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후일담 – 묵돌의 서역 원정 (9)]
묵돌의 보병은 수만 명은 먹잇감에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답궐전이 박혀있는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동안 성벽 위를 지키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군은 대부분 묵돌의 비인간적인 투석기 공격을 피하느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덕에 항적은 아끼는 부장 몇 명과 함께 가장 먼저 박트라의 성벽을 기어오를 수 있었다.
그는 성벽 위에 서자 마자 아직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휘하의 부장과 병사들을 내려다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다들 왜 이리 느려터진 거냐! 이 몸은 먼저 성문을 열러 갈 테니 얼른 따라오너라!”
젊은 우도대위의 노성을 들은 병사들은 안간힘을 쓰며 더 빠르게 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적은 그런 부하들을 뒤로하고 함께 성벽에 올라온 부장 네 명과 함께 허리춤에서 환도를 뽑더니 성벽 아래로 연결된 계단을 향해 달려가면서 다시 소리쳤다.
“우선 계단을 확보하자! 그래야 우리 뒤를 따라오는 굼벵이들하고 함께 성문을 열 수 있다!”
“알겠습니다! 우도대위님!”
그러자 투석기의 포격을 피해 성문 근처로 대피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장수들은 성문 쪽으로 연결된 성벽의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적장 다섯 명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이럴 수가! 바르바로이들이 성벽을 넘었다!”
“말도 안 돼! 성벽에 사다리가 걸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다! 어서 저놈들을 막아라!”
성문의 수비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자 그리스인 병사 수십 명이 좁은 계단을 달려가 짧은 창을 앞으로 내밀면서 항적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항적은 오히려 전속력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가다가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호랑이처럼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흐읍!”
그는 적군이 앞으로 내민 창을 뛰어넘어 적진 한복판에 섰고 후열에 서 있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병사들은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항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악! 깜짝이야! 누구야! 이 거인은!”
“멍청아! 적장이잖아! 얼른 팔카타를 뽑으라고!”
그리스인 병사들은 좁은 곳에서 쓰기 어려운 창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외날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항적은 적군이 무기를 바꿔들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어림없다! 이놈들아!”
8척 장신의 장수는 환도의 자루를 양손으로 잡더니 거침없이 칼춤을 추었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군 병사들은 목이나 팔을 베이고 비틀거리다 성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끄아아아악!”
“괴물이다! 이놈 완전 괴물이야!”
그렇게 항적이 온몸에 적군의 피를 뒤집어쓰며 맹활약하는 동안 고조선 출신 팽배수 수백 명이 성벽을 기어 올라왔다.
그들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밧줄로 등에 묶어뒀었던 방패와 환도를 양손에 들고 성문으로 이어진 계단을 달려 내려오면서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항 우도대위님을 지켜라!”
항적은 앞길을 막았던 마지막 그리스인 병사를 발길로 걷어차 성벽 아래로 떨어트린 다음 뒤늦게 쫓아온 부하들을 올려다보면서 외쳤다.
“서역인들은 벌써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고 있다! 이대로 성문까지 밀어붙일 테니 이 몸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와라!”
기세가 오른 항적과 그의 부하들은 물밀 듯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 사기가 꺾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군 병사들을 몰아내고 성문을 걸쇠를 올리고 온몸으로 힘껏 밀었다.
“영차! 영차! 영차!”
잠시후 박트라 성의 커다란 성문이 활짝 열리자 묵돌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기뻐하며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크하하하하하하! 벌써 성문이 열릴 줄은 몰랐구나! 전 기병대는 시내로 돌격하라! 반항하는 처치하고 투항하는 자는 포박해서 모두 내 앞으로 끌고 와야 한다!”
우현왕의 외침이 벌판에 울려 퍼지자 흉노의 기병 수만 기가 밀물처럼 박트라 성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의 왕 에우튀데모스는 왕궁의 첨탑의 전망대에서 흉노의 기병대가 일으키는 자욱한 흙먼지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올림포스의 신들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신다는 말입니까?! 저 바르바로이 마적 떼는 선왕을 죽인 찬탈자를 응징하기 위한 신의 벌이란 말입니까?!”
그때,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왕실 근위대장이 에우튀데모스 왕의 등 뒤에서 다가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보고했다.
“헉! 헉! 폐······ 폐하! 지금은 올림포스에 계신 신들을 원망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적군이 빠른 속도로 시내를 점거하면서 왕궁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어서 박트라 성 밖으로 피신하시옵소서!”
“대체 어디로 도망가란 말이냐?! 박트라가 점령당하면 곧 온 나라에 저 바르바로이 마적 떼가 들끓을 터인데!”
“우선 북쪽의 스키타이계 유목민 부족에 망명하여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자들은 자기 영토 바로 근처에 강력한 유목민 세력이 들어서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길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바르바로이에게 쫓겨나 바르바로이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니! 어서 출발하자! 근위대장! 서둘러 왕궁 안에 남아있는 병력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짐을 호위하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 * *
에우튀데모스 왕이 왕족과 최측근 대신과 장수만 데리고 박트라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박트라 시내에 퍼져 나가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병사들도 무기를 버리고 흉노의 병사들에게 항복했다.
그러자 묵돌은 장수들에게 박트라 시내의 왕궁과 관청, 그리고 곡물 창고 등 여러 주요시설에 병사를 보내 점거하게 한 다음 에우튀데모스 왕의 옥좌에 앉아서 공을 세운 장수들을 칭찬했다.
“모두 초원의 전사들답게 잘 싸워주었다! 아사달에 계신 왕검께서도 너희의 활약을 보셨으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을 거다!”
흉노의 장수들은 성정이 거친 사령관이 보기 드물게 칭찬을 아끼지 않자 두 손을 모아 읍하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우현왕님!”
“우현왕님께서 기발한 전술을 고안해내신 덕분에 큰 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묵돌은 마지막 장수의 대답을 듣고 박장대소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푸하하하하하하! 기발한 전술이라는 건 발석차로 사람을 쏜 걸 말하는 것이렷다? 마지막으로 발석차 발사대에 장전된 놈들이 성문이 열리는 바람에 살았다는 걸 알자마자 울먹거리는 건 참으로 볼만했지! 항 우도대위!”
“네.”
“방금 본인이 말한 포로들은 자네가 성문을 일찌감치 연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니 그놈들 목숨은 생명의 은인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그 서역인 세 놈을 자네에게 맡길 테니 하인으로 쓰든 궁술 연습용 과녁으로 쓰든 마음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우현왕님.”
“그럼 큰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논공행상을 해야겠지? 유 아장은 앞으로 나와라.”
유방은 부러운 눈빛으로 항적을 바라보다가 묵돌이 부르자 화들짝 놀라면서 그의 앞으로 달려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우현왕님!”
“자네도 의외로 이번 전투에서 활약했다지? 자네의 부대가 적의 병영을 일찌감치 점거한 덕분에 시가전이 수월하게 진행됐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우현왕님! 거기서 무기를 든 서역인 놈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길래 저하고 번쾌하고 하후영이 아주 피똥을 싸면서 건물 입구를 틀어막았지요!”
“푸하하하하! 그 저급한 말투는 영 고쳐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구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니 전에 말한 대로 자네를 좌도대위에 책봉하겠다. 그리고 자네를 따르는 부장 번쾌와 하후영은 천인대장에 임명하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우현왕님! 으하하하하! 나도 이제 귀족이다!”
유방은 우현왕과 여러 장수가 보는 앞에서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 날뛰다가 갑자기 한신의 앞으로 달려가서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한 좌도대위? 이거 그동안 나보다 계급이 높다고 무시하는데 재미 붙였었는데 이를 어쩌나? 이제 우리 동급이네?”
“유 좌도대위. 여전히 생각이 짧으시구려.”
“그게 무슨 말이야?!”
“별 볼 일 없는 공을 세운 유 좌도대위도 승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내가 지금의 작위에 머무를 이유가 없지 않소?”
“뭐······ 뭐가 어째?”
묵돌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씩 웃더니 이번엔 한신과 항적을 불렀다.
“참으로 듣기에 고까운 말투지만, 공을 세운 장수에게 상을 내리지 않을 순 없지. 한 좌도대위. 항 우도대위. 본인의 앞으로 나오너라.”
“항 우도대위 대령했습니다.”
“한 좌도대위 대령했습니다.”
“너희 둘은 각자의 지략과 무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뛰어난 책사와 전사는 그에 걸맞은 자리에 앉혀야겠지. 지금부터 한신은 좌록리왕에, 그리고 항적은 우록리왕에 책봉하겠다.”
우현왕이 말을 마치자 흉노의 모든 장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한신과 항적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유방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부하인 번쾌의 곁으로 돌아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번쾌야. 좌리록왕인지 뭔지가 그렇게 높은 자리냐?”
“아 유형! 흉노의 장수들하고 지낸 지가 몇 달째인데 아직도 그것도 몰라요? 좌록리왕과 우록리왕은 우현왕 바로 밑의 작위이자 군사계급이잖아요! 흉노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로 높은 지위라고요!”
“뭐?! 그럼 한신 저놈이 또 내 상관이 된 거야?!”
“상관 정도가 아니라 고조선의 편제로 치면 장군이 된 거라고요!”
“이······ 이런 시부럴!”
적잖은 흉노의 장수들도 유방과 마찬가지로 초나라 출신인 젊은 장수가 고속승진하자 질투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두 사람의 출중한 재능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한 데다 감히 묵돌의 뜻을 거스를 용기가 없었기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묵돌은 부하 장수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자기에게 불만을 드러내는 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흉노의 장수들도 한 명씩 불러서 각자가 세운 공적에 따라 작위와 재물을 내렸다.
논공행상 절차가 끝나자 항적이 묵돌에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진언을 올렸다.
“우현왕님. 어찌 부하들의 상만 내리시고 자기 몫의 전리품을 챙기지 않으십니까? 이번 원정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현왕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기왕 왕좌에 앉으셨으니 이참에 박트라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하시지요.”
“물론 나중에는 그럴 생각이다. 그런데 내 즉위식에는 이 나라를 다스리던 왕족들의 머리를 서역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해두고 싶구나. 그러려면 우선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겁쟁이 왕을 붙잡아야겠지.”
그 말을 듣고 한신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조언을 올렸다.
“우현왕님. 에우튀데모스 왕은 북쪽으로 도망쳤다고 하니 분명 서역인들이 스키타이라고 불리는 유목민 부족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일 겁니다. 그자를 붙잡으실 생각이라면 서둘러 추격대를 보내셔야 일이 귀찮아지지 않으리라고 사료 되옵니다.”
“이 묵돌이 그 정도도 모를 것 같나? 지금은 겁쟁이 왕이 북쪽으로 도망치게 놔둬라. 본인이 그놈을 넘기라고 했을 때 북쪽의 유목민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놈들을 정복할지 동맹을 맺을지를 결정할 생각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