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후일담 – 묵돌의 서역 원정 (8)]
기원전 212년 초여름 어느 날, 묵돌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드디어 아무다리야 강을 건넜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정찰부대는 적군이 수도를 향해 진군하는 적군을 발견하자마자 적습이 임박했음을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아직 수만 명의 보병을 한 번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음에도 보병 방진의 측면과 후방을 지킬 중기병대가 궤멸당하는 바람에 온통 평야 지대인 수도 근처에서의 회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묵돌의 서역 원정군은 거침없이 남진하여 신속하게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수도 박트라를 포위할 수 있었다.
흉노의 장수와 병사들은 도시를 포위하기 위한 울타리를 치면서 금방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며 기뻐하는 동안 묵돌은 한신과 함께 박트라의 성벽을 바라보면서
“당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성벽이구나. 한 좌도대위. 대체 이 성을 어떻게 함락시킬 수 있겠나?”
“박트라의 성벽은 높이도 대단하지만, 진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이 아니라 크고 단단한 돌을 통째로 쌓아서 성을 지어 대단히 튼튼합니다. 정공법으로 성을 공략하려면 해를 넘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검께서 하사하신 신형 발석차로도 저 성벽을 부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인가?”
“본래 발석차는 성벽보다는 망루나 성문을 부수는데 더 유용한 병기입니다. 신형 발석차는 거의 장정 한 사람의 몸무게와 맞먹는 큰 돌을 발사할 수 있지만, 저렇게 튼튼한 성벽에 금방 구멍을 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구먼. 그 신형 발석차의 위력을 확인해보고 싶으니 어서 설치하라.”
“그게······ 신형 발석차는 워낙 거대하고 구조가 복잡하기에 부품을 따로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전장에서 조립해야 하는데, 한 대 조립하는 데 족히 열흘에서 보름은 걸릴 겁니다.”
“음······ 성능이 좋은 만큼 제약도 많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우현왕님.”
묵돌은 일단 흉노의 영토로 이어진 병참선을 확보해 두긴 했지만, 초원에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 본국에서 보내는 수송대의 행군속도가 느려져서 박트라를 포위한 서역 원정군의 군량과 마초(馬草)가 부족해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병사들의 볼을 발갛게 물들이기 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싶었다.
한신은 그런 묵돌의 생각을 읽고 그에게 위험부담이 크지만, 빠르게 성을 공략할 수 있는 작전을 제안했다.
“우현왕님. 혹시 올해 안에 박트라를 공략하고 싶으시다면 저 성벽에 굵은 화살을 쏴서 박은 다음 병사들이 발판과 손잡이처럼 밟고 잡으면서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면 어떨는지요?”
“뭐라고? 아무리 화살이 굵어도 어찌 성벽에 박힌단 말이냐?”
“고조선에서 공성전에 쓰는 답궐전이라는 공성전용 화살을 좀 가져왔습니다. 서역인이 쌓은 성이 아무리 튼튼해도 이 답궐전을 튕겨낼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래? 어서 그 화살을 박트라의 성벽을 향해 쏴봐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현왕님.”
한신은 곧 묵돌의 지시에 따라 대형 쇠뇌 상자노와 작은 목재 탑을 등에 얹은 낙타 한 마리를 데려오더니 낙타에 올라타서 조금 작은 말뚝처럼 보일 정도로 굵은 화살을 쇠뇌에 장전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목표물인 성벽을 향해 답궐전을 발사했다.
- 투웅!
쇠뇌의 질긴 현을 튕기는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조금 가느다란 말뚝처럼 굵어 보이는 화살이 성벽에 정확히 명중하면서 단단한 돌덩이로 만든 벽에 박혔다.
묵돌은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히 쓸모있는 물건이군. 분명히 저 정도로 굵은 화살이 여러 개 박혀있으면 몸이 날랜 병사는 저걸 사다리 삼아서 성벽에 기어오를 수 있을 거다. 크고 무거운 사다리를 옮기다가 전사들이 적이 쏜 화살이나 돌에 맞을 일도 없을 거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성벽에 박힌 답궐전을 밟고 올라갈 때는 어쩔 수 없이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뭐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잠깐만······ 그 신형 발석차와 답궐전을 함께 사용하면 아군 병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박트라를 함락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우현왕님. 발석차로 발사한 돌덩이는 날아가는 속도가 느려서 어지간한 적군은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쏘려는 건 돌이 아니니까. 어서 부장들에게 신형 발석차를 조립하라고 지시해라.”
한신은 묵돌의 명을 받고 읍하면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저 미소는 저번에 애마를 죽이지 않은 부하 장수들을 처형하실 때 지으시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대체 무슨 끔찍한 전술을 생각해내신 건지 불안하구나.’
* * *
한신이 묵돌에게 공성전략을 제안한 지 열흘이 지난날, 서역 원정군에 종군한 기술자들은 트레뷰셋 세대를 만들었다.
유방과 항적은 중세 수준의 기술로 만든 망루처럼 커다란 투석기를 보고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히야······ 항 동생. 저렇게 커다란 발석차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구먼. 안 그런가?”
“그러게 말이오. 아사달 시내에서 가끔 보이는 코끼리보다도 훨씬 큰 것 같소. 아무래도 우현왕께서 본격적으로 공성전을 시작하실 모양이오.”
“그런데 왜 발석차만 조립하고 돌덩이를 준비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으시는 걸까?”
“글쎄올시다? 돌이 아니라 불붙은 숯 같은 게 들어있는 화로 같은 걸 발사하려는 모양이오.”
“어쩌면 뱀이 들어있는 항아리일지도 모르지!”
“뱀? 유 형은 여전히 엉뚱한 상상을 잘하시는구려.”
항적은 농담을 한 다음 실실 웃고 있는 유방을 나무랐지만, 묵돌이 준비한 투석기의 탄환은 유방의 상상력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묵돌은 한신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항적이 저번 아무다리야강 전투에서 붙잡은 포로 수천 명을 투석기 옆으로 데려와 세워두었다.
항적은 그런 묵돌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우현왕님. 서역인 포로를 왜 발석차 옆에 세워두시는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아직 한 좌도대위에게 듣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이놈들을 투석기로 세 명씩 성벽 위로 발사해서 적군이 혼란에 빠트려서 초원의 전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를 시간을 벌 거다.”
살면서 흉포함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져본 적이 없던 항적도 묵돌의 말을 듣자마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우······ 우현왕님. 어찌 사람 목숨을 가지고 그리 험한 일을 하시려 하십니까?”
“항 우도대위. 감히 이 우현왕에게 충고하는 거냐?”
“당치 않습니다. 그저 소장의 부족한 견해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본인은 오히려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기에 이놈들의 목숨을 요긴하게 써서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거다. 그래야 아군도 적군도 사상자가 적게 나올 거 아니냐?”
그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묵돌의 말을 듣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는데, 정작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그리스인 포로들은 고조선의 한국 조어를 알아듣지 못했기에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묵돌은 항적의 입을 틀어막은 후 휘하의 모든 장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금 전 적국의 왕에게 전령을 보내 최후통첩을 전했다! 서역인들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관대한 통치를, 그렇지 않으면 박트라를 점령하고 모든 왕족의 목을 치겠노라고 말이다! 전령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않으면 바로 공격을 시작할 테니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거라!”
그의 외침을 들은 원정군의 장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부하들의 곁으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약 한 시간이 지나자 성 쪽을 감시하고 있던 한 초병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묵돌에게 보고했다.
“우현왕님! 박트라 쪽에서 기병 한 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혈마를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령이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벌써? 아무래도 서역인 놈들이 피를 봐야만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그런데 잠시 후 흉노의 병사들이 데려온 것은 목이 잘려 머리가 없는 전령과 죽은 주인을 태우고 온 말이었다.
묵돌은 죽은 부장의 시신을 보자마자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벌게지더니 우레같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런 발칙한 놈들을 봤나! 감히 내 부하를 함부로 죽였겠다! 전군 박트라를 공격하라! 낙타 기병대는 답궐전을 발사하라!”
우현왕의 성난 외침이 초원에 울려 퍼지자 한신이 지휘하는 낙타 기병 5천 기가 적군의 활 사정거리 밖에서 배회하면서 낙타 등 위에 설치된 대형 쇠뇌로 굵은 철제 화살을 쏘아댔다.
- 퉁! 퉁! 투둥!
낙타 기병이 발사한 답궐전 5천 발은 크고 작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공중을 날아 박트라 성의 성벽의 한 면에 빼곡이 박히기 시작했다.
그리스인 수비병들은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적의 낙타 기병을 비웃었다.
“허허허! 바르바로이 쇠뇌수들은 외모만 험악했지 실력이 형편없는 모양인데?”
“그러게? 어떻게 화살 한 발이 성벽 위로 안 날아오냐?”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묵돌은 이번엔 투석기 부대 쪽을 바라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서역인 놈들을 성벽 위로 쏴버려라!”
흉노의 병사들은 우현왕의 명을 듣자마자 그리스인 포로 세 명을 각각 질긴 쇠가죽으로 만든 투석기 세 대의 발사대에 밀어 넣었다.
그리스인 포로들은 그제야 흉노인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발버둥쳤지만, 온몸이 밧줄로 묶여있었기에 아무 소용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악! 풀어줘 이 정신 나간 놈들아!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피도 눈물도 없는 바르바로이들아! 우리도 사람이야! 사람!”
“복수의 여신이시여! 동포들이 이 피맺힌 원한을 갚도록 도와주소서!”
그러나 흉노인 공병들은 그런 포로들의 마지막 발악을 애써 무시하면서 발사대를 매어 잡아둔 밧줄을 손도끼로 끊어버렸다.
- 덜커덩!
투석기 세 대의 발사대가 일제히 하늘 높이 솟아오르자 허공에 발사된 그리스인 포로들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면서 하늘을 날아 동포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불쌍한 포로들은 성벽 위에 떨어지면서 산산이 조각나버렸고,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박트라 수비대의 궁수들은 성벽 아래로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 엎드려서 구토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바르바로이들이 포로를 투석기로 쏜다!”
“우에에에엑! 우에에에에엑!”
그러자 항적은 휘하의 팽배수 부대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적군이 혼란에 빠졌을 때 성벽을 기어올라라! 성벽 위의 광경은 무척 참혹하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한다!”
유방도 그런 항적에게 지지않기 위해 휘하의 부장들과 팽배수 부대를 독려했다.
“야 이놈들아! 우리도 이번에는 그럴듯한 공을 세워서 출세해보자! 언제까지 새파랗게 어린 한신과 항우에게 밀릴 수는 없잖느냐?”
“유 형! 그게 어디 우리 탓이오? 유 형이 그 둘 보다 못한 탓이지.”
“시끄럽다! 번쾌! 잡소리 할 틈이 있으면 얼른 방패랑 검을 들고 달리기나 해라!”
묵돌은 아군 보병들이 기세 좋게 박트라 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번 외쳤다.
“크하하하하하하! 신형 투석기의 성능이 정말 대단하구나! 이놈들아! 얼른 한 발 더 발사하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 아직 성벽 위에 적군이 남아있는 게 안 보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