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후일담 – 묵돌의 서역 원정 (4)]
흉노의 장수와 병사들은 애마를 죽이라는 명령을 거역했다고 참수당하는 동료와 상관을 바라보면서 침통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묵돌이 행한 잔혹한 충성심 검증은 휘하의 가장 사랑하는 연지를 활로 쏘아 죽이게 해서 부하의 충성심을 확인했던 원 역사의 묵돌 선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온화한 것.
비록 부자의 사이가 좋지 않았더라도 고조선의 문화와 불교에 심취한 좌현왕 두만의 유순한 성품이 묵돌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하지만 조상보다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온 흉노의 젊은 장수들도 치열한 전란의 시대를 경험한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보다 독기가 빠진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묵돌은 원하는 데로 부하들의 군기를 확실히 휘어잡을 수 있었다.
그 후 초원의 혹독한 겨울이 지나가고 기원전 212년의 봄이 찾아오자 우현왕 묵돌은 부락 근처 평야에 휘하의 장수와 병사를 모두 집결시킨 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위세가 대단하군. 우리가 국경을 넘으면 박트리아 왕국의 나약한 농사꾼들의 아연실색하겠군그래.”
서역 원정군의 병력 구성은 신형갑옷 두정갑으로 무장한 중기병 1만 기와 가벼운 차림의 궁기병 3만 5천 기, 대형 쇠뇌 상자노를 설치한 낙타 기병 5천 기, 그리고 보병과 궁수 5만 명.
유목 민족만이 꾸릴 수 있는 철저하게 기병 중심인 군대였다.
묵돌은 검고 덩치 큰 말을 타고 병사들의 곁으로 다가가면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고조선의 전사들이여! 드디어 왕검의 명을 받들어 동맹국을 위협하는 박트리아 왕국을 멸하고 그 땅에 우리의 나라를 세울 때가 되었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자는 병졸이라도 제후의 작위에 봉할 것이며 적에게 등을 보이는 자는 왕족이라도 본인이 직접 목을 벨 것이다! 모두 단군왕검과 푸른 늑대의 후손다운 전공을 올려 명예로운 전사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거라!”
우현왕의 거침없는 연설에 기세가 오른 장수와 병사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답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진정한 하늘이 내린 푸른 늑대의 후손 묵돌 만세!”
묵돌은 말을 타고 환호하는 병사들의 사이를 천천히 지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면서 서역 원정군 행렬의 선두에 서서 행군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보름 후 서역 원정군이 훙노와 박트리아 왕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말을 타고 사흘 거리에 도착하여 밤을 나기 위해 초원에 숙영지를 짓고 있을 때, 묵돌은 자기 천막으로 항적과 한신을 불렀다.
두 사람은 흉노 출신 병사에게 우현왕의 명령을 듣자마자 지휘관 천막에 찾아가 의자에 앉아있는 묵돌에게 읍하면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우현왕님.”
“박사 한신이 우현왕님을 뵙습니다.”
“조금 늦었군. 본인이 왜 두 사람만 따로 불렀는지 짐작하는 바가 있느냐?”
그 질문에 항적이 먼저 대답했다.
“소장과 한 박사에게 이번 전쟁의 서막을 열 기회를 주시려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맞다. 자네는 병법에 그리 밝지 않은 데도 장수로서의 감이 대단하단 말이지. 마치 야성의 감이 살아있는 맹수 같다고나 할까?”
“감사합니다. 우현왕님. 그럼 소장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시려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 박사에게는 궁기병 5천 기를, 그리고 항 아장에게는 중기병 5천 기를 맡기겠다. 그들을 지휘하여 서역 원정군 중 가장 먼저 국경을 넘어서 적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 기병대의 진군을 방해해라.”
그 말에 이번에는 한신이 두 손을 모으면서 입을 열었다.
“우현왕님. 항 아장은 그저 하급 무관일 뿐이고 박사직은 무관이 아닌라서 과연 자존심 강한 초원의 전사들이 저희 두 사람의 명령을 순순히 따를지 의문입니다.”
“흠······. 그렇긴 하겠군. 지금부터 원정군의 사령관으로서 흉노의 선우이시자 고조선의 군주이신 왕검을 대신해 한 박사를 좌대도위에, 항 아장은 우대도위에 책봉하겠다. 그럼 감히 두 사람의 명을 거스르는 자는 없겠지.”
그 대답을 들은 한신과 항적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좌대도위와 우대도위는 흉노에서 각각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로 높은 작위이자 무관직으로 지금까지는 흉노 출신자 외에는 책봉된 적이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항적은 뜻밖에 고속 승진을 하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귀에 닿도록 미소 지었다.
‘유 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배 아파서 술을 독채로 퍼마시겠군.’
묵돌은 그런 항적의 생각을 읽고는 갑자기 정색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벌써 기뻐할 것 없다. 두 사람의 능력을 높이 사서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만큼 너희가 자리에 걸맞지 않은 성과를 낼 때는 목숨으로 책임을 지게 해야 초원의 전사들이 불만을 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떠냐? 지금이라도 자신 없으면 작위를 사양하고 그저 하급 무관과 책사로서 종군해도 좋다.”
우현왕의 말에 항적이 먼저 다시 읍하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람은 어차피 언제가 죽는 법입니다! 어찌 사내대장부가 목숨이 아까워서 천하에 무명을 알릴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반드시 앞길을 가로막는 건방진 색목인 놈들을 모두 처죽이고 본대의 진로를 닦겠습니다!”
그러자 한신도 묵돌에게 읍하면서 차분하지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신, 아니 소장도 항 우대도위와 같은 생각입니다. 우현왕님의 뜻대로 박트리아군 기병대를 적국의 수도 박트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하겠습니다.”
“호······ 그대는 이미 본인의 의중을 읽었단 말인가?”
“우리 군의 세력이 적군과 정면으로 회전을 벌여볼 만한데도 별동대를 둘이나 앞세워 적진을 교란하시려는 건 가장 적국의 전력 중 가장 껄끄러운 중기병대를 우리군의 행군로에서 떼어내려 하신 것 아닙니까? 한혈마의 기동력과 지구력을 활용해 적진 깊숙한 곳을 휘젓고 다니면 박트리아의 왕은 분명 기병만 출격시켜 군량을 생산할 농지를 지키려 들겠지요.”
“과연 한 좌대도위로군. 한 좌대도위가 기동력이 좋은 궁기병대로 평야 지대의 방어가 허술한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워 박트리아 왕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군량 보급을 방해하고 항 우대도위는 적국의 수도 박트라 주변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적 중기병대가 한 좌대도위의 별동대를 공격하러 가지 못하도록 진군을 방해하라.”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가 모두 사실이라면 어렵지 않은 임무로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현왕님.”
“알겠습니다. 반드시 본대가 박트라 근교에 도착하는 날에 적장의 목을 베서 우현왕님께 바치겠습니다.”
묵돌은 항우의 패기 넘치는 대답을 듣고 눈썹을 조금 꿈틀거리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항 우대도위는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지 마라. 박트리아 왕국의 중기병대는 등자를 사용하진 않지만, 말과 사람이 모두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고 숙련된 기수가 많아서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네가 아무리 용맹스러워도 적의 절반밖에 안 되는 기병만 이끌고 전투를 벌인다면 십중팔구 패하고 말겠지. 적의 중기병대가 박트라의 성문을 나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견제하면서 진군을 방해하는 정도로 족하다.”
“음······. 알겠습니다. 우현왕님.”
그 후 한신과 항적에게 묵돌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더 들은 다음 숙소로 돌아갔다.
묵돌은 그런 두 장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저 두 놈이 초원에까지 전해진 이름값을 제대로 할지 궁금하군. 항우가 경거망동하지만 않으면 시킨 일 정도는 제대로 해내겠지.”
* * *
우현왕 묵돌의 명령을 받은 다음 날 아침, 한신과 항적은 각각 기병 5천 기를 이끌고 숙영지를 나설 준비를 마쳤다.
유방은 그런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신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면서 소리쳤다.
“왜 나만! 왜 나만 아직 아장이고 동생들은 장군이란 말이냐! 나도 스물네 명이나 되는 부장을 거느리고 싶다고!”
그러자 한신은 파리를 쫓듯 그의 손을 손바닥으로 쳐내면서 얄미운 미소를 지으면서 놀려댔다.
“군법이 지엄하거늘 어딜 감히 아장 따위가 좌대도위의 몸에 손을 대는가? 썩 치우지 못할까? 네 손톱 밑에 낀 때를 보고 있자니 아침에 먹은 육포가 올라올 것 같단 말이다.”
“이······ 이 얄미운 놈이!”
항적은 그 모습을 보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유방을 위로했다.
“푸하하하하하하! 유 형!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오! 한 박사가 재수 없게 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은 아니잖소?”
그 말을 듣고 한신은 고개를 돌려 항적을 흘겨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항 우대도위. 말조심하게. 자네는 워낙 무지해서 흉노군 편제에 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좌대도위는 우대도위의 상관이라네.”
“권한은 거의 같은데 끝까지 유세 부리기는. 유 형은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우현왕께서 곧 유 형을 중하게 쓰실 일이 있을 테니 말이오. 그때는 아마 임무에 걸맞은 작위에 책봉해 주시지 않겠소?”
“그때도 너희보다 낮은 자리에 앉게 되면 확 탈영해 버릴 테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인사를 나눈 후 한신과 항적은 기병대를 이끌고 말을 달렸다.
두 사람은 사흘 동안 남쪽의 히말라야산맥을 따라 함께 행군하다가 드디어 박트리아 왕국의 서동쪽 국경을 넘고는 말을 멈추고 대화를 나눴다.
“항 우도대위.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박트리아 왕국의 대도시인 페르가나가 나온다. 자네의 중기병대는 적국의 수도 박트리아 쪽으로 남하해라. 페르가나만 지나면 온통 평야 지대니까 행군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 내가 페르가나 수비대의 주의를 끌지”
“아 끝까지 형식적으로 한 계급 높다고 하대하네. 알겠소. 한 박사. 내 꽁무니에 페르가나 성문에서 기어나온 추격대가 붙지 않게 잘 해보시오.”
“한 좌대도위라고 불러라. 항 우대도위.”
“아! 둘만 있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짜증 나게 구네! 이놈들아! 날 따라와라! 한시라도 빨리 저 좀생이 서생한테서 떨어지는 거다!”
항적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휘하의 기병에게 소리치더니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한신은 항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한숨을 푹 쉬더니 주변의 부장들에 지시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저 덩치만 큰 어린애가 엉덩이에 화살을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아골타 백인대장. 기병 1백 기를 이끌고 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방어가 허술한 마을을 찾으면 즉시 복귀해라.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는 되도록 적과의 교전을 피하도록. 그동안 나는 페르가나 성벽 근처에 접근해 적의 주의를 끌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좌도대위님.”
한신의 명을 받은 백인대장은 말을 탄 채로 읍한 후 기병 1백 기와 함께 페르가나로 뻗은 길에서 벗어나 북서쪽의 초원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신도 그와 동시에 길을 따라 말을 달리면서 등 뒤의 부하들에게 외쳤다.
“전속력으로 달려라! 항적의 기병대를 앞질러서 페르가나에 먼저 도착해 적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좌도대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