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또각또각.
높은 스틸레토 힐이 움직일 때마다 복도에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재희는 미간을 구긴 채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들고 있는 백의 손잡이를 더 꽉 그러쥐며 그녀가 숨을 골랐다.
“하…….”
결국 재희는 자리에 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침착해.
그녀가 주문을 외우듯 그 말을 혀끝에 굴렸다.
애초에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이 지옥 같은 선 자리에 나오기까지, 몇 번이고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우리 집에 과분한 사람이야. 너를 보고 싶다고 직접 연락한 걸 보면, 어디서 만난 모양인데. 아버지 한 번만 도와주렴.’
벌써 몇 번째인지.
매번 과분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 대단한 집안이다.
이제껏 봤던 선만 해도 벌써 열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다.
‘이번에도 망치고 오면, 정말 실망할 것 같구나.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실망이라니.
기대는커녕, 관심조차 없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재희는 다짐했다. 오늘도 잘될 일은 없을 거라고.
오늘 맞선 상대는 수인 그룹 셋째 아들이었다.
악명 높은 개망나니.
인맥이 좁은 자신의 귀에도 쓰레기라고 들려 올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후.”
그녀가 숨을 고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10분.
재희는 10분 만에 일어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탁한 공기가 느껴졌다. 긴장감에 입술이 자꾸 말라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이 간절했다.
“아…….”
그동안 즐겨 하던 귀걸이가 말썽인지, 오른쪽 귓불이 욱신거린다.
툭.
손끝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순간, 귀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릿한 감각에 절로 얼굴이 이지러졌다.
허리를 굽혀 손을 뻗는 찰나, 기다란 손가락이 그것을 먼저 집어 들었다.
“이걸 아직도 하고 다니네.”
“……!”
익숙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설마…….
환청이라도 들리는 걸까. 지금 이곳에서 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혀들었다.
“여기.”
놀란 그녀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남자의 손가락에는 그녀의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눈짓하는 그를 보자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재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받아요.”
“…….”
“못 볼 거라도 본 얼굴이네.”
남자가 재희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띵.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남자가 먼저 올라탔다.
재희는 돌처럼 굳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안 탑니까.”
“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파악조차 힘들었다.
귀걸이를 쥔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차현이 다시 버튼을 눌렀다. 불쑥 나온 손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
재희는 사색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났을 때 나오는 그의 특유의 버릇이었다.
“이, 이거 놔요.”
긴장한 탓에 목소리 끝이 볼품없이 갈라졌다. 재희가 손을 비틀자 차현이 던지듯 순순히 놓아 주었다.
재희는 한쪽 구석으로 걸음을 옮겨 잡혔던 손목을 매만졌다.
밀폐된 공간에 둘이 있자 숨쉬기 힘들 정도로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후.”
그가 거칠게 타이를 풀어 냈다.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그는 호텔 라운지 바의 층수를 눌렀다.
재희는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렇게 마주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5년.
그와 헤어진 지 딱 5년 만이었다.
몇 년 만이었지만 그는 여전했다.
탄탄한 몸매, 곧게 뻗은 콧날. 한쪽 눈에만 있는 속 쌍꺼풀. 살이 조금 빠진 건지 턱선은 조금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을 뜯어본 자신이 한심스러워, 잇새로 헛웃음이 흘렀다.
“뉴스 잘 보고 있어요.”
“…….”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재희는 입안 여린 살을 깨물며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답도 하지 못한 채.
긴장한 자신과 달리 그는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나운서인 자신을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그 말을 듣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초고속 엘리베이터였으나 굉장히 더디게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안전 바를 그러쥐며 재희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하려 애썼다.
“결혼하려고 나 버린 줄 알았더니, 아직도 안 했더라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원망 섞인 목소리에 그녀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그래서, 오늘도 수인 그룹 개새끼랑 선을 보는 거고.”
“……그걸.”
“어떻게 알기는. 내 관심은 온통 너였잖아, 은재희.”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매서운 눈매가 그녀를 직시했다.
“선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그는 씹어 뱉듯 말하며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휘청거려 재희는 한참이나 그곳에 서 있어야 했다.
△ ▼ △
“저 기억 안 나세요?”
김민준은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 냈다.
반면 재희는 도무지 대화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차현 때문이었다.
“은재희 씨.”
“……네?”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어디 안 좋으신가요?”
“아뇨. 죄송합니다.”
대화가 들릴 만큼 제법 멀지 않은 거리였다.
태블릿을 보고 있는 차현은 간간이 비소를 흘렸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긴장하지 않는 재희였지만, 옆에 그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녀는 티 나게 동요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해서 선보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아, 네.”
“전에 장안 그룹 창립기념일에서 인사드렸었는데, 기억 못 하시나 보네요.”
민준은 아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만큼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하다.
“앗!”
“괜찮으세요?”
손바닥에 땀이 차 찻잔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베이지색 원피스에 커피가 가득 쏟아졌다.
민준이 냅킨을 들어 그녀의 치마 위를 문지르자, 재희가 질색하며 손을 쳐 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아, 진짜 까탈스럽네.”
30분 내내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게 짜증이 났는지 결국 민준은 성질을 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재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치마를 닦아 내다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 자리는 선이 아니라 결혼 얘기하러 나온 겁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못 들으셨나 봐요. 이미 결혼 날짜 잡혔는데.”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그는 본색을 드러내며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았다. 민준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두 달 후, 수인 호텔에서.”
“못 들었는데요.”
“그건 그쪽 사정이고. 은 의원님께 여쭤보세요.”
“결혼할 일, 없을 겁니다. 그럼.”
재희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들었다. 그러자 민준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를 직시했다.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 이제 그쪽 찾는 곳도 없다면서.”
“뭐라고요?”
“싸가지도 없어, 제 잘난 맛에 사는 나이 많은 공주님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옆 테이블에 앉은 차현이 모든 걸 듣고 있다는 생각에 수치심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내가 거둬 준다고.”
결국 재희는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민준의 얼굴로 뿌렸다.
“아, 씨…… 이게 미쳤나.”
욕을 씹어 뱉으며 민준이 흐르는 물을 닦아 냈다.
“나도 너 같은 개자식이랑은 결혼할 생각 없거든? 숨겨 둔 애도 있는 주제에 감히 누구를 넘봐.”
파들거리는 입술을 깨물며 재희는 라운지를 나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
손이 미끄러져 들고 있던 코트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재희의 뺨에 눈물이 흘렀다.
왜 하필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차현이 있는지.
모든 상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최악이었다.
‘오빠 능력 없잖아.’
‘은재희. 너 진심이야?’
‘응. 그냥 한번 호기심에…… 만나 본 거였어.’
‘너…….’
‘그러니까 그만 질척거려 줄래. 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