에 휘말리시게 둘 수야 없죠.”

차현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그런 일을 대신해 주는 대가로 자신을 저 집에 보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분명 이런 결정에는 김민준의 의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태경과 창국은 잘못된 거래를 하고 있었다.

“어서 드시지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한잔하실까요. 하하.”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재희는 음식을 입에 댈 수조차 없었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가면을 쓴 채, 영혼 없는 말만 내뱉었다.

그중 태경은 누구보다 이 자리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성 추문에 휩싸이게 될 거야.’

정말 그 일을 김 회장이 막아 준 걸까.

창국은 어떻게든 정계에 있는 사람과 손을 잡아 신분 상승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은재희 씨.”

“……네?”

재희가 흠칫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민준이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식사 끝나고, 저랑 술 한잔하시죠. 할 이야기도 많고, 그날 못한 말도 있고.”

날 선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제 곧 결혼도 할 텐데, 자주 만나고 그래라. 응?”

태경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