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후일담 – 묵돌의 서역 원정 (7)]
사자의 포효와 같은 항적의 외침이 전장에 퍼져 나가자 혈투를 벌이던 기병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하나같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흉노의 기병들은 젊은 우도대위의 커다란 손에 화려한 투구를 쓴 적장의 머리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우레같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항 우도대위께서 적장의 목을 베셨다! 우리가 이겼다!”
“왕검 폐하 만세! 맹장 항우 만세!”
그리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부장들은 장군이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부하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라! 한 명이라도 박트라에 도착해서 대왕께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
“모두 흩어져라! 몰려다니면 적의 추격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자 그리스인 기병들은 손에 든 무기를 던져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수도 박트라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흉노의 부장들은 등을 보이면서 달아나는 적군을 보고 다급한 목소리로 항적에게 재촉했다.
“항 우도대위님! 적들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서 추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 기회를 놓치면 저놈들은 부상을 치료하고 기력을 회복한 다음 다시 우리의 목에 칼을 들이댈 겁니다!”
그러나 항적은 부하들의 말을 듣고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됐다. 그냥 도망치게 내버려 둬라. 우리 군은 이미 사람과 말이 모두 새벽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행군과 전투를 계속하는 바람에 많이 지쳤으니 더 싸워봐야 우리 병사만 더 다칠 뿐이다.”
“그럼 저희는 무엇을 하고 있으면 될는지요?”
“전리품은 나중에 챙겨도 되니까 우선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다친 병사와 말을 치료하는 데 전념해라. 그리고 우리군과 적군의 사상자 수를 헤아려보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 서역인들이 적지 않는데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포로 중에서 부상이 심한 자는 처치하고 살려서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는 단단히 포박한 다음 잘 감시하거라. 그놈들의 처우는 우현왕께 맡길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항 우도대위님.”
흉노의 기병들은 항적의 명에 따라 전사자와 부상병이 널브러져 있는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치명상을 입은 그리스인 포로들은 공터로 끌려 나와서 무릎을 꿇은 채로 참수당했다.
그렇게 아무다리야 강변의 전투가 흉노 중기병대의 승리로 끝났을 때, 묵돌이 이끄는 서역 원정군 본대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북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페르가나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동안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주적은 남서쪽의 셀레우코스 왕국과 서쪽의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이 세운 파르티아였기에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왕국의 북동부에는 수비병이 많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묵돌은 페르가나의 관청 집무실에 들어가 총독의 의자에 앉으면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큰 도시를 차지하자 크게 기뻐했다.
“하늘이 이 묵돌을 도우시는구나! 어쩔 수 없이 페르가나의 수비대를 그냥 지나쳐서 남진하려고 했는데, 서역인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머리를 조아리다니!”
그 말을 듣고 본대와 합류한 한신이 대답했다.
“배후의 적군에게 병참선을 끊길 걱정을 하지 않게 돼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제 아무다리야 강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항 우도대위의 기병대와 합류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한 좌도대위가 이 주변의 농경지를 휩쓸고 다니면서 적군을 겁준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유 아장이 너스레를 떨면서 페르가나의 성주를 잘 다독인 덕도 있고.”
뜻밖에 칭찬을 듣자 유방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면서 묵돌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그렇게 소신을 극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으로 두 사람에게 페르가나의 성주가 바친 전리품 중에서 황금 한 근과 낙타고기 열 근, 좋은 술을 한 독씩을 하사하마. 오늘 하루 휘하의 장수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나눠 먹으면서 푹 쉬도록 해라.”
그런데 유방은 적잖은 상을 받은 후에도 손에 들고 있는 과자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 묵돌에게 물었다.
“저······ 우현왕님. 혹시 제게도 흉노의 작위를 내려주실 계획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뭐라고? 유 아장이 작은 공을 세웠다고 너무 앞서나가는군. 흉노의 작위는 뛰어난 군사지휘관과 강한 전사에게만 주어진다. 한신과 항우는 아사달에서 이미 자신의 가치를 드러냈지만, 너는 아직 네 혀가 제법 매끄럽다는 사실만 증명했을 뿐이지. 본인에게 작위를 하사받고 싶다면 다음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봐라.”
묵돌이 대답을 마치자 유방은 울상을 지으면서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이거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무슨 수로 한신을 지략으로 이기고 항우와 무예를 다툴 수 있겠어! 이번 일로 내가 승진할 줄 알고 기뻐하던 번쾌하고 하후영한테 대체 뭐라고 말하란 말이야!’
그런데 그때, 관청 집무실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묵돌에게 읍하면서 보고했다.
“우현왕님. 방금 항 우도대위가 보낸 전령이 페르가나의 성문을 지났다고 합니다..”
“그래? 전령의 차림새가 어떻다더냐?”
“큰 전투를 치렀는지 갑옷에 피가 묻어있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분명 적 기병대와 전면전을 피하라고 명령했을 텐데?! 서역인의 매복에 당하기라도 한 건가?! 당장 전령을 본인 앞으로 데려와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현왕님.”
병사는 즉시 다시 집무실 밖으로 나와서 겉 부분의 두루마기가 조금 찢어진 두정갑을 입은 전령을 묵돌에게 데리고 왔다.
항적이 보낸 전령은 의자에 앉아있는 묵돌에게 읍하면서 보고했다.
“십인대장 어유가 우현왕님을 뵙습니다.”
“대체 그 초췌한 몰골은 뭐냐?! 항 우도대위가 박트리아 왕국 기병대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참패한 거냐?!”
“아닙니다. 우현왕님. 항 우도대위가 이끄는 중기병대는 적의 중기병대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뒀습니다. 아군 사상자는 5천 기 중 1천 기 정도이지만, 적은 1만 기 중 약 5,500기의 기병이 죽거나 다쳤고 1천 기가 포로가 되었으며 나머지 3,500기만이 살아서 도망쳤습니다.”
“뭐가 어쩌고저째! 항우 그 발칙한 놈이 감히 내 명을 거역하고 적군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단 말이냐!”
묵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분통을 터뜨리자 항적의 전령은 안색이 하얘지면서 조금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던 흉노의 장수들이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시뻘게진 묵돌에게 조심스럽게 진언을 올렸다.
“항 우도대위가 우현왕님의 명을 어겼다면 분명 어떤 피치 못할 사유가 있을 겁니다.”
“우선 그의 변명을 들어보시고 벌을 내릴지 상을 내릴지를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음······.”
성정이 거친 묵돌도 그런 부하 장수들의 의견을 마냥 무시하지 못하고 다시 의자에 앉은 다음 생각에 잠겼다.
‘내 명을 거역한 건 참으로 괘씸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칭찬할만한 전공을 올렸지. 그런 자를 함부로 처벌하면 부하놈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스스로 난관을 헤쳐나갈 생각은 안 하고 내 입만 쳐다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곁에 있는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찌 됐든 아군이 적 기병대를 물리쳤다면 아무다리야 강의 도강지점을 확보했다는 거겠지. 박트리아 왕국의 보병대가 북진하기 전에 항 우도대위의 중기병대를 쫓아내기 전에 남진하겠다. 전 기병에게 내일 아침까지 행군할 준비를 마치라고 전해라! 보병은 페르가나에 남겨두고 가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현왕님!”
묵돌이 외치자 흉노의 장수들과 한신, 유방은 즉시 페르가나의 관청 밖으로 나가서 숙소에서 쉬고 있는 기병들에게 행군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 묵돌은 이끄는 기병 4만 5천 기는 페르가나의 성문에서 나와 밤낮으로 말을 달려 아무다리야 강변에 도착했다.
강으로 이어진 길에서 마중을 나와 있던 항적은 우현왕이 자기 곁으로 다가오자 막에서 내리면서 두 손을 모아 읍했다.
“우도대위 항우가 우현왕님을 뵙습니다.”
묵돌은 태연하게 인사하는 항적을 보고 말에 탄 채로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언성을 높였다.
“오는길 에 전령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으니 적이 덤비지 않았는데도 네가 먼저 중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적 기병대를 공격했다지?”
“그렇습니다. 우현왕님.”
“뻔뻔스럽게도 참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구나! 그래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초원의 전사가 몇 명이나 죽거나 불구가 되었느냐?!”
“1천 명입니다.”
“네게 변명할 기회를 주마. 넌 감히 내 명을 어기고 초원의 전사 1천 명을 잃은 일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묵돌과 다른 흉노의 장수들은 항적이 병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구차하고 긴 변명을 늘어놓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젊은 맹장의 대답은 흉노인들의 예상보다 훨씬 짧고 단순한 것이었다.
“소장의 예상보다 반의반도 안 되는 병력을 잃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뭐가 어째······? 그럼 넌 병력의 3분의 2를 죽여서라도 적 기병대를 궤멸시킬 생각이었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소장이 아무다리야 강에 도착하여 주변을 정찰해보니 서둘러 강 건너에 진을 친 적 기병대를 물리치지 않으면 아군이 강을 건너기 무척 어려워질 거로 판단했습니다. 소장을 항명죄로 다스리시겠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만, 다음에도 이런 상황을 맞이하면 다시 같은 작전을 수행할 겁니다.”
묵돌은 항적의 당찬 대답을 듣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하! 이놈 아주 물건이로군! 왕검께서 아주 대단한 장수를 추천해주셨구나! 네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군법대로라면 항명죄는 극형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이번에는 벌대신 상을 줄 수밖에 없겠구나! 네게도 한 좌도대위와 유 아장과 같은 상을 내리도록 하마!”
그 말을 듣고 한신과 유방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이번에야 말로 항 동생의 목이 달아나는 줄 알았네.”
“그러게 말일세. 유 아장. 저놈은 아마 죽을 때까지 저 야생마 같은 기질을 고치지 못할 것 같군.”
“아! 진짜! 또 계급 높다고 하대하는 거냐?”
“뭘 성질을 부리고 그러나? 공석이니 더더욱 공사를 분명히 해야 하거늘.”
묵돌은 그런 두사람을 보고 피식 웃은 다음 그의 곁에 있는 흉노의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오늘 일을 보고 전장에서 내 명을 어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품은 자들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 하지만 항명죄를 저지른 자는 항 우도대위가 오늘 거둔 승리와 비슷한 공적을 올리지 못한 자는 거열형에 처할 테니 잘 생각해보고 처신하는 게 좋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우현왕님!”
“그럼 파르가네에 전령을 보내서 보병대를 불러오고 아무다리야 강을 건널 준비를 하자! 다음 목표는 적국의 수도 박트리아다! 항 우도대위!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도강지점으로 우리를 안내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현왕님.”
항적은 다시 묵돌에게 읍한 후 말 위에 올라 4만 5천 기의 기병대를 강의 상류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