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후일담 – 묵돌의 서역 원정 (3)]
묵돌은 유방과 항적, 그리고 한신의 능력을 확인한 후 그들과 함께 아사달의 병영에 모인 서역 원정군 병사를 훈련하고 고조선 왕실이 보낸 군수품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한부 왕검은 묵돌의 원정을 도울 동맹국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여러 대신과 함께 사흘 동안 궁궐 집무실에서 논의한 끝에 세계지도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가리키면서 상국 한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박트리아 왕국 정벌에 적극 협조할 나라는 셀레우코스 제국뿐일 듯하오. 한 상국. 외조에 그리스어를 가장 유창하게 하는 대신들을 뽑아서 셀레우코스 왕국에 사절단을 보내시오. 안티오코스 왕에게 우현왕의 원정군과 함께 박트리아 왕국 원정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해야겠소.”
“폐하. 셀레우코스 왕국은 분명 박트리아 왕국과 앙숙이지만, 그 외에도 워낙 많은 적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라 우현왕의 서역 원정을 도울 여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안티오코스 왕은 십중팔구 짐의 요청을 수락할 거요. 그러니 어서 사절단과 셀레우코스 왕국에 보낼 선물부터 준비하시오.”
“삼가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마우리아 제국이 전성기를 지나 국력이 쇠하고 많은 영토를 상실한 현재, 셀레우코스 왕국은 고조선 다음가는 세계 2위의 제국으로서 소아시아와 시리아, 페르시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영토로 삼고 1천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강대국이다.
그리고 현재 셀레우코스 왕국의 왕인 안티오코스는 원 역사에서 서쪽의 강자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는 주변국을 거침없이 정복해 나가던 정복 군주로 앞으로 4년 뒤인 기원전 209년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정벌에도 나선다.
하지만, 이 정벌은 박트리아 왕국의 영토를 빼앗는 것보다는 자국이 공격당하기 전에 적국을 선제공격하여 기세를 꺾기 위한 예방 전쟁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부 왕검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안티오코스 왕이 묵돌의 원정에 협력할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지금쯤 셀레우코스 왕국은 파르티아를 견제하는데 병력을 동원해야 하니까 박트리아 왕국을 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일 거다. 그런 상황에서 군량과 군수품만 지원해주면 대신 적국을 정벌해 주겠다는데 반대할 군주는 없지.’
그로부터 이틀 뒤 고조선의 사절단은 값진 선물이 실린 수레를 끌고 실크로드를 지나 현대의 시리아 지역에 있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수도 아케론 강의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사절단이 몇 달에 걸친 여행 끝에 안티오키아의 궁궐에 도착하자 젊은 안티오코스 왕은 고조선의 사절단을 환영하면서 왕검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우리 셀레우코스 왕국도 마우리아와 오랜 세월 동안 좋은 관계를 맺어왔소. 짐 또한 진작에 반역자가 세운 나라인 박트리아 왕국을 정벌하여 나라의 우환을 덜고 우방인 마우리아를 반역자의 군세로부터 지키고 싶었으나 주변의 다른 적국의 위협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오.”
“폐하. 그렇다면 흉노의 선우이시자 고조선의 군주이신 왕검의 청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고조선이 짐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건 분명 신의 뜻이겠지요. 그러니 기꺼이 왕검의 청을 들어 드리겠소.”
“감사합니다. 폐하. 아사달에 계신 왕검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게 고조선과 셀레우코스 왕국 사이에 은밀한 군사동맹이 체결되고 몇 달의 시간이 더 흘러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자 드디어 묵돌의 서역 원정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가 모두 준비되었다.
기원전 213년 9월의 첫날, 한부 왕검은 여러 대신과 함께 고조선의 장수와 정예 보병과 궁수 5만 명을 이끌고 흉노로 돌아가려는 우현왕 묵돌을 배웅하면서 처조카를 격려했다.
“묵돌 좌현왕. 이제 내년 봄이 찾아오면 드디어 서역 원정이 시작되겠군. 부디 반역자의 나라 박트리아 왕국을 정벌하여 조국과 이웃 나라의 백성을 평안케 하고 그대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도록 하게.”
“소장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폐하.”
“한 가지 더 조언하자면 이번에 자네에게 맡긴 병사 중에는 기존의 것보다 위력이 강하고 명중률이 높은 발석차를 만들 수 있는 공병과 불을 뿜는 ‘맹화유궤’라는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병사는 새로 훈련하기 어려울 것이니 헛되이 잃지 않도록 주의하게.”
“폐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한부가 말한 신형 발석차는 바로 원 역사의 중세 유럽과 아시아에서 사용되던 투석기인 트레뷰셋이다.
트레뷰셋은 기존의 투석기와는 달리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돌덩이를 발사하는 것이 특징인데, 덕분에 더 무거운 돌을 더 멀리, 더 정확하게 목표물을 향해 발사할 수 있었다.
또한 맹화유궤(猛火油櫃) 는 원 역사의 송나라가 사용하던 일종의 화염방사기로 석유 성분인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무기이다.
이 동양의 화염방사기는 안전 문제로 주로 해전과 수성전에서 쓰는 것이 보통이고 아직 개발 후 실전에서 사용된 적이 없지만, 묵돌은 이 무기의 시험 발사 장면을 보고나서 한부 왕검에게 간청하여 철로 만든 수레에 장착한 맹화유궤 다섯 기를 얻어냈다.
묵돌은 왕검과 인사를 나눈 다음 원 역사의 초한쟁패기에 활약했던 여러 장수에게 외쳤다.
“부지런히 행군하라! 동상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첫눈이 내리기 전에 겨울을 날 부락에 도착해야 한다!”
그리고 한부는 덩치 큰 검은색 한혈마를 타고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묵돌의 등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범증이 없어서 흉포한 성정이 제어가 안 되는 항우에 소하와 장량이 없어서 천박한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유방이라······. 거기에 재수 없는 성격으로 유명한 한신까지. 묵돌 처조카. 자네가 이 문제아들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궁금하구먼.’
* * *
아사달을 떠난 묵돌 일행은 약 두 달 동안 행군한 끝에 겨울이 오기 전에 좌현왕 두만이 다스리는 부락에 도착했다.
두만은 오랜만에 묵돌이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부락 입구까지 마중 나가는 대신 자기 천막 안에서 장남을 기다리면서 중얼거렸다.
“성정이 거친 장남이 돌아왔구나. 녀석이 또 낡은 전통을 들먹이면서 내 속을 긁을까 봐 걱정이구먼.”
두만과 묵돌 부자는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원 역사의 두만 선우는 그저 묵돌의 배다른 형제를 더 아껴서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기에 장남과 반목했지만, 지금은 흉노를 점차 정주민족의 길로 이끌려는 두만과 고조선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유목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묵돌의 의견충돌이 부자의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였다.
잠시 후 묵돌은 두만의 천막에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오냐.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만난 것치고는 너무 짧고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찾아온 무거운 침묵.
두 부자는 태연해 보였지만, 두 사람 곁에 서있는 흉노의 장수들은 어색한 분위기가 괴로워서 곁눈질로 두만과 묵돌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묵돌은 거의 1년 만에 만난 장남을 냉랭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아버지를 보고 반드시 서역 원정에 성공하겠노라고 다시 한번 결심했다.
‘역시 아버지는 내게 후사를 맡기실 생각이 없으시다. 씁쓸한 일이지만, 좌현왕이 되어 흉노를 다스리려면 거사를 일으키는 수밖에 없겠지.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가족의 피를 보고 권력을 잡는 것보다는 눈엣가시 같은 서역인들을 쳐부수고 내 나라를 세우는 게 훨씬 낫겠지.’
두만은 그런 장남의 생각을 일찌감치 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왕검께서 보내신 전령에게 소식을 들었다. 내년 봄에 박트리아 왕국을 정벌하고 네 나라를 세우겠다지?”
“그렇습니다. 아버지. 겨울이 끝나고 초원에 풀이 돋아나면 저를 따르는 전사들과 왕검께서 맡기신 보병대와 함께 부락을 떠나겠습니다.”
“네 휘하의 전사가 몇 명이나 되더라?”
“한 1만 명 쯤 됩니다.”
“기병 1만 기에 보병 5만 명이라······. 적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구나. 그 정도 병력으로는 대업을 이루는 데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초원의 전사 중 가장 용맹한 자 4만 명을 네게 맡길 테니 한번 원 없이 날뛰어 보아라.”
“그렇게 많은 전사를 제게 맡기시겠다는 말입니까?! 병장기의 질과 장수들의 능력 차이를 생각하면 박트리아 왕국군을 쳐부수는 데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왕검께서 꼭 박트리아 왕국만 정벌하라고 말씀하셨느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서역에 다녀온 상인들의 말에 의하면 박트리아 왕국 서쪽에 있는 바다 주변에는 동맹국인 셀레우코스 왕국을 적대하는 부유한 나라가 많이 있다. 그리고 나라도 이루지 못한 야만스러운 부족민이 다스리는 지역도 많다더군. 고조선의 동맹국만 아니라면 네가 그 모든 땅을 정복한들 널 탓할 제후와 대신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장남을 껄끄러운 전통주의자들과 함께 흉노의 영토에서 먼 곳으로 보내버리려는 두만의 제안.
묵돌은 그 사실을 알아챘음에도 아버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소자가 하늘이 내린 푸른 늑대의 후손다운 전통을 고수하는 무리를 모두 데리고 서쪽으로 사라져 드리지요.”
“꼭 그런 식으로 삐딱하게 얘기해야겠느냐?”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번 원정에 큰 성과를 거둬 아버지께서 소자의 능력을 인정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넌 이미 군주로서나 장수로서나 훌륭한 인재다. 그 사실은 이미 인정하고 있어. 다만 평화로운 시대에 거친 삶을 살려 하는 네 인생관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야.”
“소자가 고조선과 맞먹는 대제국을 건설하면 그것마저도 인정하시게 되겠지요.”
묵돌은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가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에게 지시했다.
“날 따르는 초원의 전사들을 부락 중앙의 공터로 모이라고 전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현왕님.”
잠시 후 흉노의 장수들이 공터에 모이자 묵돌은 그들의 앞에 나서면서 외쳤다.
“나 우현왕 묵돌을 따르는 전사들이여! 본인은 내년 봄이 오면 박트리아 왕국을 넘어 서쪽의 말발굽이 닿는 모든 땅을 정복할 것이다! 너희는 목숨을 바쳐 본인의 뒤를 따르며 충성을 다하겠느냐?!”
우현왕의 질문에 수많은 장수가 입을 모아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묵돌 우현왕님!”
“그렇다면 너희의 천막으로 돌아가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장 아끼는 애마를 데리고 오너라!”
묵돌이 다시 외치자 흉노의 장수들이 수군거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현왕께서 기마궁술 실력을 시험하시려나?”
“그럼 내가 시험에 떨어질 일은 없겠네.”
그러나 흉노의 장수들이 말을 끌고 공터로 돌아왔을 때, 묵돌이 내린 명령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지금 들고 있는 활로 너희의 말을 쏘아죽여라!”
흉노의 전사들은 애마를 부인처럼 아꼈기에 하나같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소리치는 묵돌.
“감히 우현왕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그제야 눈치 빠른 장수들이 먼저 눈물을 머금고 자기 말을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고 부락 안에는 구슬픈 말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 히히히히히히히힝!
우현왕의 명령대로 자기 애마를 쏴죽인 장수는 총 102명 중 아흔 명.
묵돌은 끝내 애마를 죽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하 열두 명을 노려보더니 옆에 있는 장수의 활과 화살을 빼앗아서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자기 명령을 거역한 부하들의 가슴에 화살을 연사했다.
“크아아아악!”
“흐어어어억!”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방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옆에 있는 항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항 동생······. 자네보다 성정이 거친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구먼. 절대로 우현왕께는 욱해서 말대답하지 말게.”
“음······.”